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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자한 제구 - 4. 공자에게 없었던 네 가지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자한 제구 - 4. 공자에게 없었던 네 가지

건방진방랑자 2021. 6. 26.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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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공자에게 없었던 네 가지

 

 

9-4. 공자께서는 평소 삶에 네 가지의 태도가 전혀 없으셨다. 주관적 억측이 없으셨다. 무리하게 관철시키려는 자세가 없으셨다. 변통을 모르는 고집이 없으셨다. []라는 집착이 없으셨다.
9-4. 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

 

이 파편은 곽점죽간 중 어총삼에 나타나고 있다. 거기에는 母意, 毋固, 毋我, 毋必로 되어있어 순서의 변화가 있다. 어총에는 공자의 말이라는 것이 지시되어 있지 않다. 당시 이러한 이야기들이 격언으로서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 죽간 중 이러한 문구의 존재가 곧 논어의 성립연대를 입증하는 준거로 사용되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성급한 중국학자들의 논의를 세밀히 객관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가 모두 불교에서 말하는 집착(abhiniveśa)’의 개념과 대차가 없다. 그리고 이 네 가지는 모두 무아(毋我) 하나로 집약될 수 있다. 무아는 결국 무아(無我, anātman)이다. 그러니까 불교와 유교 를 대립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공자의 생각 속에도 이미 싯달타의 생각이 들어있다는 것을 서슴치 말고 이야기해야 한다. 단지 싯달타에게는 인식론적 반성이 심화되어 있고, ‘무아라는 하나의 문제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인도의 불학이 중국에 들어와 대승불학의 찬란한 꽃을 피운 데는 도가사상의 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가사상의 격의도 있는 것이다.

 

 

()’은 완벽하게 없다는 것이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로 되어 있으니, 사기의 표기법이 옳다. ‘()’는 사사로운 의도나 견해(私意)이다. ‘()’은 기필코 무엇을 관철시키려는 것[期必]이다. ‘()’는 고집하여 응체되는 것[執滯]이다. ‘()’는 사사로운 자기를 고집하는 것[私己]이다. 이 네 가지는 서로 시작과 끝이 되며 맞물려있다. 사사로운 뜻에서 생각을 일으키면 그것을 반드시 무리하게라도 관철시키려 하고 그리고 변통 없는 고집에 머무르게 되며 그렇게 해서 나라는 아집을 형성하게 된다. 대저 의()와 필()은 항상 사전에 내 마음속에 있게 되고, ()와 아()는 항상 사후에 내 마음에 형성된다. 그러다가 그 아()가 다시 의()를 내기 시작하면 물욕에 이끌리어 이러한 고리 가 끝을 모르고 무궁하게 순환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 無之盡者. , 史記是也. , 私意也. , 期必也. , 執滯也. , 私己也. 四者相爲終始, 起於意, 遂於必, 留於固, 而成於我也. 蓋意必常在事前, 固我常在事後, 至於我又生意, 則物欲牽引, 循環不窮矣.

 

정이천이 말하였다: “여기 ()’라는 글자는 결코 금지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성인의 마음에는 근원적으로 이 네 가지가 존재하지 않으니 뭘 금지하는 말이 개입될 여지가 있겠는가?”

程子曰: “此毋字, 非禁止之辭. 聖人絶此四者, 何用禁止.”

 

장횡거가 말하였다: “상기의 네 가지 중에 하나라도 내 마음에 있으면 그것은 천지의 마음과 같지 못한 것이다.”

張子曰: “四者有一焉, 則與天地不相似.”

 

양중립이 말하였다: “지혜가 족히 성인을 알 만하고, 성인을 자세히 관찰하여 묵식(默識)할 만한 자가 아니라면 도저히 이와 같은 성인의 삶의 자세를 기록할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楊氏曰: “非知足以知聖人, 詳視而黙識之, 不足以記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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