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량(鄭希良)의 「압강춘망(鴨江春望)」은 다음과 같다.
邊城事事動傷神 | 변방에선 일마다 마음이 상하는데, |
海上狂歌異隱倫 | 바닷가의 미친 노래는 은자의 것이 아니라네. |
春不見花猶見雪 | 봄에도 꽃은 보이지 않고 아직도 눈만 보이며, |
地無來雁況來人 | 이곳에는 기러기도 오지 않거니 하물며 올 사람 있으랴? |
輕陰漠漠雨連曉 | 봄 기운이 스산하여 비는 새벽까지 이어지고, |
細草萋萋風滿津 | 가는 풀이 무성한데 바람이 나루에 찼네. |
惆悵芳時長作客 | 슬프다, 좋은 시절에 항상 나그네 되었으니, |
可堪垂淚更添巾 | 흐르는 눈물이 또 수건 적심을 어이하랴? |
이 작품은 의주(義州) 유배지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봄 풍경을 읊조리고 있지만 시인에게 있어서는 봄같지 않다는 것이 주지다. 정희량(鄭希良)의 시가 황진(黃陳)에 근접하고 있는 것으로 일컫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의 시세계는 결코 한 시대의 속상(俗尙)에만 치우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시에 보여준 미련(尾聯)의 기법은 오히려 두보(杜甫)의 풍기(風氣)를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선택한 은둔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반복하여 고백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의 높은 곳이다. 율시(律詩)의 틀을 빌리지 않았다면 이러한 가작(佳作)의 제조는 가능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의 「차계문운(次季文韻)」을 보게 되면, 그 역시 황진(黃陳)을 추수(追隨)하던 당시의 풍상(風尙)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過眼如雲事事新 | 구름처럼 눈을 스치는 일은 일마다 새로운데, |
狂歌獨立路岐塵 | 어지러운 세상에서 미친 노래 부르며 홀로 우노라. |
百年三萬六千日 | 백년 삼만육천일을, |
四海東西南北人 | 사방 동서남북 떠도는 신세라네. |
宋玉怨騷悲落木 | 송옥의 원통한 노래는 낙엽 때문 아니었고, |
謫仙哀賦惜餘春 | 이태백의 슬픈 가락은 남은 봄을 애석해 한 것이라. |
醉鄕倘有閒田地 | 취향에 한가한 땅이 남아 있다면, |
乞與劉伶且卜隣 | 유령에게 이웃하자 청하고 싶구나. |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송시학(宋詩學)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 고려중기 임춘(林春)의 「차우인운(次友人韻)」을 다시 보는 듯하다. 제1구의 ‘과안여운사사신(過眼如雲事事新)’에서와 같이 수사 기교가 직설적이며, 전편에 정감(情感)의 유로(流露)가 과다하여 기호의활(氣豪意豁)한 송시(宋詩)의 장처(長處)를 잘 드러내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뜻이 깊은 골짜기를 지나는 듯한 긴장을 느끼게 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이 밖에도 『지봉유설(芝峯類說)』 동시(東詩) 72 등에서 정희량의 작품이라 단정한 「제원벽(題院壁)」은 많은 시화서(詩話書)에 일화를 남기고 있으나 『국조시산(國朝詩刪)』과 같은 선발책자에는 무명씨작(無名氏作)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정희량의 작품인지 그 여부는 확언하기 어렵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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