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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자한 제구 - 6. 등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재주를 익혀야 했던 공자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자한 제구 - 6. 등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재주를 익혀야 했던 공자

건방진방랑자 2021. 6. 2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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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등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재주를 익혀야 했던 공자

 

 

9-6. 오나라의 태재(大宰: 수상)가 자공에게 물어 이르기를 부자께서는 진실로 성인이시군요. 그토록 재능이 다방면에 넘치시니!”하였다.
9-6. 大宰問於子貢曰: “夫子聖者與? 何其多能也?”
 
그러자 자공이 대답하였다: “그럼요. 진실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 우리 공자님을 성인으로 만들려 하시니, 또한 그토록 많은 재능을 주셨구료.”
子貢曰: “固天縱之將聖, 又多能也.”
 
공자께서 후에 이 말을 들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태재, 그 사람이 나를 아는구나! 나는 어렸을 때 천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비속한 잔일에 재주가 많을 뿐이로다. 군자가 재주가 많아야할까? 그러하지 아니 하니라.”
子聞之, : “大宰知我乎! 吾少也賤, 故多能鄙事. 君子多乎哉? 不多也.”
 
제자뢰가 말하였다: “나는 선생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나의 포부를 시험해볼 수 있는 자리에 있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잔재주가 많다.’”
牢曰: “子云, ‘吾不試, 故藝.’”

 

논어를 읽으면서 내가 인간적으로 가장 충격을 받았던 구절, 그리고 성인(聖人)에 대한 나의 상투적 관념을 혁명시킨 한 구절이 바로 여기에 나오는 오소야천(吾少也賤)’이라는 공자의 진솔한 삶의 고백이다.

 

나는 충남 천안에서 컸다. 나의 부친이 일제강점기에 세의전을 나왔고 쿄오토제대(京都帝大) 의학부에서 공부한 사람으로 천안에서 병원을 개업했기 때문에 매우 유족한 환경에서 자라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제삼국민학교일제강점기부터 제일, 제이, 제삼소학교 세 개가 있었다를 다녔는데 학교 반 급우 중에서 화릿 뻘 넘어 고아원에서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성격이 고약한 아이도 있었으나 유모군(기억이 가물가물)은 아주 착했는데 재주가 특별히 많았다. 눈이 똥그랗고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고아원 아이인데도 성격이 유순했다. 큰 못대가리를 철물점에서 훔쳐다가 철도길에 놓고 철뚝가 제방에 납작 엎드려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튕겨나가 충분히 납작해지지 않은 놈은 그 짓을 반복하여 꼭 납작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놈을 숫돌에 갈아 칼을 만드는데, 아무도 제대로 된 칼을 못 만들었다. 그러나 유군만은 반드시 훌륭한 칼을 만들어왔다. 그것도 한 끝을 나무에 박아 쓰기 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연필을 아주 곱게 깎아놓았다. 지금도 내가 연필을 가지런히 예쁘게 잘 깎는 편인데 그 당시 유군 흉내내며 배운 것이다. 유군은 반우들의 나무도장도 새겨주었는데 정교하게 이름을 새겨넣었다. 자치기든 무엇이든 우리 반에선 유군이 깎은 것을 썼다. 자치 기도 나는 항상 헛치는데 유군은 휘둘렀다 하면 백발백중이었다. 냇가에 가서 고기를 잡아도, 다들 첨벙대기만 하는데, 유군은 소리없이 삼태기를 대놓고 고기가 있을 만한 풀섶이나 돌을 제켜반드시 타다다닥 튀어오르는 붕어를 건져 올렸다. 매사에 재주가 많고 사태를 파악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툼벙에 가면 헤엄을 가장 잘 쳤고, 콩서리를 하든, 원두막에서 수박서리를 하든 들키지 않게 깔끔히 처리했다.

 

그런데 5학년이 다 지나가는 어느날 북풍이 몰아칠 때, 그가 말끔히 차려입고 우리 앞에 섰다. 그리고 울상이 되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기쁨의 눈물이었을까? 슬픔의 눈물이었을까? 엄마를 찾았다 했다. 그리고 서울을 간다고 했다(내가 자라날 때는 625 직후였기에 전쟁고아가 많았다. 나는 정전협정전에 국민학교에 입학하였던 것이다). 그 뒤로 여태까지 나는 유군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성장한 후에 공자처럼 오소야천(吾少也賤, 나는 어릴 때는 친한 사람이었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큰 인물이 되어있을 것인가!

 

태재(大宰)는 관명이며 수상의 지위를 나타낸다. 당시 오()나라와 송()나라에서 이 관명을 썼다. 유보남의 정의에 인용된 청나라 방관욱(方觀旭)의 설에 의하면 이 질문의 주인공은 오나라왕 부차(夫差)의 태재였던 비()를 가리킨다. 좌전애공 712에 보면 노나라와 오나라가 외교교섭을 벌리는데 자공이 노나라의 스포크스맨으로서 오나라의 태재 비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신출(新出)의 당사본 정현 주는 놀라웁게도 이 방씨의 설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애공 12 노나라와 오나라가 탁고(橐皐)에서 만났을 때 오나라의 태재 비가 자공에게 이것을 질문한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주석해놓고 있다. 그렇다면 때는 공자가 69세였고, 자공은 38세였다.

 

그런데 처음 이 태재의 질문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우선 성인(聖人)’이라는 개념은 완벽한 인간, 성스러운 인간, 모든 덕성을 구비한 인간이라는 지존의 개념으로 진화되어 있다. ‘홀리 맨(the holy man)’의 뜻일 것이다. 그런데 하기다능(何其多能)’을 어찌도 그렇게 다재다능하실꼬, 훌륭하기도 하셔라 하고 단순하게 찬양하는 의미로 새길 수도 있고(신주의 입장), 그 속에 이미 비꼬는 톤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부자께서는 진실로 성인이실까? 어찌도 그렇게 재주가 많으시단 말인가?’ 이것은 신출의 정현 주의 입장이다.

 

 

부자께서는 성인이시며 대도(大道)를 얻으신 분이신데, 어찌 잡사에 있어서 그다지도 재주가 많으시냐고 물은 것이다. 재주가 많으면 반드시 성인으로 간주되기가 어렵다.

問夫子聖人德大道, 於藝事何其多能. 多能者, 則必不聖.

 

 

그러나 이러한 설은 전체 문장흐름을 꺾어버린다. 처음부터 암시되면 그 뒤의 말이 다 김빠진 맥주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자공의 말도 설득력을 잃는다. 역시 신주의 입장이 옳다. 태재의 찬양에 대하여 자공은 같이 맞장구를 치며 자기 선생의 성스러움(the holy)에 걸맞은 칭송을 늘어놓는다. ‘고천종지(固天縱之)’는 여러 구구한 해석이 있으나 역시 하늘을 주어로 해서 새겨야 한다. 내 번역을 잘 뜯어보라. 고주는 장성(將聖)’()’()’로 하여 대성(大聖)’으로 풀었으나 별로 재미없다. ‘장차 성인으로 만들려 한다.’ 혹은 성인이 되려 한다.’는 뜻으로 다이내믹하게 풀어야 마땅하다.

 

이 성스러운 담론에 대하여 일체 성(, the Holy)의 차원을 이야기하지 않고, ‘난 말야, 어렸을 때 천하게 커가지구 재주가 많단 말야하고 전혀 뜻밖의 고백을 진솔하게 말하는 공자의 꾸밈없는 인품이야말로 최고의 경지에 달한 선승이 토해내는 방할(棒喝)보다도 몇천 배의 강렬한 전율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성스럽다고 규정하는 자기 인격에 대한 평가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단지 재주가 많다고 하는 객관적 사실만을 있는 그대로 시인하는 공자의 인품에 우리는 인류의 희망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과연 예수가, “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목수일을 했던 천한 놈이었거든. 그래서 너희집 헌 문짝도 잘 고쳐주지!”하고 고백할 것인가? 이러한 진솔한 모습을 과연 서구문명의 어느 구석에서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인가?

 

()’ 이하의 구절은 고본에는 별도의 장으로 되어있으나 주희는 그것을 한 장으로 묶었다. 그 의도인즉, 금장(琴張: )의 이 파편도 상기의 사건과 동일한 맥락에서 같이 회상된 말로서 인지되도록 한 것이다. 슌다이(春臺)는 원래 자공 파편을 금장이 기록한 것이며 그것을 우선 기록해놓고 나서, 또 금장 본인이 언젠가 타일(他日) 들은 적이 있는 공자의 말씀으로서 관련되는 것이 있길래 여기에 첨가해놓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매우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按此琴張因錄上事, 遂自記他日所聞, 故自稱其名也]. 슌다이는 ()’이라 하고 그 앞에 자기 명()으로써 단칭(單稱)한 유례가 상론(上論)()’와 하론(下論)()’ 밖에 없으므로 상론 10편은 뢰 즉 금장(琴張)이 기록한 것이며, 하론 10편은 헌() 즉 원사(原思)의 기록이라고 주장한다. 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다산도 이 설을 소개하면서상론 10편이 금장의 기록이라는 것은 원래 소라이의 주장이다, 20편 모두를 이 두 사람의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과하다고 말한다[然遂執此文並謂二十篇, 皆二子所記, 則未必然也].

 

()는 공자의 제자인데 성이 금(), 자가 자개() 또는 자장(子張)전손사(顓孫師) 자장(子張)과 구분하기 위하여 자장(字張)으로도 쓴다이다. 논어에 여기 딱 한 번 출현한다.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는 그 이름이 나오지도 않는다. 그러나 공자가어에는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나온다.

 

 

금뢰는 위나라사람이다. 그 자가 자개(子開), 또는 자장(子張)이라고 한다. 평소 종로(宗魯)와 친구였다. 그런데 어느날 종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가에 가서 조문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공자가 불허하였다: “의에 합당치 않다.”

琴牢, 衛人, 字子開, 一字張. 與宗魯友, 聞宗魯死, 慾往吊焉. 孔子弗許, : “非義也.”

 

 

과연 종로(宗魯)가 누구인지, 어떠한 사건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금뢰는 그래도 공단에서 무게가 있었던 인물 같다. 맹자, 장자(莊子), 좌전에 그 인물이 언급되고 있다.

 

 

는 음이 태()이다. ‘()’는 평성이다. 공안국이 말하였다: “‘태재(大宰)’는 관명인 데 그 사람이 오나라 사람인지 송나라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다.”沃案. 집해원문에는 未可分也로 되어있다. ‘()’는 의문사이다. 태재는 대저 다능(多能)을 성인됨의 증표로 간주한 것이다沃案. ‘다능(多能)’을 긍정적으로 해석.

, 音泰. , 平聲. 孔氏曰: “大宰, 官名. 或吳或宋, 未可知也.” 與者, 疑辭. 大宰蓋以多能爲聖也.

 

()’은 풀어놓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늘이 공자의 역량을 제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의의 뜻이다. 자공이 겸손하게 감히 단정적으로 성인이라고 말하지 않고 잘 모르는 듯이 말한 것이다. 성인은 달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재주가 많다는 것은 단지 부수적인 일이므로, 또 우() 자를 말하여, ‘재주가 많음도 겸하셨다라고 한 것이다.

, 猶肆也, 言不爲限量也. , 殆也, 謙若不敢知之辭. 聖無不通, 多能乃其餘事, 故言又以兼之.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려서 실제로 신분이 미천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 까닭으로 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능한 것은 비천하고 사소한 일들뿐이요, 성인이기 때문에 꼭 통달치 못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다()하다고 해서 꼭 사람들을 잘 이끌 수 있는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또 말하시기를 군자는 재주가 많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으니, 이로써 우리를 깨우치려하심이라.

言由少賤故多能, 而所能者鄙事爾, 非以聖而無不通也. 且多能非所以率人, 故又言君子不必多能以曉之.

 

 

주희가 얼마나 상상력이 빈곤한 인물인가 하는 것을 이런 대목에서 엿 볼 수 있다. 도학자들은 어떤 개념적 유추에는 강한데, 문학적 상상력에 있어서는 너무도 그 리얼리티와 동떨어진 빈곤한 사유를 노출시킨다. 이토록 심오하고, 공자의 생애의 모든 질점이 압축된 결정적 순간의 발랄한 고백을 이토록 시시하게 해설한다는 것은 공자를 썩어빠진 미라의 성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도학자의 질곡일 뿐이다. ‘오소야천(吾少也賤)’이라는 이 한마디의 감동이 그들에게는 전혀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그냥 공자가 천하게 될까봐 두렵기만 한 것이다. 이미 계급적으로 고착화되어버린 송나라 사대부의 의식구조가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송유의 태도를 관망할 때 원시유가, 그러니까 논어의 편집자들이 얼마나 말랑말랑한 유연한 사고를 한 사람들인가, 경복치 않을 수 없다. 현금의 논어는 문헌의 세계에 있어서 인류사의 한 기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는 공자의 제자이다. 성이 금()이고, 자가 자개(子開), 또한 자장(子張)이라고도 한다. ‘()’는 쓰이는 것이다. 세상에 기용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로 인하여 잡예를 익혀 통달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 孔子弟子, 姓琴, 字子開, 一字子張. , 用也. 言由不爲世用, 故得以習於藝而通之.

 

오역이 말하였다: “제자들이 모여서 이 장의 부자의 말씀을 기록할 때에, 자뢰(子牢)가 자기가 이와 같이 들은 것이 있다고 말했고, 또 그 내용도 같은 맥락인지라, 여기 같이 기록해놓은 것이다.”

吳氏曰: “弟子記夫子此言之時, 子牢因言昔之所聞有如此者. 其意相近, 故幷記之.”

 

 

오역의 이러한 언급 때문에 주희가 이것을 한 장으로 묶은 것이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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