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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왕국의 시대 - 2장 진화하는 사대부, 특이한 ‘반란’(예종, 남이, 유자광)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8부 왕국의 시대 - 2장 진화하는 사대부, 특이한 ‘반란’(예종, 남이, 유자광)

건방진방랑자 2021. 6. 17.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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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진화하는 사대부

 

 

특이한 반란

 

 

아무리 3차 건국자로서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지만 세조에게는 단종(端宗)의 폐위와 살해, 금성대군을 위시한 형제들 간의 분쟁, 소장파 사대부(士大夫)들의 거센 도전 등 일련의 사건들이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었다.

 

그가 소수의 측근들만 믿고 중용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덕분에 한명회(韓明澮)를 비롯해서 정인지, 권남, 신숙주, 정창손 등 일찍이 수양대군 시절부터 세조를 따랐던 3차 건국의 공신들은 막강한 정치적 권세와 막대한 경제적 부를 누렸다특히 한명회는 세조의 심복을 넘어 수족과 같은 사랑을 받았다. 심지어 세조는 그를 나의 장량 이라고 부르면서 끔찍이 아꼈는데, 세조 역시 자신이 조선의 새 건국자임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정도전이 조선의 장량이라고 자칭한 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이시애의 난에서도 한명회가 연루되었다는 설이 나돌았으나 세조는 간단한 심문을 한 뒤 무혐의 처리하기도 했다. 그런 세조의 지원 덕분에 한명회는 자신의 딸을 다음 두 임금의 비로 들여놓고 세조보다 오래도록 권세를 유지했는데, 그가 세조실록의 편찬을 지휘한 것은 한편으로 키워준 보스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 왜곡의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비정상적인 왕위 승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윤색과 치장이 필요했을 테니(앞서 말한 안평대군에 대한 모함이 그런 예라고 할까?). 세조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 그들은 전제군주를 보좌하는 신료(臣僚)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 것이며, 조선의 절대왕정기는 실제(18세기)보다 수백 년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조는 앞서의 건국자들(태조와 태종)이 그랬듯이 각고의 노력 끝에 집권했으면서도 정작 재위 기간은 길지 않았다.

 

독재자가 사라지면 정국이 혼란스러워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14689월 세조가 병으로 죽고 둘째 아들 예종(睿宗, 1450~69, 재위 1468~69)이 즉위하자 문제는 즉각 터져나온다(예종의 형은 세자였던 1457년에 열아홉 살의 나이로 죽었는데, 나중에 덕종德宗으로 추존되었다). 그 방아쇠 역할을 한 인물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스물일곱 살에 병조판서가 된 남이(南怡, 1441~68)였다. 비록 반란 진압의 최고 책임자는 노장군인 강순(康純, 1390~1468)이었고 남이는 어유소(魚有沼, 1434~89)와 함께 부사령관이었으나, 아마 남이는 다른 두 사람과 달리 상당한 정치적 야망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강순과 어유소는 무관으로만 뼈가 굵은 장군들이지만 남이는 개국공신의 자손인 데다가 태종의 외손이었으니 아무래도 단순한 무관의 신분은 아니다. 이렇듯 가문 좋고 출세 빠른 젊은이에게 줄 대는 인물들이 많아지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원래 튀어나온 못은 망치질을 받기 쉬운 법이다. 남이의 야심과 초고속 승진은 남의 이목을 끌기에 족했고, 그 중에는 이시애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함께했던 유자광(柳子光, ?~1512)이라는 자가 있었다. 같이 고생한 처지에 누구는 병조판서에 올랐으니 그는 불만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는 남이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는 사실인데, 당시 권신들의 공통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세조의 치세에는 오히려 강점이었겠으나 그가 죽으면서 이제 그들은 강력한 후원자를 잃었다. 예종은 스물일곱의 나이에도 어머니 정희왕후(貞熹王后, 세조의 비)의 수렴청정을 받는 데다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한명회(韓明澮)와 신숙주 등 세조의 참모들에게 국정을 위임한 상태다. 조선의 주인이 죽으면서 질서의 중심도 사라졌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현실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건 기득권자의 입장일 뿐이고 권력을 노리는 자에게는 오히려 그런 상황이 좋은 기회다. “내 팔자에 무슨 난리야??” 이런 속담도 있듯이 없는 놈 팔자에는 난세가 더 유리하니까.

 

 

유자광도 역시 뛰어난 무예와 비위를 잘 맞추는 재주로 세조의 사랑을 듬뿍 받은 처지였으나 그밖에도 그에게는 남이에게 없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잔머리와 눈치가 바로 그것이다. 146810월 그는 타고난 재능을 십분 발휘한다. 궁성에서 남이와 함께 당직을 서던 중에 들었던 남이의 속내를 예종에게 고한 것이다. 물론 남이의 입장에서는 세조가 죽고 난 뒤 흔들리는 시국을 논한 것이겠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정치적 견해로 탈바꿈될 수 있다. 유자광의 전략은 멋지게 성공한다. 남이는 곧 체포되었고 조직을 대라는 추궁과 고문 끝에 엉뚱하게도 강순마저 끌어들여 함께 처형된다. 그 공로로 한명회(韓明澮), 신숙주, 노사신 등이 다시 공신으로 추대되었으며, 유자광은 공신의 지위와 더불어 보너스로 가족이 몰살된 남이의 집까지 얻었다(이로써 또 다시 공신의 수가 늘었다).

 

단순히 유자광이라는 인물의 모함으로 남이라는 인물이 죽은 사건이라면 개인적으로는 억울한 사건일지라도 역사적으로는 중요하다 할 수 없다. 남이의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그 속사정이 아니라 사건을 둘러싼 정황에 있다. 무엇보다 반란이요 역모로 규정되었음에도 지극히 조용하다는 점에서 대단히 특이한 사건이다. 앞서 사육신(死六臣) 사건의 경우에는 그래도 반역의 음모가 구체적으로 진행되었고 반란의 실체도 있었으나 이번 경우는 그런 실체가 없는 말만의 역모가 피바람을 부른 격이다그래서 야사에는 남이가 유자광의 모함을 받은 경위에 관해 그럴듯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후 남이는 칠언절구로 된 멋드러진 시를 읊었는데, 그 내용을 번역하면 이렇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끓게 하고 /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말리도다 / 사나이가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면 / 후대에 누가 대장부라 불러주리[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이 호방한 시의 셋째 구절인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에서 유자광은 ()’()’으로 살짝 바꾸었다고 한다. 글자 한 자만 바뀐 것이지만 뜻은 사나이가 나이 스물에 나라를 정복하지 못하면이 되었으니 정치적 야심이 뚝뚝 묻어나는 의미로 완전히 달라졌다. 믿거나 말거나의 이야기지만, 글자 하나, 말 한 마디로 목숨이 왔다 갔다할 만큼 예민한 당시의 정국을 말해주는 에피소드라 하겠다.

 

그러나 특이한 사건도 자주 일어나면 평범한 사건이 되게 마련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후 조선에서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행동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대부(士大夫)들 간의 모함만으로 대형 역모가 꾸며지고 대규모 처형과 옥사가 뒤따르고 아울러 그때마다 공신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웃지 못할 현상이 속출하게 된다. 이런 해프닝에도 그럴듯한 이름이 있는데, 머잖아 터져나오는 이른바 사화(士禍)가 바로 그것이다.

 

 

두 가지 반란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이시애와 남이의 반란은 서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사건이었다. 이시애는 세조의 중앙집권책에 반대해서 일으킨 실제 반란이었고, 남이의 사건은 순전히 말로만 엮인 역모였다. 보편적인 역사에서라면 전자의 경우가 많아야겠지만, 희한하게도 이후 조선의 역사에서는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이다. 사진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도 억울하게 죽은 남이장군의 묘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특이한 반란

세종의 닮은 꼴

사대부의 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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