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인재 얻기의 어려움
8-20. 순(舜)임금이 어진 신하 다섯을 두시니,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일찍이 말하였다: “나는 세상을 다스리는 훌륭한 신하 열을 두었다.” 8-20. 舜有臣五人而天下治. 武王曰: “予有亂臣十人.” 이를 평하여 공자가 말씀하시었다: “인재를 얻기 어렵다 한 옛말이 정말 맞는 말 아니겠는가? 당(요임금 시대)ㆍ우(순임금 시대) 이래 주초(周初)에 이르러 그토록 문화가 성대했는데도, 열 사람 중에 부인이 들어 있으니 인재는 아홉밖에 되지 않는다. 주나라의 토대를 닦은 문왕은 천하를 이미 삼분하여 그 둘을 소유했는데도 복종하여 은(殷)나라의 주임금을 섬기었다. 주나라의 덕이야말로 지극한 덕이라 일컬을 만하다.” 孔子曰: “才難, 不其然乎? 唐ㆍ虞之際, 於斯爲盛. 有婦人焉, 九人而已. 三分天下有其二, 以服事殷. 周之德, 其可謂至德也已矣.” |
전체 구도는 삼대의 첫 왕조인 하나라가 성립하기도 이전의 고대의 성왕인 순임금과, 주나라를 시작한 무왕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해놓고 그 전체 맥락에 대한 공자의 평론을 소개한다. 그리고 결국 주나라의 포용적인 덕이 위대하다는 것을 입증하면서 끝난다.
‘재난(才難)’이란 인재를 얻기 어렵다는 뜻으로 공자 이전부터 있었던 속담인 모양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당우지제(唐虞之際)’의 해석인데, ‘지제(之際)’를 ‘이하(以下)’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유보남의 설을 따랐다. 나의 번역을 잘 들여다보면 내가 해석한 맥락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체제 지향적인 냄새가 강하며 별 감동이 없는 공자의 말이다. 물론 전국시대에 이르러 공자의 말로써 날조된 것이며, 그 날조의 주체인 증자학파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차피 주나라는 역성혁명으로 성립한 것이다. 그런데 그 역성혁명의 주체인 그 무왕의 덕을 찬양치 아니 하고, 뒤엎을 수도 있었는데 폭군 일지라도 참고 섬긴 문왕이 있기에 주나라의 덕이 지극하다는 논리는 눈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치(治)’는 거성이다. ○ ‘오인(五人)’은 우(禹: 치수담당 장관)ㆍ직(稷: 농림부 장관)ㆍ설(契: 내무부 장관)ㆍ고요(皐陶: 법무부 장관)ㆍ백익(伯益: 수렵담당 장관)이다.
治, 去聲. ○ 五人, 禹ㆍ稷ㆍ契,ㆍ皐陶ㆍ伯益.
이것은 『서경』 「태서」에 있는 말이다. 마융(馬融)이 『집해(集解)』에서 말하였다: “‘란(亂)’이란 ‘치(治)’와 같다. 열 사람은 주공단(周公旦)ㆍ소공석(召公奭)ㆍ태공망(太公望)ㆍ필공(畢公)ㆍ영공(榮公)ㆍ태전(太顚)ㆍ굉요(閎天)ㆍ산의생(散宜生)ㆍ남궁괄(南宮适)이고, 또 하나는 문왕의 부인 문모(文母)를 일컫는다.”【沃案. 정확하게 일치하는 방식으로 인용치는 않았다】.
書『泰誓』之辭. 馬氏曰: “亂, 治也.” 十人, 謂周公旦ㆍ召公奭ㆍ太公望ㆍ畢公ㆍ榮公ㆍ太顚ㆍ閎夭ㆍ散宜生ㆍ南宮适, 其一人謂文母.
유시독(劉侍讀)이 말하였다: “자식으로서 어미를 신하로 삼는 의리가 없으니, 여자 신하는 무왕의 부인 읍강(邑姜)일 것이다. 아홉 신하는 밖을 다스리고 읍강은 안을 다스렸다.”
劉侍讀以爲子無臣母之義, 蓋邑姜也. 九人治外, 邑姜治內.
혹자가 말하였다: “‘란(亂)’은 본래 ‘치(乿)’라고 쓰는데, 그것이 옛날의 ‘치(治)’ 글자였다.”【이렇게 반대되는 뜻이 겹쳐있는 것을 반훈(反訓)이라고 한다】.
或曰: “亂本作乿, 古治字也.”
유시독(劉侍讀)은 북송의 유창(劉敞, 1019~1063)을 가리킨다. 자가 원부(原父), 사람들이 그를 공시선생(公是先生)이라고 칭하였다. 그는 강서성 임강(臨江) 신유(新喩) 사람이다. 경력(慶曆) 연간에 진사가 되어 벼슬길에 올랐는데 치적이 훌륭했다. 구양수(歐陽修)의 문인이며 그 학문의 폭이 심히 넓었다. 불로(佛老)로 시작하여 복서(卜筮)ㆍ천문(天文)ㆍ의약(醫藥)ㆍ산경(山經)ㆍ지지(地志)에 정통하였고, 조정에서 예악의 문제가 생기면 그의 집을 방문하여 해결하였다고 한다. 육경(六經)을 중시하였고 『춘추』에 장(長)하였다. 그가 지은 『칠경소전(七經小傳)』은 북송유학의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기존의 해석을 묵수(墨守)하지 않고 경의 글자들을 의심하여 개자(改字)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는 왕안석(王安石)으로부터 시작된 경학의 신의(新義)를 꾀하는 신학문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송나라유학사에 빼놓을 수 없는 거목이다.
여기 ‘혹자[或]’가 누구인지는 상고할 수가 없다. 후키노 야스시(吹野安)와 이 시모토 미찌아키(石本道明)의 『공자전서(孔子全書)』에 여기 ‘혹자’가 ‘책호(翟灝)’라고 명기해놓고 있으나, 『사서고이(四書考異)』의 저자인 호는 청나라 때의 고증학자이니 주자집주에 등장할 수는 없다【자가 대천(大川), 청강(晴江). 호가 서소(書巢), 건륭의 진사. 관(官)은 금화교수(金華敎授), 경사(經史) 및 백가지학(百家之學)에 통달】. 송나라 때 사람으로 동명이인의 책호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자료의 범 위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여기서 ‘자(子)’라고 칭하지 않고 ‘공자(孔子)’라고 칭한 것은 바로 위에 무왕(武王)이 걸려 있어서 군신의 사이가 되니, 기록자들이 삼가하여 낮춘 것이다. ‘재난(才難)’이라고 한 것은 대저 공자 이전의 고어(古語)일 것이며, 공자가 그 내용을 그렇다고 시인한 것이다. ‘재(際)’라는 것은 덕(德)의 쓰임[用]이다. ‘당우(唐虞)’는 요임금과 순임금이 천하를 소유했을 시대를 일컫는 호칭이다. ‘제(際)’는 교체의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 대강의 뜻은 주나라 왕실에 인재가 많아 오직 당우지제(唐虞之際) 시기만 주나라보다 성하였고, 그 후로 하나라ㆍ상나라 시기에는 모두 미치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겨우 여기 열거된 몇 사람만 있으니, 이는 인재를 얻기가 실로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稱孔子者, 上係武王君臣之際, 記者謹之. 才難, 蓋古語, 而孔子然之也. 才者, 德之用也. 唐虞, 堯舜有天下之號. 際, 交會之間. 言周室人才之多, 惟唐虞之際, 乃盛於此. 降自夏商, 皆不能及, 然猶但有此數人爾, 是才之難得也.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 4년조에 말하기를, ‘문왕(文王)이 상나라를 배반한 나라들을 거느리고 주왕(紂王)을 섬겼다’라고 했다. 천하에서 문왕에게 귀속한 주(州)가 여섯이니, 형주(荊州)ㆍ양주(梁州)ㆍ옹주(雍州)ㆍ예주(豫州)ㆍ서주(徐州)ㆍ양주(揚州)였다. 오직 청주(靑州)ㆍ연주(兗州)ㆍ기주(冀州)만 아직도 주에 속해 있었다.
『春秋傳』曰: “文王率商之畔國以事紂”, 蓋天下歸文王者六州, 荊ㆍ梁ㆍ雍ㆍ豫ㆍ徐ㆍ揚也. 惟靑ㆍ兗ㆍ冀, 尙屬紂耳.
범순부가 말하였다: “문왕의 덕은 족히 상(商)나라를 대치할 만하였다. 하늘이 기회를 주었고, 사람이 귀순하는데도 은나라를 취(取)하지 아니 하고 복종하고 섬겼으니, 이 때문에 지극한 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 무왕의 말을 빌미삼아 문왕의 덕에까지 언급하시었고, 또한 태백(泰伯, 본 편 제1장)과 더불어 모두 같이 지덕(至德)으로서 칭송하셨으니 그 뜻이 은미하다.”
范氏曰: “文王之德, 足以代商. 天與之, 人歸之, 乃不取而服事焉, 所以爲至德也. 孔子因武王之言而及文王之德, 且與泰伯, 皆以至德稱之, 其指微矣.”
혹자는 말하였다: “‘삼분(三分)’ 이하를 끊어내어, 그 앞에 다시 ‘공자왈(孔子曰)’을 붙여 또 하나의 장으로 만들어야 마땅하다.”
或曰: “宜斷三分以下, 別以孔子曰起之, 而自爲一章.”
여기의 ‘혹자’도 앞서 말한 ‘혹자’와 동일인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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