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황홀한 관저의 노랫가락
8-15.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노나라의 위대한 음악가인 악사(樂師) 지(摯之)의 창으로 시작되는 그 「관저(關雎)」의 종장 마지막 순간까지, 그 장엄한 관현악 연주가 아직도 내 귀에 양양(洋洋)하게 넘실거리고 있다!” 8-15. 子曰: “師摯之始, 關雎之亂, 洋洋乎! 盈耳哉.” |
‘사지(師摯)’는 노나라의 악장으로서 위대한 음악가였고 공자가 음악의 세계에 있어서 극히 존중한 인물이었으며 공자는 그에게서 금(琴)을 배웠다. 사양자(師襄子)라는 이름으로도 등장하는 그 인물은 음악에 있어서는 공자의 선생이었다. 주도(周道)가 쇠미(衰微)해지면서 정나라. 위나라 음악들이 일어나고 주나라 정통의 정악이 없어지고 실절(失節: 박자가 개판이 되어버렸다)되었는데 이를 노나라 태사인 지(摯)가 바로잡았다고 고주는 말하고 있다.
여기 ‘지시(之始, …의 시작)’와 ‘지란(之亂, …의 끝)’은 이 악곡의 처음과 시작을 가리킨다. 처음에는 악장인 지의 독창으로 시작되다가 기악이 부분적으로 개입 되다가 나중에 장엄한 관현악이 연주된다. 청나라 유단림(劉端臨)의 설을 참조하였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한때 판소리나 가야금산조가 박해와 무시 속에서 성 음, 길, 장단이 모두 어지럽게 되어 제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내가 한때 소리북 의 명인 일산(一山) 김명환(金命煥)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선생은 해방 후 한때 가야금의 명인 함동정월과 동거하면서 가야금의 가락과 장단을 찾아냈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다. 함금옥은 하도 고생을 해서 정신이 오락가락 했다. 그녀의 가야금과 자신의 북을 같이 놓고 앉아서, 옛 생각을 더듬으며 서로 연주해보면서 최옥산류의 원형을 복원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북의 세계도 원숙한 경지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 두 사람이 앉아서 진양에서 휘모리로 발전하는 그 그윽한 천년고풍의 선율의 세계를 그려내는 장면을 나는 김명환 선생의 구술을 통해 접했다.
그리고 일산선생은 곧잘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곤 했다: “김선상, 난 말이유, 한밤중에 호젓하게 앉아있을 땐 귀가 건지러워 못 살아유. 내 귀는 레코드라우. 송만갑소리가 듣고 싶다 하면 저 하늘에서 송만갑소리가 옛날 그 모습 그대로 내려와유. 임방울소리가 듣고 싶다 하면 임방울소리가, 정응민소리가 듣고 싶다 하면 정응민소리가, 장판개소리가 듣고 싶다 하면 장판개소리가, 이동백소리가 듣고 싶다 하면 이동백소리가, 아니 그렇게 굽이굽이 대목대목 명료하게 분간되어 들릴 수가 없지라우, 난 불행 안하요? 이런 소리가 들리닝께. 요즘 소 린 도시 들을 수가 없을지라.” 일산선생은 달밤에 나와 단둘이 앉아있을 땐 지긋이 눈을 감고 북을 두드렸다. 아마도 공자가 여기서 ‘양양호영이재(洋洋乎盈耳哉)!’라고 표현한 것은 일산선생께서 ‘귀가 건지러워 못 살겠다’하신 말씀 그 이상의 적합한 해석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전남 곡성(谷城)에 일산 선생의 일대기를 쓴 비(碑)를 남기었다.
‘摯’는 지라고 발음한다. ‘雎’는 칠여(七余)이다. ○ ‘사지(師摯)’는 노나라의 악사인데 이름이 지(摯)이다. ‘란(亂)’은 한 기악곡의 졸장(卒章: 마지막 악장)이다.
摯, 音至. 雎, 七余反. ○ 師摯, 魯樂師名摯也. 亂, 樂之卒章也.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관저(關雎)」의 종장이야말로 국풍의 시작이다’라고 말한 그 용법과 상통한다【「관저」에서 그 종장이 막 어지러운 듯 절정에 달하는데 그 종장이야말로 국풍노래들의 대표성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양양(洋洋)’은 아름다운 모습이 대해의 풍성함과도 같다는 표현이다. 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왔을 때 음악을 바로잡았다. 그때가 마침 악사 지(摯)가 막 악관으로 임명되었던 초기였다. 그러므로 그 음악의 아름답고 성대한 모습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史記』曰: “關雎之亂以爲風始.” 洋洋, 美盛意. 孔子自衛反魯而正樂, 適師摯在官之初, 故樂之美盛如此.
주희의 설명은 공자와 사지가 앉아서 정악의 모습을 같이 복원시켰기 때문에, 그 프레쉬한 맛이 특별했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마치 김명환과 함동정월이 같이 앉아 김창조-최옥산 가야금의 원류를 되찾아 놓은 첫 발표회를 듣는 것과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까 귀로(歸魯) 후 공자 말년의 사건이었다.
▲ 『장자(莊子)』 「어부(漁父)」 1편에 보면 공자가 살구나무가 있는 높고 평탄한 곳에서 제자들과 노니는 장면이 있다. 제자들은 책을 읽고 공자는 노래를 하며 거문고를 탄다[孔子游乎緇帷之林, 休坐乎杏壇之上. 弟子讀書, 孔子弦歌鼓琴]. 곡부 행단(杏壇)의 이름은 이 구절에서 유래되었다. 이 행단비의 글씨는 공자를 사모하여 곡부에 아홉 번이나 온 청나라 건륭제의 휘호이다. 뒷면에 그가 직접 쓴 시가 있는데 ‘文明終古共春熙’라는 구절로 끝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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