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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5장 복고의 열풍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종횡무진 한국사 -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5장 복고의 열풍

건방진방랑자 2021. 6. 20.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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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장 복고의 열풍

 

 

시대착오의 정신병

 

 

불과 두 달 동안의 전쟁이었지만 병자호란(丙子胡亂)7년 동안 벌어진 임진왜란에 비해 결코 피해가 적지 않았다. 전란으로 인한 파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다지 큰 피해는 없었다. 청군은 온갖 약탈과 방화, 강간을 저질렀지만 기간이 길지 않았으므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일본군이 저지른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임진왜란으로 이미 주요 궁궐들이 소실되어 있었으니까 더 이상 불타 없어질 건물도 별로 없었다. 따라서 이번 전란의 피해는 물질적인 것보다 사회적인 데 있다.

 

우선 청군에 의해 붙잡혀간 사람이 무려 50만에 달한다는 게 커다란 사회문제다. 전쟁포로가 그렇게나 많았을까? 물론 그건 아니다. 청나라는 조선을 마음대로 유린하면서 돈이 있거나 신분이 높은 집안의 사람들, 특히 부녀자들을 마구잡이로 납치했다. 그 이유는 나중에 그들을 돌려보낼 때 몸값을 받아내기 위해서다. 아마 명나라 침략에 필요한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그런 수단을 구사했을 텐데, 어쨌든 명분을 주장할 수 없는 처지의 패전국으로서는 당장 그들의 송환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민간인을 잡아간 청나라의 수단도 비열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만, 그 문제에 대처하는 조선 사대부(士大夫)들의 자세는 비열함을 넘어 황당할 정도다.

 

제 나라 백성들과 제 집 여자들이 적에게 잡혀 갔는데도 그 가장 들은 책임을 느끼기는커녕 안쓰럽게 여기지도 않는다. 몸값이 아까워설까? 더러는 그렇기도 했을 터이다. 보통 한 사람당 30냥 정도였지만 비쌀 경우 1500냥까지도 했으니까. 그러나 그 때문만은 아니다. 어이없게도 그들은 식솔들이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혔다는 것을 맨먼저 떠올린다. 심지어 그들은 가족들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더러운 몸으로 돌아올 마음을 먹느냐고 분노한다. 못난 정부와 못난 가장을 둔 탓에 적국에 끌려가 온갖 수모를 겪은 조선의 여성들은 오히려 한양에 들어오기 전에 더럽혀진 몸을 씻어야 했고, 이후에도 환향녀(還鄕女)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굴욕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고향에 돌아온 여자라는 뜻의 환향녀라는 말에서 화냥년이라는 비어가 나왔으니 아이러니다. 이것이 여성용 욕이라면 이에 어울리는 남성용도 있으니, ‘후레자식이라는 욕도 호란이 남긴 자취다. 청나라 오랑캐[]에게 잡혀갔다[] 돌아온 여자가 낳은 아이를 호로(胡虜) 자식이라 부른 데서 비롯된 욕설이다.

 

집권 사대부(士大夫)들의 사태 인식이 이 정도라면 전란을 겪은 뒤 조선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전란의 피해보다도 유사 이래 처음으로 국왕이 오랑캐 앞에 무릎을 끓었다는 게 가장 큰 치욕이다(‘이적夷狄에 임금 있음이 중화에 임금 없음만 못하다[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는 게 논어(論語)의 가르침이었으니 오죽할까?), 고대 삼국시대에도, 고려시대에도, 또 얼마 전까지도 한반도 왕조들은 무수한 외침을 겪었지만 그런 노골적인 수모는 처음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미 동북아의 패자는 중화세계에서 비중화세계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시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이라면 당연히 그런 역사적 흐름을 깨달았어야 했다. 50년 동안 두 차례나 비중화세계의 오랑캐들이 일으킨 대형 전란에 시달렸다면, 거기서 뼈아픈 역사의 교훈을 얻었어야 했다. 그 참에 그들은 역대 한반도 왕조들이 겪은 침략의 역사를 살펴보고 당면의 정세와 앞으로의 사태 변화를 파악했어야 했다. 그들이 하지 못했으니, 여기서 그들을 대신하여 한반도의 침탈사를 간단히 정리해보자.

 

 

삼국시대에 겪은 침략(고구려 초기 한나라와 랴오둥 정권의 침략, 후기의 삼국통일 전쟁)은 중국의 한족 왕조가 한반도를 중화세계로 끌어 들이는 과정이었다. 이것이 성공하면서 한반도는 중화세계의 막내로 편입되었는데, 불행히도 이후 중화세계는 동북아의 중심에서 서서히 물러나고 북방의 비중화세계가 강성해진다. 고려 초기에 거란의 침략을 당하고, 중기에 여진의 금에 사대하고, 후기에 몽골의 속국이 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고려는 내내 중화세계의 일원이 되고자 노력했으며, 그 결과 조선이라는 역사상 가장 완벽한 유교왕국이 성립했다. 여기에는 때마침 중국에서 복고 바람을 타고 한족 왕조가 부활한 덕분이 크다(그런 의미에서 명나라는 단지 이민족 지배에 반발하는 분위기에 편승해서 성립했을 뿐 역사적 존재 가치는 전혀 없는 왕조다). 그러나 시대적 조류는 중화세계가 더 이상 우물 안 개구리로 존속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고(또 다른 비중화세계인 일본의 도전이 그것이다), 결국 그 와중에 명나라는 무너진다.

 

이와 같은 역사적 추이로 보나, 청나라가 대륙을 정복한 현재의 상황으로 보나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은 명백했다. 비록 씻을 수 없는 국치를 당한 것은 가슴아픈 일이지만, 역사적ㆍ현실적 필연성을 솔직히 인정하고 새 시대에 어울리는 역동적인 체제 개혁의 길로 나서야 했다. 마침 기존의 질서가 송두리째 파괴된 상황을 맞았으니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조건은 갖춰진 셈이었다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미처 몰랐겠지만 당시는 세계적으로도 격변의 시대였다. 멀리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인 영국에서는 시민혁명이 한창이었고, 유럽 대륙에서는 30년 전쟁(1618~48)의 소용돌이 속에서 근대 사회의 문턱으로 향하는 진통을 겪고 있었다. 이 진통이 끝나면 유럽 세계는 200년 전의 대항해 시대에 이어 다시 세계 진출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이것이 동양사에서 말하는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 세력의 동양 진출)의 시작이다. 물론 극동 세계에서 유럽의 그런 변화까지는 충분히 예측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동양으로 온 수많은 가톨릭 선교사들을 통해 유럽의 사정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므로 조금만 촉각을 곤두세운다면 적어도 당시가 세계사적인 전환기라는 사실은 감지하기에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들이 택한 노선은 그런 시대적 요구와는 정반대다. 그들은 그저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던 중화적 질서가 오랑캐에 의해 깨졌다는 사실에 분개할 따름이다(환향녀들에 대한 태도는 그 분풀이다). 그랬기에 전후 그들이 맨먼저 착수한 역사 서술은 역사적 흐름을 읽어내고 거기서 당면의 과제를 추출하기보다 그들의 견해에 부합되지 않는 과거 역사를 바로잡는 작업이었다. 광해군(光海君) 시절에 기록된 선조실록을 수정해서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편찬을 시작한 게 바로 그것이다. 이유인즉슨 대북파가 득세하던 시절이라 이이, 성혼, 정철(鄭澈), 유성룡 등 서인의 주요 보스들에 대해서 왜곡된 기록이 많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 작업은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부터 기획된 것이었으니 전란으로 미뤄진 일을 처리한다는 의미가 있었지만, 전후의 혼란스런 정국에서 하필 그 작업이 우선시된 이유는 뭘까??

 

그것은 그들이 수구적인 자세를 굳히기로 작정했음을 뜻한다. 그들은 동북아를 휩쓸고 있는 거센 변화의 흐름을 거슬러 좋았던 옛날로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해야 할 임무는 두 가지다. 우선 대외적으로는 이제부터 조선이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중화세계임을 분명히 하는 일이다(이것이 이른바 소중화小中華 이념으로 나타난다). 그 다음 대내적으로는 조선을 완벽한 사대부 국가로 만드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일이다(여기에는 당쟁의 지속과 업그레이드가 포함된다).

 

결국 엄청난 전란의 발톱이 할퀴고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셈이다. 집권 사대부들은 아무 것도 반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전보다 더욱 강력한 수구적 자세와, 전보다 더욱 강렬한 복고적 태도와, 전보다 더욱 강경한 반동적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정신병적인 시대착오로 빠져들어간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런 배경에서 우리 역사상 가장 민족적이고 자주적인 학문적 경향(이를테면 실학)예술적 조류(이를테면 진경산수화와 판소리)가 탄생했다는 것은 역사의 장난이다.

 

 

두 개의 실록 못난 왕은 복도 많다. 그저 오래만 재위했을 뿐 한 일이 없었는데도 선조는 죽어서 선조실록(위쪽)선조수정실록(아래쪽)의 두 가지 실록을 받았다. 두 차례의 대형 전란을 치르고서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사대부(士大夫)들은 집권 당파에 따라 실록을 달리 만들었는데, 이 새로운 전통은 경종 때까지 계속된다.

 

 

허망한 북벌론

 

 

집권 사대부(士大夫)들이 온통 오랑캐에 대해 절치부심하고 있을 무렵, 그들과는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오히려 오랑캐 나라의 심장부에 머물면서 오랑캐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오랑캐를 통해 멀리 서양의 문물까지 열심히 익히려 한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사대부 신분이 아니었기에 고리타분한 성리학적 세계관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쯤이면 그가 누군지는 명확해진다. 바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끝난 뒤 청나라의 선양(瀋陽)랴오둥 한복판에 자리잡은 선양은 누르하치 시대에 청나라의 수도였다. 청나라가 대륙을 정복하면서 수도는 베이징으로 옮겼으나 그 뒤에도 동북 지역의 주도로 기능했으며, 현재도 랴오닝성의 성도(省都). 선양을 우리식으로 읽으면 심양이 되는데, 심양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게 있다. 바로 몽골 지배기 고려의 심양왕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심양왕은 어떤 의미에서 한반도 왕조에게 만주의 관할권이 귀속된 기회이기도 했으나 고려 정부는 그 기회를 스스로 팽개쳤다. 이곳에서 10년 가까이 생활한 소현세자는 한 번쯤 그때의 아쉬운 역사를 회상해보지 않았을까?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다.

 

아버지와 함께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 앞에서 항복의 예를 올리던 때만 해도 그는 조선의 어느 사대부보다도 치욕에 온몸을 떨던 젊은이였다. 그러나 동생인 봉림대군(鳳林大君, 뒤의 효종)과 함께 8년 여를 청나라에서 지내면서 그는 그동안 자신을 포함하여 조선의 지배층이 얼마나 좁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1644년 청군이 베이징에 입성할 때는 그도 직접 따라가서 두 달 동안 머물기도 했는데, 여기서 그는 독일의 선교사인 아담 샬(Adam Schall)과 만나 서양의 각종 과학 서적들과 지구의, 망원경 등의 문물, 그리스도교의 경전과 그리스도상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 중에서 아마 그에게 가장 큰 인상을 준 것은 지구의가 아니었을까? 공처럼 둥근 지구의 모습과 드넓은 유라시아 대륙, 게다가 거대한 바다와 광활한 신대륙을 보면서 아마 그는 중화세계만이 문명 세계라는 편협하고 시대착오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이 여지없이 부서져나가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진 한복판에서 보인 세자의 행동은 본국의 사대부(士大夫)들에게 어떻게 비쳤을까? 그들이 볼 때 그것은 좋게 말해서 방종이고 나쁘게 말하면 추태다. 당연히 그들은 인조(仁祖)에게 부지런히 상소를 올려 세자를 단속하라는 압력을 가한다. 그들은 세자가 적의 편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심지어 적국에서 지나치게 많은 경비를 쓰고 있다는 비난까지 퍼붓는다. 하지만 오히려 소현세자는 열심히 새로운 문물을 배우는 한편 청나라 황족 및 장군들과 시귀면서 두 나라의 외교를 도맡아 청이 무리한 요구를 하려 할 때면 현지에서 무마시키고 차단하는 성과도 올렸으니 사대부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인조(仁祖)는 사대부들의 편이다. 그 자신이 국치의 주인공이기도 한 데다가 처음부터 반정을 통해 즉위한 왕이었으니, 생리적으로 그들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반정의 선배인 중종中宗과 다르지 않다). 게다가 벌써 몇 차례나 궁궐과 백성들을 버리고 사대부들과 함께 전란을 피해 도망쳐본 경험이 있는지라 사대부들과는 끈끈한 공범의식(?)과 유대감도 있다. 그런 그에게는 청나라에서 소현세자를 사실상의 왕으로 간주한다는 소문조차 아들의 능력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자신의 왕위에 대한 위협으로 들린다. 여러 가지로 못난 왕이다. 게다가 청나라에 아들의 행동을 감시하는 밀정까지 보냈으니 못난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소현세자가 16452월 오랜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을 때 국내의 반응이 어땠을지는 뻔하다. 사대부들의 부추김을 받은 인조(仁祖)는 아들을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고, 아들이 가져온 서양 문물에 대해서는 더욱 강렬한 혐오를 보였다. 거기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각오는 했지만 너무나도 차디찬 아버지의 냉대에 못 이겨 소현세자가 귀국 후 2개월 만에 병석에 눕게 되자 사대부(士大夫)들은 엄청난 음모를 꾸민다. 바로 세자를 살해하는 것이다. 물론 공식적으로 세자는 학질에 걸려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앓아 누운 지 나흘 만에, 그것도 처참하게 피부가 썩은 상태로 죽었다면 그가 과연 진짜 병사했다고 믿을 수 있을까?

 

그들의 잔인함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과부가 된 세자빈 강씨에게까지 뻗친다. 인조가 그것까지 내버려둔 이유는 아마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왕위가 넘어가는 것을 꺼린 탓일 게다. 게다가 여기에는 그가 총애하는 후궁인 조소용(趙昭容)이 강빈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게 단단히 한몫을 했다. 평소에도 세자 부부에 대해 여러 가지로 모함했던 그녀는 인조가 먹을 음식에 강빈이 독을 넣었다는 이야기를 꾸민다. 결국 이듬해 강빈은 사약을 받았고 비운의 부부가 남긴 어린 세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역시 사약을 받고 부모 뒤를 따랐다(막내는 너무 어려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한 가족사로서는 슬픈 이야기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당시 조선의 냉엄한 현실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현세자의 독살을 주도한 것은 사대부(士大夫)들이겠으나 인조(仁祖) 역시 알면서도 묵인한 듯하다. 이렇게 왕위계승자가 음모로 살해될 정도라면 조선은 분명히 왕국이 아니라 사대부 국가. 소현세자의 정치적 잘못이라면 그런 조선의 정체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아마 그는 선양에 머물 때 장차 귀국해서 조선에 선진 문물을 적극 도입할 꿈을 꾸었을 테지만, 조선은 국왕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왕국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현세자의 일가가 몰살됨으로써 세자 자리는 자연히 그의 동생인 봉림대군에게 넘어갔다. 형과 함께 선양에서 8년 동안 생활하며 국내와의 마찰이 있을 때마다 형을 거들던 그였지만 인물됨은 아마 형과 달랐던 듯하다. 하기야, 설사 그가 형처럼 진보적인 성향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살벌한 조정의 분위기에서는 마음을 바꿔먹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아예 형과는 정반대로 행동한다. 애초에 왕위계승과는 인연이 없다가 예기치 않게 왕위를 물려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실록이 되었어야 할 일기 선양에 머물던 시절 소현세자의 행적을 담은 심양일기(瀋陽日記). 세자가 즉위했더라면 당연히 나중에 실록을 편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을 것이지만 불행히도 세자는 사대부(士大夫)들의 모함과, 그들의 사주를 받은 못난 아버지로 인해 그동안 배운 선진 문물과 새로운 세계관으로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1649인조(仁祖)가 죽자 봉림대군은 효종(孝宗, 1619~59, 재위 1649~59)으로 즉위했다. 서인 정권으로서는 2대째 연이어 국왕을 옹립한 셈이다. 인조도 반정으로 즉위했다는 약점 때문에 사대부(士大夫)들의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면, 그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그는 형이 죽음으로써 왕위에 올랐을 뿐 아니라 형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죄의식도 있었으니 여러 가지로 왕권을 내세울 수 없는 처지다. 사대부들은 그런 효종을 마음대로 조종하면서 소현세자를 살해한 음모보다 더 크고 더 황당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북벌(北伐)이다.

 

북벌이라면 청나라를 친다는 계획이 아닌가? 그런데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청나라에 복속된 조선으로서 감히 생각할 수 있는 구상일까? 물론 공식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청나라의 눈을 피해 비밀스럽게 진행해야 한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국내의 반대 세력, 즉 친청파(親淸派)를 제거해야 한다.

 

반정 이후 서인 정권이 오래 지속되면서 서인들도 두 파로 갈렸다(파를 갈라 다투는 건 조선 사대부들의 전매특허다). 인조(仁祖)의 치세에는 반정에 직접 가담한 이른바 공서파(功西派)가 주류였고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가 비주류였다. 두 차례의 전란에서 주화론자가 다수였던 탓으로 자연히 공서파는 친청파가 되고 청서파는 반청파로 편제된다. 1647년에 최명길이 죽으면서 공서파이자 친청파의 단독 보스에 오른 자는 김자점(金自點, 1588~1651)이었다그는 바로 소현세자의 아내인 강빈과 세 아들을 제거하는 음모의 총지휘자였다. 그런 그가 친청파를 이끌었다는 사실에서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수준을 읽을 수 있다. 소현세자야말로 청나라를 우호적으로 대하면서 청나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배워 조선을 발전시키려 했던 친청파가 아닌가? 하지만 불행히도 김자점의 친청파는 그와 크게 다르다. 그들은 오로지 청나라와 결탁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게 목적이었으니, 정치 철학이나 이념 같은 게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비록 편협한 성리학적 세계관이나마 나름대로 학문적인 자세에서 논구하려 했던 당쟁 초기, 100년 전의 사대부(士大夫)들에 비해 크게 퇴보한 모습이다.

 

병조판서로 병권을 장악한 데다 손자를 인조의 소생인 효명옹주와 혼인시켜 왕실의 외척으로 권력을 떨치던 김자점, 그러나 그는 인조가 죽은 뒤 곧바로 청서파의 송준길(宋浚吉, 1606~72)로부터 탄핵을 받아 실각한다. 사실 공서파는 반정으로 집권한 이상 인조의 사후에는 권력을 보장받을 수 없는 운명이었으나, 그래도 그로서는 권좌에서 물러난 게 억울할 수밖에 없다. 이제 그가 매달릴 것은 오로지 청나라뿐, 그래서 그는 청서파가 북벌을 획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청나라에 알려 권토중래를 꿈꾼다. 예상한 대로 청나라는 군대와 사신을 보내면서 신속한 반응을 보였지만 청서파의 대응은 더 신속했다. 효종(孝宗)이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자 김자점은 곧바로 반역자가 되어 버린다. 그가 처형당함으로써 조정은 청서파와 반청파의 독무대가 되었다(불행히도 전란으로 한동안 중단되었던 말만의 역모가 또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단독 콘서트의 주역으로 떠오른 인물은 바로 송시열(宋時烈, 1607~89)이다(송준길은 그의 친척인데, 둘은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게 된다). 그는 청서파에게서 명망이 높았을 뿐 아니라 봉림대군이 왕위와 무관하던 시절인 1635년에 그의 스승을 지내기도 했던 인물이니만큼 효종(孝宗)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그가 중용된 것은 당연하다인조(仁祖) 때는 과거를 통하지 않고 재야에서 직접 인물을 추천받아 관직에 등용 시키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을 흔히 산림(山林)이라 부른다. 송시열과 그의 스승인 김장생(金長生, 1548~31), 김집(金集, 1574~1656) 부자가 그런 케이스다. 이들이 청서파의 주력으로 등장했음은 물론이다. 산림이 등용되었다는 것은 곧 그만큼 반정공신 세력이 약했다는 뜻인데, 이 점이 중종반정(中宗反正)인조반정(仁祖反正)차이이기도 하다. 사대부(士大夫)들의 공분을 자아냈던 연산군(燕山君)에 비해 광해군(光海君)은 그와 같은 부류의 폭군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사실이다.

 

이제 송시열(宋時烈)이 이끄는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적어도 국내에서는 아무 눈치도 볼 필요가 없이 북벌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북벌은 공공연한 비밀이 된다. 그러나 그렇듯 거창하게 드라이브를 건 북벌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을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다. 주요 사업이라 할 만한 것은 남한산성의 방어를 강화하고, 어영청의 군사를 세 배로 늘리고, 중앙군의 대부분을 기병화한 정도였다. 북벌론자들은 아마 수도를 가급적 오래 방어하고 정부가 남한산성에 피난했을 때 가급적 오래 버티는 걸 북벌로 착각한 모양이다. 그나마 북벌에 어울리는 사업이라면 북도에 성들을 새로 쌓고 농민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한 것인데, 이것은 오히려 백성과 지방 수령들에게 반발을 사서 역효과를 빚는다(게다가 그것 역시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니 엄밀히 말해 북벌 준비라 할 만한 것은 못 된다).

 

결국 효종(孝宗)이 재위 10년 만인 1659년에 죽으면서 북벌은 흐지부지 되고 만다. 그 이념부터 소아병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에 뿌리를 둔 것이었으니 출발부터 예고된 결과였지만,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대체 이미 사라진 중화세계를 되살리려 한다는 게 올바른 일일까? 적어도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 하지만 북벌을 추진하면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한 가지 중요한 성과를 얻는다. 역시 잃어버린 중화세계를 되살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새 중화세계를 건설할 수는 있다. 그래서 그들은 허망한 북벌 계획을 포기하고 그 대신 조선을 중화세계로 만드는 작업으로 선회하게 된다. 성리학의 소아병은 이제 집단적 정신병으로 발전했다. 조선의 병은 마침내 정점에 이르렀다.

 

 

 

 

소중화의 시작

 

 

효종(孝宗)의 죽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물론 북벌은 어차피 실행에 옮기지도 못할 허망한 꿈이었으니 북벌이 중단된 문제는 아니다. 또 그의 아들 현종(顯宗, 1641~74, 재위 1659~74)이 순조롭게 왕위를 이었으니 왕위계승 문제도 아니다. 새로 등장한 논란거리는 바로 장례 예절에 관한 문제다.

 

왕이 죽었으니 모두들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얼마나 입을 것인가, 즉 복상(服喪) 기간을 얼마로 정할 것인가는 문제가 된다. 알다시피 효종은 형인 소현세자가 죽음으로써 둘째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다. 집안의 혈통으로 보면 둘째지만 나라의 혈통으로 보면 국왕이니까 맏이에 해당하는 자격으로 볼 수도 있다.

 

그게 왜 중요할까? 우선 그의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仁祖)의 계비인 조대비를 가리키는데, 정식 명칭은 장렬왕후(莊烈王后). 효종 때 자의(慈懿)라는 존칭을 받았으므로 보통 자의대비라고 부른다. 인조의 정비인 인열왕후가 죽은 뒤 1638년에 계비로 들어왔다. 인조가 죽자 그녀는 스물다섯 살의 젊은 나이로 대비가 되었다. 아들에 해당하는 효종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것도 기구하지만 효종마저 죽으면서 그녀의 복상 문제가 정치적 초점으로 떠올랐으니 더욱 기구한 팔자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 손자에 해당하는 현종이 죽고 난 뒤에도 똑같은 문제에 시달리게 된다. 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탓이랄까?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가 그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면 그녀는 여느 사대부(士大夫) 집안의 경우와 같이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하지만, 효종(孝宗)이 국왕이라는 사실을 더 중시한다면 그녀는 여느 국상(國喪)의 경우처럼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마당에 쓸데없이 격식을 따진다는 느낌은 있지만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는 국가인 만큼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다(앞서 예종성종, 연산군중종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왕실에서도 촌수와 무관한 혼인이 성립했던 조선 초기에 비하면 훨씬 예절과 격식이 엄격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바로 사대부(士大夫) 국가의 성과다). 문제는 바로 그것을 사대부들이 좋은 당쟁거리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예송논쟁(禮訟論爭)이라 불리는 사건이 시작된다.

 

오랫동안 서인 정권에 밀려 권력에서 소외되어 지냈던 남인들은 바야흐로 권좌에 복귀할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다(그동안 남인이 완전히 밀려난 것은 아니고 서인과 일종의 연립정권을 이루었으나 우세한 측은 단연 서인이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주장한 1년 복상을 맞받아쳐서 그들은 3년을 주장하고 나선다. 그러나 아직 남인의 세상이 오기에는 시기상조였다. 결국 1년 복상이 통과되면서 남인은 재수생의 길을 걷게 된다이 과정에서 유배된 인물 중에는 남인이었던 윤선도(尹善道, 1587~1671)도 있었는데, 정철(鄭澈)의 경우처럼 그도 역시 오랜 은거와 유배 생활을 하면서 많은 문학 작품을 남겼다. 윤선도는 모두 합쳐 40년 동안이나 유배를 당하거나 은거하면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오우가(五友歌)를 쓰는 등 문학을 열심히 했고, 나머지 기간에는 남인의 일원으로서 당쟁을 열심히 했다. 학자와 관료의 구별이 없었듯이 시인과 정치가의 구별도 없었으니 가히 제정일치의 원시시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얼핏 보면 예절에 관한 논쟁이라니까 어딘가 점잖고 품위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상은 권력을 배후에 깔고 있는 다툼이었으니 말하자면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다. 이 점은 15년 뒤에 벌어진 예송논쟁의 제2라운드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16742효종(孝宗)의 아내이자 현종(顯宗)의 어머니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이제는 대왕대비가 된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초점이 된다. 다만 이번에는 며느리의 상인지라(며느리도 역시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다.) 1년 복상과 9개월 복상으로 내용은 바뀌었다. 물론 서인이 9개월이고 남인이 1년이다. 여기서 허목(許穆, 1595~1682)과 윤휴(尹鑴, 1617~80)1년 복상설을 관철시켜 보기좋게 역전승을 거두면서 남인은 드디어 권력을 쟁취한다.

 

같은 사안임에도 시차를 두고 정반대의 결론이 나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말할 것도 없이, 그렇듯 복잡하고 근엄해 보이는 논쟁이 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양측은 온갖 폼을 잡고 마치 엄청난 철학 논쟁이라도 벌이듯이 옛 문헌들을 뒤져가며 엄격하고 치밀하게 예법을 따졌지만, 실제로 승부를 결정한 것은 어느 측의 정치적 세력이 더 컸느냐였다.

 

물론 서인과 남인이 마음 속의 권력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은 아니다. 아마 논쟁에 참여한 사대부(士大夫)들 가운데는 권력과 무관하게 진심으로 예법에 관한 의견을 피력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양측은 나름대로 학문적 근거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다. 서인은 조선의 법전에 해당하는 경국대전, 남인은 주례, 예기와 함께 3례의 하나인 의례를 문헌적 근거로 삼았다. 이를 학문적으로 해석한다면, 서인은 성리학적 편향이 강했던 데 비해 남인은 성리학 이전의 유학, 육경학(六經學)의 입장에 서있었다고 할 수 있다육경이란 주역서경시경(詩經)예기춘추의 전통적인 5경에 효경(孝經)을 더한 것이다. 모두 공자(孔子)의 시대나 그 이전의 문헌들이므로 육경을 중시하는 것은 원시 유학의 학풍에 속한다. 그에 비해 성리학은 주희(朱熹)가 편집한 사서, 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대학을 기본 교과서로 삼고 있으므로 육경학보다는 복고적 성향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남인의 집권은 그렇잖아도 수구와 복고를 지향하는 조선 사회를 약간 더 보수적으로 만들었다고 할까?.

 

그렇다면 양측이 왜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그렇게 정했는지도 분명해진다. 골수 성리학자인 서인들은 효종(孝宗)이 둘째 아들인 만큼 사대부에 대한 예우에 준해서 처리하고자 한 것이며, 그에 반해 성리학적 성향이 그보다 약한 남인들은 왕에 대한 예우는 사대부(士大夫)와 다르다는 논리를 편 것이다(그래서 굳이 비교하자면 남인들의 주장이 왕권 강화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조선은 사대부 국가이므로 별 차이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측의 입장 차이가 아니다. 당시에는 어느 측의 논리가 옳고 어느 측이 집권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였겠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정작으로 중요한 것은 왜 하필 그 무렵에 예송논쟁이 벌어졌는가이다. 조선 건국 이래 둘째 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경우가 효종(孝宗)이 처음은 아니다. 또한 국상을 치러본 경험도 그동안 숱하게 많았다. 그런데 왜 유독 효종 부부의 장례 절차만이 문제가 된 걸까?

 

조선 내부만 놓고 본다면 그 사건은 조선이 성리학적 이념에 어울리는 이상적인 유교 국가 체제에 한층 접근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제 조선은 사대부(士大夫)들이 왕족의 장례 절차마저도 논쟁을 통해 결정할 만큼(정작 상주喪主인 현종顯宗조차 그 논쟁에 개입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완벽한 사대부 국가가 되었다. 앞서 전란이라는 비상 시기에도 사대부들은 조선이 취해야 할 노선을 놓고 주화론과 주전론으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을 벌였지만, 이번 예송논쟁은 관혼상제라는 일상적인 관습마저도 그들이 정한 유교 예법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따라서 이제는 지배 권력만이 아니라 조선 사회 전체가 완전히 유교화된 것이다. 유교적 예법의 하나인 동성 간의 통혼 금지가 전면적으로 실시된 게 바로 현종(顯宗) 때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왜 예송논쟁을 벌였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조선 내부가 아니라 그 바깥, 즉 동북아의 정세 변화다. 알다시피 1644년에 유교적 국제 질서의 중심인 명나라가 멸망했고, 유교 문명의 고향인 중원은 오랑캐의 청나라가 정복했다. 중화세계가 사라진 것이다. 한동안 잃어버린 중화세계에 대한 향수를 허망한 북벌 계획으로 달래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제 조선을 또 하나의 중화, 작은 중화(소중화)로 만든다는 거창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러자니 이제부터는 모든 유교적 예법을 자신들이 직접 만들고 가다듬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예송논쟁은 그 소중화 프로젝트의 신호탄이다.

 

그렇다면 이제 비로소 조선은 사대주의를 완전히 극복한 걸까?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이제부터 중국이 아니라 조선이 (문명)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으니, 마침내 1천 년이 넘게 간직해온 사대 의식을 버리고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을 찾은 걸까? 불행히도 정반대다. 그건 사대의 극복이 아니라 사대의 변종이다. 사대의 대상이 사라졌는 데도 주체로 돌아오지 못하고 오히려 사대의 대상을 허구적 우상으로 만들어 주체 속으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무렵부터 조선 사회에서는 실학(實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조류가 나타나고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는 새로운 미술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실학은 조선을 대상으로 하는 현실적인 학문 운동이며, 진경산수화는 중국의 산수를 그리던 조선 화기들이 조선의 산수를 화폭에 담기 시작했으니 겉으로만 보면 주체적인 변화인 듯 보인다. 물론 그런 변화를 싸잡아 평가절하할 수는 없겠지만, 그 배경에는 중화의 본산이 사라지고 없다는 위기감이 자리잡고 있었으니 결코 주체적인 전환이라고는 할 수 없다. 진짜 중화가 붕괴한 뒤 조선이 중화 이념이라는 허구적인 옷으로 갈아입고서야 비로소 겉으로나마 주체성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은 역사의 커다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실제로 이 무렵은 마치 중국 대륙에서 망한 중화세계가 바로 조선 속으로 옮겨온 듯한 분위기였다. 예를 들어 서인 계열의 학자인 유계(柳棨)가 쓰고 송시열(宋時烈)이 서문을 붙인 1667년의 역사서 여사제강(麗史提綱)에서는 한반도의 기년을 중국 기년보다 우위에 두었으며, 남인 계열의 홍여하(洪汝河)휘찬여사(彙纂麗史)에서 중국의 역사를 한반도의 역사 속에 넣어 서술했다. 아무리 역사학도 시대의 분위기를 따른다지만 불과 수십 년 만에 학풍180도 달라진 현상은 어떻게 봐야 할까? 당시의 소설가였던 김만중(金萬重)정철(鄭澈)의 시가를 과대포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 시문은 그 말을 버리고 타국의 말을 배운 격이다. 설령 십분 비슷하다 해도 단지 앵무새가 하는 사람의 말일 뿐이다.” 얼핏 주체적인 자세를 부르짖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의 말은 중국이 중화로 있을 때를 그리워하고 있다(그때 조선은 앵무새에 불과했다!). 그가 사미인곡을 전국시대 중국의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에 견주며 높이 평가한 게 그의 속내를 말해준다.

 

 

중화의 변종들 중화세계가 사라지고 없는데 그 똘마니들은 여전히 남아 부지런히 입을 놀렸을 뿐 아니라 당파의 보스가 되었다. 그림은 중화의 똘마니이자 소중화(小中華)의 보스인 서인 대표 송시열(왼쪽)과 남인 대표 허목(오른쪽)이다. 이 중화의 변종들 때문에 조선의 시대착오는 더 오래 갈 조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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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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