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공단보의 맏아들 태백에 대해
8-1.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태백은 지극한 덕의 소유자라고 일컬을 만하다. 세 번이나 천하를 동생에게 양보하였으나, 양보하는 티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를 칭송할 수도 없었다.” 8-1. 子曰: “泰伯, 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 民無得而稱焉.” |
‘태백(泰伯)’은 주나라 창업 전기(前期)의 현인(賢人)이다. 주왕조의 선조들은 은왕조의 치하에서 섬서성 서부의 서방 일제후(一諸侯)로서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때의 군주가(물론 후대에 추존되었겠지만) 주태왕(周太王) 고공단보(古公賣父)이다. 후직(后稷)의 12대손이라 한다. 이 주태왕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이 태백(泰伯), 차남이 중옹(仲雍), 막내가 계력(季歷)이었다. 계력에게 어진 부인 태임(太任)이 있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창(昌)이었는데, 창은 어려서부터 상서로운 길조가 있었고 인물이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고공단보는 손자 창(昌)의 인물됨을 간파하고 그에게 국가의 미래를 맡기기 위해서는, 하는 수 없이 막내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계승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큰 아들, 둘째 아들이 있으니 딱한 일이다. 아버지의 이러한 의중을 파악한 두 아들, 태백과 중옹은 형만(荊蠻)【현재 강소성 소주(蘇州)지역】으로 도망가 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카락을 잘라[文身斷髮], 임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표시함으로써 동생 계력 에게 왕위가 돌아가는 것을 부담없게 하였다. 계력의 아들 창(昌)이 나중에 문왕(文王)이 되었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은을 멸하고 주왕조를 세운 것이다.
태백은 형만으로 도망간 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구오(句吳)라 칭하였고, 형만사람들은 그를 앙모(仰慕)하여 따르는 자가 1천여 호가 되었다. 그들은 그를 오태백(吳太伯)으로 옹립하였다. 태백이 죽은 후에는 동생 중옹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오중옹(吳仲雍)이다. 이들이 오나라의 시조가 된 것이다. 오나라는 공자가 죽은 후 6년 후, 월왕 구천(句踐)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구천은 오왕 부차에게 100호의 민가를 주어 동(東)으로 가서 살게 하려 하였다.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아 스스로 이 지경에 빠진 것을 후회하오”하고 스스로 목에 칼을 꽂았다. 태백과 같은 현자의 현업(賢業)으로 시작된 오나라의 역사도 이렇게 막을 내렸다. 천고풍류(千古風流) 인물들이 그려간 인간세의 파랑(波浪)이 허공에 운무를 그릴 뿐이다.
‘태백(泰伯)’은 주태왕의 장자이다. ‘지덕(至德)’이란 덕이 지극하여 거기에 다시 더할 것이 없음을 일컫는 것이다. ‘삼양(三讓)’이란 꼭 세 번이라는 뜻보다도 굳이 이 사양함을 일컬은 것이다. ‘무득이칭(無得而稱)’은 그 사양함이 은미하여 백성들이 알 수 있는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泰伯, 周大王之長子. 至德, 謂德之至極, 無以復加者也. 三讓, 謂固遜也. 無得而稱, 其遜隱微, 無迹可見也.
대저 태왕(大王)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가 태백(泰伯)이고 차자가 중옹(中雍)이고, 다음의 삼자가 계력(歷)이었다. 태왕의 시기에 이미 상(商)나라의 도가 침쇠(浸衰: 쇠약해짐)해지고, 주나라는 날로 강대해졌다. 때마침 계력이 아들 창(昌)을 낳았는데 그 아들에게 성스러운 덕(德)이 엿보였다. 이에 태왕은 시세에 따라 상나라를 칠 생각이 있었는데 태백이 따르지 아니 하므로, 태왕은 마침내 계력에게 왕위를 전하여 그의 아들 창(昌)에게 미치게 하고자 하였다. 태백은 이러한 아버지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동생 중옹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도망가버린 것이다. 이에 태왕은 계력을 왕으로 세웠고, 나라를 물려주어 창에게 이르도록 하였다. 창은 천하의 3분의 2를 차지하였으니, 이 이가 곧 문왕(文王)이다. 문왕이 붕어(崩御)하고 그의 아들 발(發)이 왕이 되었고 그는 드디어 상나라(殷紂)를 정벌하여 천하를 소유하니, 이 이가 곧 무왕(武王)이다.
蓋大王三子: 長泰伯, 次仲雍, 次季歷. 大王之時, 商道寖衰, 而周日强大. 季歷又生子昌, 有聖德. 大王因有翦商之志, 而泰伯不從, 大王遂欲傳位季歷以及昌. 泰伯知之, 卽與仲雍逃之荊蠻. 於是大王乃立季歷, 傳國至昌, 而三分天下有其二, 是爲文王. 文王崩, 子發立, 遂克商而有天下, 是爲武王.
대저 태백의 덕으로도, 어차피 상ㆍ주의 교체시기였으므로 진실로 제후들의 조회를 받고 천하를 소유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 기회를 버리고 천하를 취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 자취도 남기지 않고 소리없이 물러난 것이다. 그런즉 그 덕의 지극함이 어떠하다 해야 할 것인가? 그 마음은 백이와 숙제가 말고삐를 잡고 간하던 심정과 같으나, 실상 왕의 자리를 물러나는 처사의 어려움은 백이ㆍ숙제보다도 더한 것이 있으니, 부자께서 탄식하고 찬미하신 것은 너무도 당연타 할 것이다. 태백이 태왕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춘추좌전』에 보인다.
夫以泰伯之德, 當商ㆍ周之際, 固足以朝諸侯有天下矣, 乃棄不取而又泯其迹焉, 則其德之至極爲何如哉! 蓋其心卽夷齊扣馬之心, 而事之難處有甚焉者, 宜夫子之歎息而贊美之也. 泰伯不從, 事見『春秋傳』.
개국설화의 한 유형으로 ‘선양설(禪讓說)’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의 온조(溫祚) 설화도 비슷한 유형에 속한다. 묵자학파가 이 선양설을 발달시키면서 요ㆍ순ㆍ우 삼제(三帝)를 높이 받들자, 이에 맞불을 놓으려는 초기 유가집단에서 이 태백설화를 강조한 것이라고 타케우찌 요시오(武內義雄)는 말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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