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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 8부 왕국의 시대, 2장 진화하는 사대부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종횡무진 한국사 - 8부 왕국의 시대, 2장 진화하는 사대부

건방진방랑자 2021. 6. 17.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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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진화하는 사대부

 

 

특이한 반란

 

 

아무리 3차 건국자로서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지만 세조에게는 단종(端宗)의 폐위와 살해, 금성대군을 위시한 형제들 간의 분쟁, 소장파 사대부(士大夫)들의 거센 도전 등 일련의 사건들이 커다란 정치적 부담이었다.

 

그가 소수의 측근들만 믿고 중용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덕분에 한명회(韓明澮)를 비롯해서 정인지, 권남, 신숙주, 정창손 등 일찍이 수양대군 시절부터 세조를 따랐던 3차 건국의 공신들은 막강한 정치적 권세와 막대한 경제적 부를 누렸다특히 한명회는 세조의 심복을 넘어 수족과 같은 사랑을 받았다. 심지어 세조는 그를 나의 장량 이라고 부르면서 끔찍이 아꼈는데, 세조 역시 자신이 조선의 새 건국자임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정도전이 조선의 장량이라고 자칭한 것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이시애의 난에서도 한명회가 연루되었다는 설이 나돌았으나 세조는 간단한 심문을 한 뒤 무혐의 처리하기도 했다. 그런 세조의 지원 덕분에 한명회는 자신의 딸을 다음 두 임금의 비로 들여놓고 세조보다 오래도록 권세를 유지했는데, 그가 세조실록의 편찬을 지휘한 것은 한편으로 키워준 보스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 왜곡의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비정상적인 왕위 승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윤색과 치장이 필요했을 테니(앞서 말한 안평대군에 대한 모함이 그런 예라고 할까?). 세조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 그들은 전제군주를 보좌하는 신료(臣僚)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 것이며, 조선의 절대왕정기는 실제(18세기)보다 수백 년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조는 앞서의 건국자들(태조와 태종)이 그랬듯이 각고의 노력 끝에 집권했으면서도 정작 재위 기간은 길지 않았다.

 

독재자가 사라지면 정국이 혼란스러워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14689월 세조가 병으로 죽고 둘째 아들 예종(睿宗, 1450~69, 재위 1468~69)이 즉위하자 문제는 즉각 터져나온다(예종의 형은 세자였던 1457년에 열아홉 살의 나이로 죽었는데, 나중에 덕종德宗으로 추존되었다). 그 방아쇠 역할을 한 인물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스물일곱 살에 병조판서가 된 남이(南怡, 1441~68)였다. 비록 반란 진압의 최고 책임자는 노장군인 강순(康純, 1390~1468)이었고 남이는 어유소(魚有沼, 1434~89)와 함께 부사령관이었으나, 아마 남이는 다른 두 사람과 달리 상당한 정치적 야망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강순과 어유소는 무관으로만 뼈가 굵은 장군들이지만 남이는 개국공신의 자손인 데다가 태종의 외손이었으니 아무래도 단순한 무관의 신분은 아니다. 이렇듯 가문 좋고 출세 빠른 젊은이에게 줄 대는 인물들이 많아지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원래 튀어나온 못은 망치질을 받기 쉬운 법이다. 남이의 야심과 초고속 승진은 남의 이목을 끌기에 족했고, 그 중에는 이시애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함께했던 유자광(柳子光, ?~1512)이라는 자가 있었다. 같이 고생한 처지에 누구는 병조판서에 올랐으니 그는 불만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는 남이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는 사실인데, 당시 권신들의 공통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세조의 치세에는 오히려 강점이었겠으나 그가 죽으면서 이제 그들은 강력한 후원자를 잃었다. 예종은 스물일곱의 나이에도 어머니 정희왕후(貞熹王后, 세조의 비)의 수렴청정을 받는 데다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한명회(韓明澮)와 신숙주 등 세조의 참모들에게 국정을 위임한 상태다. 조선의 주인이 죽으면서 질서의 중심도 사라졌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현실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건 기득권자의 입장일 뿐이고 권력을 노리는 자에게는 오히려 그런 상황이 좋은 기회다. “내 팔자에 무슨 난리야??” 이런 속담도 있듯이 없는 놈 팔자에는 난세가 더 유리하니까.

 

 

유자광도 역시 뛰어난 무예와 비위를 잘 맞추는 재주로 세조의 사랑을 듬뿍 받은 처지였으나 그밖에도 그에게는 남이에게 없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잔머리와 눈치가 바로 그것이다. 146810월 그는 타고난 재능을 십분 발휘한다. 궁성에서 남이와 함께 당직을 서던 중에 들었던 남이의 속내를 예종에게 고한 것이다. 물론 남이의 입장에서는 세조가 죽고 난 뒤 흔들리는 시국을 논한 것이겠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정치적 견해로 탈바꿈될 수 있다. 유자광의 전략은 멋지게 성공한다. 남이는 곧 체포되었고 조직을 대라는 추궁과 고문 끝에 엉뚱하게도 강순마저 끌어들여 함께 처형된다. 그 공로로 한명회(韓明澮), 신숙주, 노사신 등이 다시 공신으로 추대되었으며, 유자광은 공신의 지위와 더불어 보너스로 가족이 몰살된 남이의 집까지 얻었다(이로써 또 다시 공신의 수가 늘었다).

 

단순히 유자광이라는 인물의 모함으로 남이라는 인물이 죽은 사건이라면 개인적으로는 억울한 사건일지라도 역사적으로는 중요하다 할 수 없다. 남이의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그 속사정이 아니라 사건을 둘러싼 정황에 있다. 무엇보다 반란이요 역모로 규정되었음에도 지극히 조용하다는 점에서 대단히 특이한 사건이다. 앞서 사육신(死六臣) 사건의 경우에는 그래도 반역의 음모가 구체적으로 진행되었고 반란의 실체도 있었으나 이번 경우는 그런 실체가 없는 말만의 역모가 피바람을 부른 격이다그래서 야사에는 남이가 유자광의 모함을 받은 경위에 관해 그럴듯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후 남이는 칠언절구로 된 멋드러진 시를 읊었는데, 그 내용을 번역하면 이렇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끓게 하고 /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말리도다 / 사나이가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면 / 후대에 누가 대장부라 불러주리[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이 호방한 시의 셋째 구절인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에서 유자광은 ()’()’으로 살짝 바꾸었다고 한다. 글자 한 자만 바뀐 것이지만 뜻은 사나이가 나이 스물에 나라를 정복하지 못하면이 되었으니 정치적 야심이 뚝뚝 묻어나는 의미로 완전히 달라졌다. 믿거나 말거나의 이야기지만, 글자 하나, 말 한 마디로 목숨이 왔다 갔다할 만큼 예민한 당시의 정국을 말해주는 에피소드라 하겠다.

 

그러나 특이한 사건도 자주 일어나면 평범한 사건이 되게 마련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후 조선에서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행동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대부(士大夫)들 간의 모함만으로 대형 역모가 꾸며지고 대규모 처형과 옥사가 뒤따르고 아울러 그때마다 공신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웃지 못할 현상이 속출하게 된다. 이런 해프닝에도 그럴듯한 이름이 있는데, 머잖아 터져나오는 이른바 사화(士禍)가 바로 그것이다.

 

 

두 가지 반란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이시애와 남이의 반란은 서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사건이었다. 이시애는 세조의 중앙집권책에 반대해서 일으킨 실제 반란이었고, 남이의 사건은 순전히 말로만 엮인 역모였다. 보편적인 역사에서라면 전자의 경우가 많아야겠지만, 희한하게도 이후 조선의 역사에서는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이다. 사진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도 억울하게 죽은 남이장군의 묘다.

 

 

세종의 닮은꼴

 

 

예종(睿宗)은 남이의 기묘한 반란을 진압한 것을 거의 유일한 치적으로 남기고 재위 1년을 겨우 넘긴 146911월에 병으로 죽었다. 그토록 강력했던 아버지 시절의 왕권을 크게 약화시킨 게 또 다른 치적이라 할까? 어차피 그가 살아 있을 때도 실제 국정은 어머니가 맡았으니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도 그녀의 몫이다. 예종의 아들이 너무 어려 즉위할 수 없다고 본 정희왕후는 예종의 형인 덕종의 열세 살짜리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데, 모두 자신의 아들이고 손자이니 그녀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예종의 조카가 왕위를 이은 셈인데, 아직도 부자 승계의 원칙이 확고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이렇게 해서 조선의 9대 왕인 성종(成宗, 1457~94, 재위 1469~94)이 즉위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7년간 할머니의 섭정이 지속되다가 1476년에 친정(親政)을 시작한 성종의 치세는 한 마디로 세종 시대의 복사판이라 말할 수 있다. 세종이 그랬듯이 성종도 왕권과 신권을 잘 조율해가며 자칫 혼란으로 치달을 수 있는 정국을 매끄럽게 이끌었다. 두 임금의 닮은꼴은 아마 전 왕들(태종세조)23의 건국자로서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며 국가의 성격을 크게 변화시켰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뿌리가 제거되지 않는 한 평화기에도 모순은 숙성한다. 성종도 세종처럼 자신의 치세까지는 그럭저럭 평화를 유지했으나, 오히려 그 시기에 더욱 익고 자란 모순은 결국 후임자의 치세에 사건으로 터져나오게 된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두 임금을 성군(聖君)이나 현군(賢君)으로 부를 수 없는 이유다.

 

일단 토지 문제가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았으므로 정치 일선에 나서는 성종은 그런 대로 홀가분한 기분이다. 그것은 친정에 나서기 전인 1470년에 시행된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 이름 그대로 관에서 거두어 관에서 배급한다는 제도의 덕분이다. 앞서 보았듯이 세조의 직전법은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아무리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收租權)을 허용한다고 목이 터지도록 외쳐봤자 한 번 제 손에 들어온 토지를 순진하게 반납하는 자는 없을뿐더러 공신이 늘면서 세습 토지도 자꾸 늘어나기만 한다. 사실 수조권 개념을 유지하는 한 유일한 대책은 왕조를 교체하거나 아니면 왕조 교체나 다름없는 쿠데타 정권이 계속 들어서는 것밖에 없다. 그래야만 새 정치 세력이 이전의 모든 토지 소유를 무효화하고 새로 밑그림을 그릴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관수관급제는 모든 문제의 근원인 수조권을 폐기한다는, 획기적이면서도 불가피한 발상을 바탕으로 한다. 알다시피 과전법(科田法)에서는 관리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토지의 생산물을 수취하는 방식으로 봉급을 받았다. 그러나 새 제도는 모든 토지 생산물을 일단 관에서 수납한 다음 관리에게는 녹봉을 지급하는 방식을 채택한다(물론 그 녹봉은 화폐가 아니라 현물이다). 얼핏 보면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알고 보면 사뭇 다르다. 우선 정해진 수조율 이상으로 과도하게 착취하던 관행을 없애 백성들의 원성을 줄인 게 당장의 효과다. 더 큰 성과는 직전법(職田法)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과전법(科田法)의 문제점을 시정했다는 점이다. 현직에서 물러난 관리에게는 아예 녹봉을 지급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과거처럼 국가가 전직 관리의 토지를 반납받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다. 게다가 국가에서 모든 관리의 봉급을 직접 관장하게 된 덕분에 정부의 위신과 권위가 높아진 것은 보너스 효과다.

 

구분 과전법(科田法) 직전법(職田法)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
시기 고려 말 공양왕 조선 세조 조선 성종
목적 사대부의 경제 기반 마련 지급할 토지의 부족 해결 국가의 토지 지배권 강화
지급대상 전직, 현직 관리 현직 관리 국가의 수조권 대행
결과 토지 제도의 모순 해소 농장 확대의 계기 토지 사유화 현상 진전

 

 

이래저래 성종은 할머니가 고마웠을 것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왕위를 준 데다가 토지제도의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더욱이 할머니가 섭정을 맡은 기간 동안 그는 왕이 되기 위한 속성 특별과외를 통해 세종에 버금가는 문화군주로서의 자질을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친정을 시작하면서 그의 자질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우선 세조 때 중지된 경연을 부활시켜 학자들과의 토론을 즐기며 실력을 과시한 그는 도서관에 불과했던 홍문관(弘文館)에 집현전의 직제를 도입해 본격적인 정책 토론기관으로 탈바꿈시키는 한편, 나아가 중앙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를 적극적으로 육성해 유교 정치의 화려한 부활을 부르짖는다. 불안한 정국의 안정을 타개하기 위해서, 또 비정상적으로 즉위한 데 따르는 왕권을 위해서도 유교 이념은 만병통치약이다. 이런 성종의 처지는 50년 전의 세종과 다를 바 없다.

 

아닌 게 아니라 마치 증조부와의 닮은꼴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성종의 치세에 간행된 서적들 중에는 세종 때부터 편찬이 시작된 것들이 유독 많다. 세종 때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 시작했던 인문지리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노사신이 완성했고, 최항이 시작했던 역사서 동국통감(東國通鑑)서거정(徐居正, 1420~88)이 완성했다여기서 문헌의 지은이에 관해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시험문제 중에서도 가장 악의적(?)이며 유치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어떤 문헌의 지은이를 대라는 문제다. 하지만 여기서도 보듯이 동국통감의 지은이는 최항이기도 하고 서거정이기도 하다. 더 헷갈리는 것은 최항이나 서거정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의 문헌들, 나아가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문헌들은 문인의 문집같은 것을 빼면 거의 모두가 집단창작물이다(지금까지 언급한 문헌들도 그랬고 앞으로 언급할 문헌들도 편의상 지은이를 소개하겠지만 실상은 여러 사람의 공동 저작이라 보면 된다). 물론 핵심 편찬자는 있지만 특정한 지은이는 없다. 서양의 경우에는 개인 저작의 역사가 무척 오래지만, 동양의 경우에는 전통적으로 문헌을 특정한 개인이 저술하는 경우가 없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그것은 문헌을 간행하는 목적이 독자가 읽기 위한것이라기보다는 위정자가 참고하기 위한것이었기 때문이다.

 

유교 이념의 꽃이라 할 예법 교과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세종세조의 시대를 거쳐 진행되어온 작업이 성종 때 강희맹(姜希孟, 1424~83)과 신숙주의 손으로 마무리되었다. 성종 때의 독창적인 문헌 작업이라면 1493년에 성현(成俔, 1439~1504)이 편찬한 악학궤범정도다(여기에는 유자광도 거들었다).

 

 

세종의 복사판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안정기였다는 점에서 성종의 치세는 여러 가지로 세종 때와 닮은꼴이다. 그런 점을 무엇보다 잘 보여주는 사실은 왕성한 출판 활동이다. 사진은 성종 때 간행된 대표적인 문헌들인 역사서 동국통감(위쪽)과 예악서 악학궤범(아래쪽)이다.

 

 

또한 북변을 침략하는 여진을 내몰기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까지 북진을 시도한 것도 세종과의 닮은꼴이다. 이미 만주 지역의 판도도 여러 민족으로 분화돼 있어 여진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아우르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건주여진(建州女眞) 또는 야인(野人)이라 불렀다(建州란 중국 측에서 랴오둥과 만주를 가리키던 이름인데, 정작 중국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인데도 마치 중국의 주현인 것처럼 불렀으니 대단한 중국인들이다). 6진과 4군으로 압박전술을 가한 세종과 달리 세조는 4군을 철폐하고 여진에 대해 회유책을 썼지만, 세종을 추종한 성종이 어떻게 나갈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이미 이시애의 난이 진압된 직후 명나라의 제안으로 양국이 합동 토벌작전을 전개한 바 있었으나(어유소가 강순처럼 남이의 사건에 연루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토벌전에 참전했기 때문이다), 성종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1479년 윤필상(尹弼商, 1427~1504)을 보내 건주여진의 본거지를 쳤고 12년 뒤에는 허종(許琮, 1434~94)을 보내 두만강쪽 변경을 다지게 했다.

 

우상을 추종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우상의 단점마저 본받는다면 문제다. 세종은 만년에 신병으로 고생하느라 국정을 돌보지 못했지만, 자신의 치적에 지나치게 흡족해한 성종은 집권 후기에 들어 유흥과 오락에 빠져든다(영웅은 호색이라 했던가? 유달리 여색을 탐한 데서도 성종은 세종과 닮았다. 그는 최소한 열두 아내에게서 최소한 스물일곱 명의 자녀를 낳아 이 부문에서 세종과 함께 조선 국왕들 중 톱클래스에 속한다). 그에 따라 사회의 기강도 해이해지면서 퇴폐 풍조가 만연하고 공직 사회가 부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작 큰 문제는 그런 왕실의 허점을 틈타 사대부(士大夫) 세력이 점차 정국의 운영권을 틀어쥐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성종이 끝까지 직무에 성실한 군주였다 해도 어차피 문제는 발생했겠지만.

 

 

사대부의 분화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변증법의 법칙만이 아니다. 사대부(士大夫) 세력도 점점 수가 늘면서 더 이상 동질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더욱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리고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공신들이 대거 인플레되는 탓에 이제 번듯한 사대부라면 누구나 공신 한 명쯤은 조상으로 두고 있을 정도다(공신의 부와 지위는 세습이 허용된다는 점을 상기하라), 특히 예종(睿宗)에 이어 성종에게도 딸을 시집 보내 2대 연속해서 임금의 장인이 된 한명회(韓明澮)의 기세는 자못 하늘을 찌를 듯하다예종의 비는 장순왕후이고 성종의 비는 공혜왕후인데, 둘 다 한명회(韓明澮)의 딸이다. 그런데 예종과 성종은 삼촌-조카 사이니까 성종은 숙모의 동생을 아내로 맞아들인 격이다. 더구나 두 여자는 모두 후궁이 아니라 국왕의 정비(正妃). 유교적 예법을 고려한다면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결혼 관계지만, 왕실에서도 그런 관계가 용인될 정도였다면 조선 초기의 유학 이념이 어느 정도 실천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조선은 처음부터 유교왕국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출발한 왕조였으나 초기에는 유교적 예법이 그리 엄격하게 적용되지 못했다. 즉 유교 이념은 아직까지 정치 분야에서만 적용되었을뿐 실생활의 영역에까지 침투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유교적 예법이 생활화되는 것은 사대부(士大夫)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조선 중기부터의 일이다(따라서 조선 초기를 다룬 TV 사극에서 엄격한 유교적 예법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게다가 그는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1등 공신이 된 이후 세조가 즉위했을 때, 남이의 사건이 진압되었을 때, 성종이 즉위했을 때도 공신에 올라 1등 공신만 네 차례나 차지한 베테랑 공신이다. 또한 비록 그만은 못해도 정창손, 홍윤성, 신숙주, 노사신 등 공신 명예의 전당에 득시글거리는 인물들은 모두 세조 때부터 공신의 지위와 권력을 누려온 자들이다. 이들 공신 1기생들이 이른바 훈구파(勳舊派)를 이룬다.

 

사대부(士大夫) 중에 특권층이 생겨났으니 그에 대립하는 층도 자연히 생겨난다. 그들은 이른바 사림파(士林派)를 이룬다역사에 나오는 용어들이 대개 그렇듯이 훈구파나 사림파도 당대에 쓰던 용어가 아니라 후대의 역사가들이 붙인 이름이다. 그래도 훈구파는 실체가 분명하지만 사림파는 훈구파에 반대하는 사대부 정치 세력을 편의상 일컫는 말일 뿐 훈구파만큼 동질적인 세력은 아니다. 쉽게 말해 훈구파는 신분상으로 제도권의 관료 세력이고 정치적으로 왕당파 사대부이며, 사림파는 재야 세력으로서 사대부의 독자적인 정치를 꿈꾼 사대부(士大夫)라고 보면 되겠다. 훈구대신들에게 도전했던 인물이 바로 남이였고 당시 남이가 대변하고 있었던 세력이 곧 사림파였다. 사실 성종이 즉위한 뒤 정희왕후가 섭정을 맡았던 기간 동안 실제로 국정에 관한 전권을 움켜쥐고 국왕의 임무를 대신 수행한 것은 섭정이 아니라 훈구대신들이었다. 따라서 성종이 토지 문제가 해결된 것에 대해 정작으로 고마워할 대상도 실은 할머니보다 그들이었다. 실제로 관수관급제의 내용을 봐도 기득권층인 훈구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제도임은 금세 알 수 있다.

 

사실 세조가 죽기 직전에, 그러니까 정권이 바뀔 무렵에 훈구파는 새 정권하에서도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한 가지 장치를 해둔 바 있다. 1467년 그들은 훈구파의 원로 대신들이 원상(院相)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승정원 업무를 관장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만든 것이다. 승정원이라면 왕의 비서실이니까 이곳을 장악한다면 사실상 국정 전반을 총지휘할 수 있다. 당시 세조는 아들 예종(睿宗)이 부실하다고 여긴 탓에 그 조치를 허락했지만, 그 때문에 사대부(士大夫) 세상이 앞당겨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원상은 성종이 친정을 펼치면서 폐지되지만 이미 훈구파는 얻을 걸 다 얻었다.

 

 

이대로 영원히!’라는 모토를 실현하기 위한 훈구파의 노력은 눈물 겨울 정도다. 우선 그들은 왕실과 각종 혼맥을 맺어 제도외적인 면에서도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는다. 또한 중앙정부만 손에 넣는 데 만족하지 않고 지방에까지 손을 뻗친다. 사실 중앙에서는 권력을 얻을 뿐이고 정작 권력에서 나오는 단물은 지방을 장악해야만 빨아먹을 수 있다. 그래서 훈구파의 촉각은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경재소(京在所)와 유향소(留鄕所)에 집중된다경재소란 지방 관청의 한양 연락소인데, 쉽게 말하면 한양에 파견된 각 지방의 유력자가 머물고 있는 거처다. 또한 유향소란 지방 유지들이 모인 곳으로서,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 수령을 보좌하는 역할을 한다. 성격과 기능이 그러한 만큼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경재소와 유향소는 잘 쓰면 약이 되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된다. 즉 경재소는 지방과 한양의 유력자 간에 뇌물을 주고받는 장소로 전락할 여지가 충분하고, 유향소는 지방 유지들이 수령을 손에 넣고 주무르는 곳이 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중앙권력의 자신감과 사회의 기강이 결정할 문제인데, 당시의 분위기상 어느 쪽일지는 짐작이 간다(중앙집권을 도모한 태종은 유향소를 독으로 보았기에 철폐했고 세종은 약으로 쓸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다시 부활시켰다). 그 결과 지방은 일부 지역 유지들과 중앙의 훈구대신들이 마음껏 수탈하는 사냥터가 되어 버린다. 지방의 세력자들은 모자라는 정치적 권력을 보충했고 중앙의 고관들은 경제적 이득을 취했으니 서로 분업의 정신에 투철했다고 할까?

 

이쯤 되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게 고려 말의 상황이다. 중기 이후 토지제도가 무너지고 무신정권과 몽골 지배기에 중앙정치가 문란해지는 틈을 타서 온갖 탈법과 불법으로 재산을 증식하고 왕실과 혼맥을 구축해서 권력을 유지하던 자들이 바로 권문세족 아닌가? 훈구파는 바로 그들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고려 말에 권문세족에게 대항해서 신진사대부가 등장했듯이 훈구파에 대항해서 사림파가 등장하는 것은 필연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사림파는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처럼 성리학적 이념으로 돌아가자고 소리 높여 외친다. 하지만 도덕 정치를 구현하자는, 겉으로 드러난 모토의 배후에는 권력에서 소외된 불만이 도사리고 있다.

 

훈구파가 모든 것을 장악한 상황에서도 사림파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성종이 친정에 나선 덕분이다. 훈구파의 권력 독점을 심각하게 여긴(아울러 왕권에 대한 그들의 간섭을 피곤하게 여긴) 성종은 스무 살의 젊은이답지 않게 비제도권의 사림파를 훈구파의 대항 세력으로 키워 균형을 맞추는 노회한 전략을 구사한다. 마침 그의 치세에는 정변이라 할 만한 게 없어 공신 세력이 큰 힘을 쓰지 못했으므로 그 전략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누구나 말로는 부정할 수 없는 이념을 무기로 내건 덕분일까? 훈구파의 상대적인 약세를 틈타 사림파는 별다른 정치적 공로도 없이 손쉽게 훈구파의 맞수로 떠올랐다. 훈구파가 지방 통제의 전진기지로 유향소를 활용하자 사림파는 그에 맞서 사마소(司馬所)를 장악하고 지방행정에서 발언권을 확보하고자 한다. 사마소란 사마시(司馬試), 즉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합격한 지방의 젊은 유학자들이 자체적으로 설립한 기구인데, 생원과 진사라면 과거에는 합격했으나 자리가 없어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자들이었으니 현실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은 이루지 못한 관리의 꿈을 지방 수령의 행정에 간섭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보상받으려 한다. 하기야 그들은 과거에 합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국역이 면제되었고 항촌 사회에서 존경을 받았으니 달리 할 일도 없었다.(어떤 의미에서 이는 왕과 사대부의 이중 권력이 지배하는 중앙행정의 원리가 지방행정에까지 관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현실의 권력체와 상징의 권력체가 분리되는 특성은 두고두고 조선사회의 질곡으로 작용한다. 오늘날까지도!)

 

 

재야의 힘 제도권의 사대부들이 사대부(士大夫)의 본을 버리고 왕당파로 변질(?)되는 것에 재야의 사대부들은 분노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일단 지방에서 숨죽이며 후학들을 길러낸다. 사진은 성종 대에 지어진 강릉향교인데, 이런 향교들이 든든한 포석으로 자리잡고 있었기에 사대부들의 집권이 가능했다.

 

 

중앙에서는 성종의 간접 지원으로, 또 지방에서는 젊은 유림의 활약으로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여기에도 훈구파의 한명회(韓明澮)에 못지 않은 보스가 등장하게 된다. 한명회가 지위와 권력과 혼맥으로 보스의 자리를 꿰어찼다면 사림파의 보스는 재야 세력답게 학문과 실력으로 당당히 주변 인물들에게서 보스라는 인정을 받는다. 그는 바로 김종직(金宗直, 1431~92)이라는 학자다. 원래 그의 가문은 고려 말 신진사대부의 거두였던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 1353~1419)를 본받는 것을 전통으로 삼았으니 성리학적 이념에 대해서는 당연히 순도 높은 진골이다여기서 눈여겨볼 게 하나 있다. 흔히 고려 말 고려 왕조에 절개를 지켰던 세 충신을 삼은(三隱)이라 부른다. 이색(李穡), 정몽주, 길재가 그들인데 그들의 호가 각각 목은(牧隱), 포은(圃隱), 야은(冶隱)이었던 데서 나온 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종직의 가문에서 존경한 인물들 중에 삼은 가운데 유독 이색(李穡)만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이색만이 경상도 본관이 아니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정몽주(鄭夢周)의 본관은 영일이고 길재의 본관은 해평으로 둘 다 경상도지만(해평은 경북 선산에 속한다), 이색(李穡)은 한산 이씨니까 충청도 사람이다. 그런데 김종직은 바로 선산 김씨다. 김종직이 자타가 공인하는 영남학파의 태두로 군림한 데는 처음부터 그런 지방색이 강하게 작용한 건 아닐까?. 바야흐로 사림의 봄을 맞아 그는 본격적인 대여 비판 의 선두에 섰으며, 아울러 영향력 있는 제자들을 길러내서 사림파를 훈구파에 대적할 수 있는 수준으로 키우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이렇게 해서 사대부(士大夫)는 크게 두 파로 분화되었다. 엄밀히 말해 훈구파가 사대부의 부분집합이라면 사림파는 그 여집합에 해당하므로 대립 세력이라고 부르기는 적절치 않지만, 어쨌든 그 전까지 비교적 동질적이었던 사대부 세력은 이제 두 줄기로 나뉘었다. 그들은 표면상 서로 대립하고 있지만 공동의 이해관계도 있다. 그것은 바로 왕권에 맞서고 있다는 점이다(비록 훈구파는 왕당파 사대부이지만 왕을 단지 자기들 권력의 상징적 원천으로 삼고자 하는 데 불과하다). 따라서 사대부의 분화는 사대부 세력의 약화를 뜻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전반적으로 보면 크게 강화되었음을 뜻한다. 언제라도 왕권이 약해지거나 왕권에 허점이 보이면 그들은 조선이라는 왕국사대부 국가로 바꾸려 할 것이다. 그 순간은 그들의 예상보다 더 이르게 다가온다.

 

 

정치 지망생들의 명단 조선 사회 특유의 학자-관료 체제에서 학자란 순수하게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치인이거나 정치 지망생이었다. 지방 유림 세력의 거점인 유향소도 일종의 재야 정치 집단이었다. 사진은 향촌을 지배하는 유향소 구성원들의 명단인 향안(鄕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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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동양사 /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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