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늘 걱정투성이인 사람에게
7-3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인품이 틔여 너르고 여유롭고, 소인은 인품이 좁아 늘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 7-36. 子曰: “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 |
정주한간(定州漢簡)본에는 ‘君子靼蕩, 小人長戚’으로 되어있다. 아마도 한간본이 고본의 모습일 것이다. 필사자들이 읽는 재미를 더하기 위해 ‘탕(蕩)’과 ‘척(戚)’ 한 글자씩을 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이미 정현시대 이전에 일어났을 것이다. 돈황문서 정현주도 ‘탕탕(蕩蕩)’ ‘척척(戚戚)’으로 되어 있고, 주석도 본문의 그러한 모습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당나라 때의 『경전석문』은 ‘魯讀坦蕩爲坦湯, 今從古’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정주한간본처럼 두 글자로 중복되지 않는 판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탄(坦)’은 우리가 평소에 ‘평탄(平坦)’이라는 단어로서 잘 쓰는 말이듯이 ‘트인 모습’ 즉 열려있는 개방된 인격을 나타낸다. 영어의 ‘오픈(open)’이 가장 잘 그 뜻을 말해준다. 그에 비하면 ‘장(長)’은 ‘늘상’, 즉 ‘올웨이즈(always)’라는 부사적 용법이라서 정확하게 대구를 이루지 않는다.
그 의미에 관해서는 고주를 보는 것이 좋다.
정현이 말하였다: “‘탄탕탕(坦蕩蕩)’은 여유롭고 넓은 모습이다. ‘장척척(長戚戚)’은 근심과 두려움이 많은 모습이다.”
鄭玄曰, ‘坦蕩蕩, 寬廣貌也; 長戚戚, 多憂懼貌也.’
진사이의 『고의』에는 다음과 같이 해설되어 있다.
군자는 늘상 자신을 검속하고 산다. 그래서 그 마음이 오히려 여유롭고 넓을 수 있는 것이다. 소인은 스스로 방종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항상 근심 걱정 투성이가 되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 이러한 반면의 진리를 배우는 자들은 조심스럽게 주목하고 자성해야 한다.
君子每要檢束, 故其心反寬廣. 小人自好放縱, 故不免長戚戚. 是學者之所當自省也.
진사이의 해설은 매우 사려 깊은 주석이다. 인간은 항상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산다. 공포(Fear)는 구체적 대상을 가지고 있지만 걱정(Anxiety)은 구체적 대상이 없는 것이 그 특징이다. 걱정이란 존재의 병이다. 그러나 이 막연한 걱정이 지나치면 인간의 행태는 매우 편협해지고 불필요한 고집이 많아지고 집착이 강 한 유형의 인간으로 발전한다. 이런 유형의 인간들이 대개 종교에 매달리거나, 범죄에 빠지거나, 스트레스 환자가 되어 가정을 파탄시키거나 한다. 결국 불교가 추구하는 해탈(Enlightenment)이라는 것도 이 일상적 삶의 의식의 저변으로부터 ‘막연한 걱정’이라는 구름이 활짝 걷혀버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대단한 고승이라 할지라도 이 이상의 해탈을 운운하기가 어렵다. 걱정으로부터의 해방은 존재의 병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 해방을 공자는 ‘탄탕탕(坦蕩蕩)’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탄(坦)’은 평탄한 것이다. ‘탕탕(蕩蕩)’은 너그럽고 넓은 모양이다. 정이천이 말하였다: “군자는 리(理)를 따르기 때문에 항상 몸과 마음이 펴지며 태연하고, 소인은 욕심날 사물들에 의하여 부림을 당하기 때문에 항상 근심과 걱정이 많은 것이다.”
坦, 平也. 蕩蕩, 寬廣貌. 程子曰: “君子循理, 故常舒泰; 小人役於物, 故多憂戚.”
○ 정명도가 말하였다: “‘군자탄탕탕(君子坦蕩蕩)’이란 마음이 넓고 몸이 너그러운 것이다.”
○ 程子曰: “君子坦蕩蕩, 心廣體胖.”
여기 정명도의 말에서도 ‘몸과 마음’이 대비적으로 쓰이고 있고, 송유 들의 언어습관에 몸(Body)과 마음(Mind)의 대비적 어휘들은 자주 나타난다. 이러한 심신의 대비적 언사는 불교를 통하여 들어온 것으로 선진고경에서는 별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를 통하여 인도유러피안어군의 사유 체계가 들어왔고 이미 송나라 때에는 서양문명과의 교류가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을 뛰어넘는다. 그러니까 동ㆍ서문명교류의 문제를 19세기ㆍ20세기 문제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신라고분에서 출토되는 지극히 정교한 페르시아유물들을 볼 때 조선문명도 이미 삼국시대, 아니 그 훨씬 이전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외래문명의 도전을 받으며 성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상적인 문제도 원효(元曉)를 분석하든, 지눌(知訥)을 해석하든, 퇴계(退溪)를 논구하든, 다산을 궁구하든 모두 동서를 통합하는 보편적 해석의 지평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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