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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번영을 낳은 쇄국, 유신을 낳은 개항: 일본식 시민사회?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번영을 낳은 쇄국, 유신을 낳은 개항: 일본식 시민사회?

건방진방랑자 2021. 6. 9.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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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번영을 낳은 쇄국, 유신을 낳은 개항

 

 

일본식 시민사회?

 

세계와의 접촉을 전쟁으로 시작한 일본은 쇄국 이후 다시금 기나긴 독자적 역사를 전개하게 된다. 그러나 쇄국은 의식적으로 세계와의 단절을 기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쇄국기의 역사는 종전의 쇄국기(9~16세기)와 달랐다. 집 안에 틀어박혀 산다 해도 바깥의 존재를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를 테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이 시기 일본의 역사는 세계사의 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해당한다.

 

바쿠한 체제는 봉건적이면서도 탈봉건적인 요소를 품고 있었다. 지방의 번들은 원래 정치적인 목적에서 성립된 것이었으나, 에도 바쿠후의 장기 집권으로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고 쇄국으로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데 힘입어 점차 경제ㆍ행정상에서의 비중을 더해갔다. 이 점에서 번은 중세 유럽의 봉건영주와 비슷했다. 다만 서양 봉건제의 왕은 영주들과 계약이라는 느슨한 관계를 맺은 데 비해 일본의 바쿠후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의 중심으로 번들과 확실한 군신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중앙의 바쿠후와 지방의 번들은 애초부터 단순한 봉건적 관계에 머물 수 없었다. 우선 번들은 각 영지에서 거둔 세금의 일부를 화폐로 바꿔 바쿠후에 보내야 했다. 또한 분열과 전란의 시대와 달리 통일과 안정의 시대에는 각 지방의 유기적 연계가 중요했다. 따라서 바쿠한 체제에서는 번과 번, 번과 바쿠후 간의 교류와 교통, 거래가 일상화되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상품경제가 필수적으로 발달한다는 점인데, 이것은 봉건제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요소다. 그러므로 바쿠한 체제는 봉건제의 완성이자 와해의 시작이었다.

 

이와 같은 사회구조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측면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바쿠후라는 전국적인 중심과 번이라는 지역적인 중심이 생기면서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근대적인 의미의 도시는 센고쿠 시대 초기부터 생겨났지만, 당시에는 상업과 무역을 중심으로 한 자유도시의 성격이었던 데 비해 바쿠한 체제의 도시는 사회적 분업과 상품경제의 발달을 바탕으로 하는 전형적인 소비도시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도시 인구의 절반가량이 바쿠후나 번 휘하의 무사들이었던 것이다. 특히 에도는 바쿠 후 소속 무사들과 더불어 인질로 잡아둔 다이묘들의 처자와 식구들을 중심으로 거주 인구가 증대해 18세기 초반에는 50여만 명에 이르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인구로 보면 당시 세계 최대의 상공업 도시인 영국의 런던과 맞먹을 정도였다.

 

 

서양의 역사에서는 봉건제가 무너지면서 생겨난 신흥 시민계급(부르주아지)이 사회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자본주의의 발생과 발전에 큰 몫을 담당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에는 바쿠후라는 강력한 권력의 중심체가 지배하는 가운데 도시가 발달했기 때문에 사정이 크게 달랐다. 바쿠후 자체가 봉건제의 주체였으므로 반란 같은 사건을 통하지 않고서는 서양에서처럼 봉건제가 자연스럽게 붕괴하기 어려웠고, 시민들이 곧 무사들이었으므로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어려웠다무사들을 제외한 도시의 일반 시민들은 조닌(町人)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도시의 수공업자와 자영 상인이었는데, 전통적인 다이묘들에게서 배척을 당했지만 개인적 노력으로 상당한 부를 쌓은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돈은 있어도 서양의 시민계급처럼 참 정권과 자치권을 누리지 못한 그들은 문화적으로 그 공백을 메웠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에는 기여하지 못했어도 자본주의 문화에는 기여한 셈이다. 서양의 봉건제가 무의식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것이었다면, 일본의 봉건제는 의식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에서 인위적으로 성립된 체제였던 것이다(이 점은 중국의 봉건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생산력의 발전은 꾸준히 봉건제의 해체를 요구하고 있었다. 대내적 안정과 대외적 쇄국이 지속되면서 에도 바쿠후도 초기와 같은 강력한 경제적 주체의 노릇을 계속하기는 어려웠다. 그 틈을 비집고, 바쿠후의 일을 대신해주면서 바쿠후와의 거래로 재산을 쌓는 상인들이 생겨났다. 이들에게 인구가 급성장하는 대도시는 곧 거대한 시장이었다. 오늘날 일본의 대재벌들 가운데 미쓰이(三井)나 스미토모(住友)는 바로 이 에도 시대의 신흥 상인들을 직계 조상으로 한다.

 

상인들의 등장과 반비례해 바쿠후의 재정은 점차 악화되었다. 이에야스가 애써 일군 막대한 바쿠후의 재산은 17세기 후반 4대 쇼군에 이르러 거의 고갈될 처지에 이르렀다. 그러자 바쿠후는 임의로 화폐개혁을 실시하고 거기서 생기는 엄청난 차액으로 근근이 재정을 꾸렸으나 어디까지나 임시변통일 수밖에 없었다. 바쿠후의 재정난은 차츰 번에 대한 압력으로 전가되었고, 번은 또 농민들에게 그 부담을 전가했다. 그러나 농민들도 예전의 고분고분한 존재가 아니었다. 17세기 중반부터 농민들은 전국 각지에서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켰다. 이쯤 되자 바쿠후는 다이묘의 반란보다도 농민들의 투쟁을 더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인 바쿠후는 쇄국정책을 취하면서도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만큼은 나가사키 항구를 개방하고 교류와 통상을 지속했다. 그림은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인들을 훔쳐보는 일본인들의 모습이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1716년 요시무네(吉宗, 1684~1751)8대 쇼군에 올랐다(이후의 쇼군들은 무능한 인물들이 이어졌으므로 그는 사실상 마지막 쇼군이나 다름없다), 도쿠가와 가문 중에서도 비적통계로 쇼군이 된 요시무네는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위기의 원인이 두 가지인 만큼(재정난과 농민 저항) 그가 준비한 위기 해결책도 두 가지였다.

첫째는 절약, 또 절약이다. 우선 쓸데없는 행사 비용 같은 것을 과감히 줄여 바쿠후 재정의 거품을 뺐다. 아울러 전국의 번과 무사, 백성 들에게 사치를 금하고 엄격한 내핍 생활을 하도록 명했다. 심지어 그는 이제부터 새로운 물건이나 도구를 고안하는 일을 엄금한다.”라는 명을 내렸는데, 사회적 창의성 자체를 거부하고 수구적으로 돌아설 만큼 경제 사정이 어려웠음을 말해준다.

둘째는 사상 통제다. 모든 학문과 출판에서 이단적인 것, 외설스런 것을 금지한다. 이것 역시 진취적인 것을 거부하고 낡은 전통에만 집착하는 수구적인 자세였다.

 

그러나 요시무네는 그것만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긴축은 어려운 시대를 넘기는 방법이지 경제 회복을 이루는 방법이 아니다. 그래서 몇 년 뒤 실행된 2차 개혁은 생산력과 세수의 증대를 목적으로 삼았다. 생산력을 증대시키려면 토지를 늘려야 한다. 그에 따라 전국적으로 미개간지의 개간이 적극 장려되었다.

 

또한 세수 증대를 위해 요시무네는 정면법(定免法)이라는 세제를 도입했다. 그 내용은 과거 수년간의 평균 수확량을 기준으로 세액을 결정한 뒤 차후 몇 년 동안 그 세액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도 근대적 관념의 세제인 지정은제(地丁銀制)가 시행되는 것을 보면, 그 무렵 동북아시아 세계가 봉건제를 탈피하고 근대로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정된 경제에서는 세액의 고정이 누구에게나 편할 수 있겠지만, 당장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다. 게다가 정면법은 흉년에도 세액이 경감되지 않기 때문에 소농민들은 죽을 맛이었던 반면, 좋은 논밭을 많이 가진 지주와 부농에게는 유리했다.

 

결국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단행된 요시무네의 개혁은 정신적으로는 보수와 수구를 강조하고, 경제적으로는 하층 농민들을 억압하는 데 그쳤으므로 오히려 위기의 악화를 초래했다. 농민들의 봉기는 전국적인 차원으로 번졌고, 바쿠후의 재정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집권 세력인 바쿠후는 체제 변화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무렵에는 세계적으로 낡은 체제가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일본도 변화의 계기가 바깥에서 닥쳤다.

 

 

재벌의 싹 에도에서 발달한 대형 포목상의 모습이다. 에도의 상인들은 당시로서 새로운 상술인 박리다매 방식을 구사해 대상으로 성장했다. 이들 중 일부는 오늘날 일본의 재벌로 이어진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일본의 시민사회

닫힌 문을 두드리는 열강

타의에 의한 복귀

바쿠후의 몰락

일본의 머리에 서양의 손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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