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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한글역주, 술이 제칠 - 37. 공자란 사람에 대해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술이 제칠 - 37. 공자란 사람에 대해

건방진방랑자 2021. 6. 26.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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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공자란 사람에 대해

 

 

7-37. 공자께서는 따사로우시면서도 엄격하셨고, 위엄이 있으시면서도 사납지 않으셨고, 공손하시면서도 자연스러우셨다.
7-37. 子溫而厲, 威而不猛, 恭而安.

 

유학이든 도가의 학문이든 선진고경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의 학문의 핵심은 결국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라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는 데 있다. 남을 위한 배움이 아니요, 나를 위한 배움이라는 것이다. 초월적 존재를 신앙하며 주체를 버리는 상향(上向)의 배움이 아니라, 끊임없이 나의 내면에 덕을 온축시 켜 내면적 초월을 이룩하는 주체적 향상(向上)의 배움이다. 이러한 나의 내면적 덕()의 상달이 지향하는 것은 어떤 초월적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적 큰 인격을 형성하고자 함에 있다. ‘큰 인격이란 항상 피상적으로는 대립적으로 보이는 가치들의 병존을 특징으로 삼는다. 인간이 넓게 공부한다고 깊 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넓게 공부할수록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요, 깊어질수록 넓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심하다고 대범할 수 없는가? 참으로 세심 한 자는 참으로 대범해야 하고, 참으로 대범한 자는 참으로 세심해야 한다. 이 지적 사유에 밝다고 차갑기만 하고 예술적이지 않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지적이면 반드시 예술적이어야 하고, 예술적이면 반드시 이지적이어야 한다. 인간의 목표설정을 처음부터 이러한 양면의 포용으로 삼으면 반드시 이렇게 큰 인격이 길러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서구현대교육의 병폐는 인간을 일곡화(一曲化)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문성의 교육만을 지향하여 효율만을 따지고 인격의 거대함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한 인간으로 태어나 유가ㆍ도가 철학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모든 대립적 가치의 양면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공자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양면적 가치의 자연스러운 병존, 아니 융합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는 엄숙한 것이다. 사람의 덕성이 본래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이 온전 한 것인데, 타고난 기질이 품부받은 바는 치우치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 오직 성인만이 전체가 혼연(渾然)하고 음양이 덕()에 합()한다. 그러므로 중화(中和)의 기상이 용모지간(容貌之間)에 나타나는 것이 이와 같다. 공자의 문인들이 공자의 분위기를 잘 살펴서 자세히 기록하여 놓았으니, 기록자들의 마음 씀새의 치밀함을 또한 엿볼 수 있다. 그 지혜가 성인을 충분히 알고, 성인의 덕행을 잘 표현해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르지 아니 하였다면 이와 같이 기록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정자(정이천)는 이것이 증자의 말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반복하여 완심(玩心)해 볼만한 명구라 할 것이다.

, 嚴肅也. 人之德性本無不備, 而氣質所賦, 鮮有不偏, 惟聖人全體渾然, 陰陽合德, 故其中和之氣見於容貌之間者如此. 門人熟察而詳記之, 亦可見其用心之密矣. 抑非知足以知聖人而善言德行者不能也. 故程子以爲曾子之言. 學者所宜反復而玩心也.

 

 

연성공(衍聖公) 콩 떠츠엉(孔德成, 1920,2,23~2008,10,28) 선생은 공자의 77대 적손(嫡孫)으로서 공자의 풍도를 느낄 수 있게 하는 호방한 인품의 거목이다. 일찌기 자유로운 사상을 받아들여 공부(孔府)에 안주하지 않고 예일대학에 유학하는 등 신학문을 연마하였고 대만대학(臺灣大學) 중문과(中文) 교수로서 삼례(三禮), 금문(金文), 상주청동이기(商周靑銅彛器) 연구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금문과 삼례의 전문가였다. 나는 대만대학 유학시에 선생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다. 술도 잘 드시고, 손수 대만대학 학생들을 데리고 사혼례(士昏禮)를 재현하여 다큐영화를 찍기도 하셨다. 이 분이 198012월 안동 도산서원에 오셔서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글씨를 남기셨다. 도산서원의 풍모야말로 곡부지역 추로의 모습이 옹고로시 남아있는 곳이라는 찬사이다. 이 비석은 현재 도산서원 입구에 서있는데 많은 사람이 무심코 지나치는 것이 안타깝다. 공자의 77대 종손이 직접 추로지향을 말씀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안동 하면 전통을 고수키만 하는 유생들의 본향이라는 고루한 인상을 가질 수도 있지만 일제침략을 당했을 때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덕성을 유감 없이 발휘한 고장이 안동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국권상실에 항거하여 목숨을 끊은[自靖致命] 선비가 10명이나 되었고(전국 60여 명 중), 신학문ㆍ신교육의 요람이기도 하였으며(협동학교), 사회주의적 각성, 독립운동의 대맥이 모두 이 지역에 연원을 두고 있다. 안동은 독립운동의 산실이며 이들의 정의감이 대부분 모두 퇴계학맥에서 유래된 것이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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