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공자, 광땅에서 위협을 당하다
9-5. 공자는 광(匡) 땅에서 포위되어 그 일행은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곤경에 빠져있었다. 공자께서는 그 난 중에서도 이와 같이 말씀하시었다: “문왕(文王)께서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지만 그 문(文)이 여기 나에게 있지 아니 한가? 하늘 이 이 문을 버리시려 한다면 그대들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그대들은 내 몸에 있는 이 문(文)을 더불어하지 못하리라! 만약 하늘이 이 문(文)을 정녕코 버리지 않으신다면 광(匡) 사람인들 감히 나를 어쩌랴!” 9-5. 子畏於匡. 曰: “文王旣沒, 文不在茲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
정확한 사건의 내막은 구성이 어렵다. 광(匡) 땅만 해도 위나라 변방의 읍(邑)이라는 설, 정(鄭)나라의 읍, 송(宋)나라의 읍, 제설(諸說)이 분분하다. 치엔 무(錢穆)는 한(漢)의 장원현(長垣縣), 당(唐)의 광성현(匡城縣)의 땅이라고 비정한다. 유보남은 하남성 부구현(扶溝縣) 부근이라고 한다.
시기도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의하면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거로(去魯)] 거(莒)로 위나라로 망명했을 즈음의 유랑 초기의 사건으로 본다. 열 달을 위나라에서 머문 후 그곳을 떠나 진(陳)나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났다고 한다. BC 497년경의 사건일 것이다. 공자가 이곳을 지나기 이전에, 이미 광 땅을 양호(陽虎)가 침략하여 이 지역 사람들을 괴롭힌 적이 있었다. 이 지역사람들이 공자를 양호로 오인하여 포위한 것이다. 공자가 패자인 진(晋)나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한 위(衛)나라의 모략 이 배경에 깔려있는 사건이라는 설도 있고(카이즈카), 공자의 평생 라이벌이었던 양호가 실제로 이 사건의 배경에 있었으며, 공자가 오인 받도록 그가 꾸민 사건이라고도 한다(시라카와). 하여튼 역사적 정황에 대한 사실적 재구성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광(匡)에서 포위되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었다는 그 사실만은 공자의 삶의 한 리얼리티로서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로기온 파편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4복음서 기자들의 내러티브 구성방식과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공자가 독백 중에서 ‘문왕(文王)’에 연이어 ‘문(文)’을 말했다는 것은, ‘문왕’이라는 이름이 시호로서 추증된 이름이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왕에게 주나라 문화의 담지자로서 그 모든 상징성을 부여했기 때문에 문왕(文王)에게 부여된 그 문(文)은 문왕으로부터 시작하여 무왕을 거쳐 주공에 이르러 완성된 주나라 예악 문물제도의 총화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 문이 600년이라는 세월을 걸쳐 오늘 나 여기 공자에게 담지(擔持)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문(文)을, 그러니까 공자의 몸에 구현되어 있는 주나라 600년의 정통문화를, 공자는 ‘이 문’ 즉 사문(斯文)이라고 반복해서 부르고 있다. 사문이 내 몸에 구현되어 있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인 동시에 공자의 확고한 신념체계이다. 그 객관적 사실은 우리 인간 어느 누구도 보장할 길은 없다. 그러나 공자는 인간에게서 그 보장을 받으려고 생각지 않는다. 그것은 하늘이 보장한다는 것이다. 공자의 이러한 신념은 자신을 로고스의 화신으로서 인식하는 요한복음서 속의 예수와도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공자의 신념은 어둠의 세계 속에서 다시 빛의 세계로 돌아가는 귀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어둠의 세계를 보장하는 사문의 역사성이다. 다시 말해서 사문의 역사성 그 자체가 하느님이요 하늘이다. 사문은 반드시 폭력을 이긴다. 폭력은 영원히 이 사문을 괴멸시킬 수 없다. 이 파괴될 수 없는 사문은 내 몸에만 구현되어 있다. 사문이 살아있는 한 나는 산다! ‘하늘이 이 사문을 없애버린다’는 표현은 궁극적으로 하늘과 사문의 소외적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사실 사문이 곧 하늘이며, 그 하늘이 곧 사문이며, 사문이 곧 나이다. 내가 곧 하늘이다. 하늘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나는 있다!
어떠한 논리로도 파괴될 수 없는 공자의 신념이며 행동양식인 것이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에 관한 가장 근원적인 관심(Ultimate Concern)이며 가장 근원적인 프라이드(Ultimate Pride)이다. 그러한 특권을 향유할 수 있는 근거가 사문(斯文)이다. 이러한 공자의 사문의식 때문에, 동방의 사인(士人)들은 죽음 앞에 초연하게 자신을 던지면서도 사문(斯文)만은 영원하다고 믿었다. 그것은 실제로 어떠한 종교적 신념보다도 더 강렬한 것이었다.
‘후사자(後死者)’를 문왕에 대한 후사(後死)자로서의 공자 자신을 의미한다는 주석도 있고(고주 공안국), 앞으로 죽을 사람들, 즉 공자 이후의 미래세대를 의미한다는 주석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구체적 상황에서 공자가 주변의 제자들을 향해 외치는 절규로 해석했다. 너희들이 이 난을 피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후사자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가치있는 삶이 될 수가 없다. 사문에 대한 공동 운명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사문에 대한 신념을 환기시키면서 이 환난을 같이 타개해나갈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외(畏)’라는 것은 곤경에 빠져 경계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일컫는다. ‘광(匡)’은 지명이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의하면, 양호(陽虎)가 이미 광땅에서 폭력을 휘둘러 난리를 쳤고, 부자의 모습【沃案, 둘 다 비슷한 거구였다】이 양호와 비슷했기 때문에 광인이 공자집단을 포위한 것이라 한다.
畏者, 有戒心之謂. 匡, 地名. 『史記』云: “陽虎曾暴於匡, 夫子貌似陽虎, 故匡人圍之.”
도(道)가 문명세상에 드러난 것을 문(文)이라고 하니, 대저 예ㆍ악ㆍ제도가 이에 속하는 것이다. 공자께서 도(道)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문(文)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일종의 겸사(謙辭)라 할 수 있다. ‘자(茲)’는 여기의 뜻인데, 공자 자신을 일러 가리킨 것이다.
道之顯者謂之文, 蓋禮樂制度之謂. 不曰道而曰文, 亦謙辭也. 茲, 此也, 孔子自謂.
○ 마융이 말하였다: “문왕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공자가 자신을 일컬어 ‘후사자(後死者)’(그보다 후에 죽는 자)라고 한 것이다. 이 문장이 뜻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하늘이 만약 이 문(文)을 버릴려고 하셨다면 반드시 나 후사자로 하여 금이 문(文)에 참여치 못하게 하셨을 것이나, 지금 내가 이미 이 문(文)을 얻어 가지고 있으니, 이 자체가 이미 하늘이 이 문(文)을 버리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하늘이 이미 이 문(文)을 버리려고 하지 않으시니, 광인(匡人)들 제깟놈들이 감히 나를 어찌할 것인가? 이는 반드시 하느님의 의지를 거슬러[違天]나 공자를 해칠 수 없다고 확언하신 것이다.”
○ 馬氏曰: “文王旣沒, 故孔子自謂後死者. 言天若欲喪此文, 則必不使我得與於此文; 今我旣得與於此文, 則是天未欲喪此文也. 天旣未欲喪此文, 則匡人其柰我何? 言必不能違天害己也.”
여기 ‘마씨왈(馬氏曰)’하고 인용하고 있는 내용은 하안(何晏)의 『집해(集解)』의 내용인데 인용하는 방식이 매우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공자자위후사자(孔子自謂後死者)’ 운운한 것은 마융의 설이 아니라 공안국(孔安國)의 설이다. 공안국과 마융을 하나로 짬뽕시켜 놓고 ‘마씨왈’로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문장도 그 의미는 통하지만 주자식으로 바꾸어서 인용하였다. 기실 주희의 재구성이 더 읽기에 편하고 정확한 측면이 있으나 원문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옛사람들은(송대사람들만 해도) 인용할 때, 결코 타인의 말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전사(轉寫)하는 것을 제1의로 삼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재미있는 사례이기에 언급해둔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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