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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2장 통일 시나리오, 신라의 성장통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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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2장 통일 시나리오, 신라의 성장통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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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성장통

 

 

그러나 여기에는 의문이 있다. 물론 골품제의 전통은 중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부장제가 당연시되었던 그 시대에 중국에도 전례가 없는 여왕을 옹립하는 일이 쉬웠을까? 고대 일본에는 신화시대에 여성 천황이 있었지만 적어도 역사시대에 동북아시아에서 여성이 국가 수반에 오른 경우는 없었다중국의 경우 여성이 집권한 사례는 있다. 일찍이 한 고조 유방(劉邦)의 아내 여태후는 남편이 죽은 뒤 제국의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녀는 실권만 지녔을 뿐 스스로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7세기 말에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남편인 태종이 죽자 그의 아들 고종(高宗, 재위 649 ~ 683)의 후궁이 되었다가 병약한 고종 대신 권력을 장악했으며, 690년에는 직접 제위에 올라 15년간 재위했다(당나라 때만 해도 유학은 지배 이데올로기였을 뿐 생활의 도덕까지는 못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아내로 삼는 게 가능했다). 시기로 따지면 신라의 선덕여왕은 측천무후의 선배 격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선덕여왕이 즉위할 무렵 신라 왕실에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었을 터이다. 게다가 진평왕이 죽었을 때 덕만은 이미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어 있었다. 왕의 딸이면 공주인데 공주가 스님이 되다니? 지금 같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의 정황을 보면 알 수 있다. 법흥왕 때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불교가 전해진 이래 진흥왕(眞興王)이 특히 불교를 크게 진흥 시켰으며, 진평왕은 한술 더 떠서 자신의 이름을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백정(白淨)이라 했고 왕비의 이름까지도 석가 어머니의 이름인 마야 부인이라 불렀다. 이런 집안에서 딸자식 하나 출가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지금도 티베트 같은 곳에서는 자식 하나를 골라 승려로 만드는 풍습이 전해진다).

 

하지만 굳이 절에 가 있는 덕만을 왕궁으로 불러들인 이유는 뭘까? 사실 귀족들에게는 더 좋은 대안이 있었다. 신라는 원래 아들이 없으면 사위가 왕위를 계승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평왕(眞平王)에게는 사위가 둘이 있었다(맏딸은 출가했으므로 사위가 둘이다). 물론 둘째 사위는 백제의 무왕(武王)이다. 그럼 첫째 사위는 누굴까? 그는 진평왕 시절에 대장군으로 고구려와 싸워 여러 차례 빛나는 전공을 세웠던 김용춘(金龍春)이다. 왕의 사위였던 만큼 당대에도 유명인사였지만 김용춘은 부하와 아들을 잘 둔 덕에 나중에 더욱 역사에 빛나는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의 부관은 바로 김유신이었고, 그의 아들은 훗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金春秋, 602~661)였던 것이다.

 

당연히 김용춘은 왕위계승권을 주장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진평왕의 맏사위이자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의 아들이라는 당당한 신분이었으니 신라 왕위가 그에게 돌아가도 별 하자는 없다. 그가 왕위를 차지하지 못한 이유는 단지 그가 진골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아마 백제 무왕의 상당한 간섭이 있었을 것이다. 무왕도 역시 진평왕(眞平王)의 사위인 데다 일국의 왕이라는 신분이었으니 김용춘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 물론 신라의 귀족들이 백제 왕의 왕위계승을 바랐을 리는 없다. 그러나 어쨌든 무왕(武王)에게도 신라 왕위의 계승권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더구나 진평왕과 개인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라의 귀족들은 그 난감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절에 가 있던 덕만을 불러들인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치열하게 다투던 김용춘과 무왕이 모종의 합의를 보고 대타를 세우기로 한 걸까?

 

 

 여왕의 균형 감각 출가했던 이력이 있는 만큼 선덕여왕은 불교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전대에 완공된 황룡사에 거대한 목탑을 세우도록 한 것도 여왕이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분황사라는 또 하나의 사찰을 건립하게 한 사실이다. 이름의 ()’은 향기라는 뜻인데 사찰 이름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혹시 여왕은 황룡사의 남성적 이미지를 분황사로 중화시켜 균형을 잡으려는 의도를 가졌던 건 아니었을까? 사진은 황룡사 목탑과 대조되는 분황사 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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