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마을에 있을 때의 공자의 모습
10-10A. 향당에서 향음주례가 파하고 퇴장을 할 때에 큰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먼저 일어나 나가면 그제야 그 뒤를 따라 나가셨다. 10-10A. 鄕人飮酒, 杖者出, 斯出矣. |
향음주례에 관한 것은 『의례』에 잘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향음주례가 파했을 때의 광경에 관한 것이다. ‘장자(杖者)’는 지팡이를 짚은 노인(어른)이다. 그 당시 지팡이는 요즈음 허리에까지 올라오는 작은 것이 아니라 산신령 민화 속에 나오듯이 본인의 키보다도 높은 것이었다. 불편할 것 같은데 경극(京劇)에도 모두 그런 지팡이를 쓰는 것을 보면 근세까지 내려온 풍습이었다. 당시(唐詩)에 등장하는 지팡이도 다 그렇게 높은 것이었다. 편의의 문제라기보다는 권 위의 상징이었던 것 같다. 『예기』 「왕제(王制)」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나이 50이 되어야 집에서 지팡이를 짚는다. 60이 되어야 향(鄕)에서 지팡이를 짚는다. 70이 되어야 나라에서 지팡이를 짚는다. 80세가 되면 조정에서 지팡이를 짚는다[五十杖於家, 六十杖於鄕, 七十杖於國, 八十杖於朝.]”
‘장자(杖者)’는 노인이다. 『예기』 「왕제」에는, ‘나이 60이 되면 향(鄕)에서 지팡이를 짚는다’라고 되어있다. 노인이 아직 나가지 않았을 때는 감히 앞설 수가 없고, 이미 나가면 또 감히 뒤에 남아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杖者, 老人也. 六十杖於鄕, 未出不敢先, 旣出不敢後.
10-10B. 향인(鄕人)들이 동네에서 액매기굿을 할 때에는 공자께서는 성대한 조복 차림으로 동네 공관 뜨락의 동쪽 섬돌에서 계시었다. 10-10B. 鄕人儺, 朝服而立於阼階. |
요즈음 점점 ‘굿’이라는 공동체행사가 사라져가고 있지만 고대사회에 있어서 굿의 의미는 공동체질서를 유지하는 불가결의 제의였다. 여기 ‘향인나(鄕人儺)’라고 한 것은 우리나라 굿 언어로 하면 ‘동제’에 해당되는 것이며 ‘나(儺)’라는 것은 귀신을 쫓는 제액(除厄)의 굿이므로 액매기(액막이)굿에 해당된다. 보통 ‘나(儺)’는 궁정에서 행하는 것이다. 고려말기 문신 이색(李穡)이 지은 칠언시에 「구나행(驅儺行)」이라는 것이 있지만, 우리나라 궁중에서도 세말에 구나(驅儺)라는 굿을 했는데 가면을 쓴 연극에 가까운 것이다. 악귀로 분장한 사람을 방상씨(方相氏)가 쫓는데 가면 쓴 소년들이 줄을 지어 따른다. 방상씨는 『주례(周禮)』 하관(夏官)에 묘사되어 있다: ‘방상씨는 곰가죽을 뒤집어쓰고 황금으로 된 4개의 눈을 하고 현의(검은 웃옷)와 주상(붉은 바지)을 입고 창을 잡고 방패를 치켜들고 100명의 노예를 인솔하고, 계절마다 어려움이 있을 때면 허수아비를 만들어서 집안을 수색하고 역질을 몰아내는 일을 관장한다[方相氏, 掌蒙熊皮, 黃金四目, 玄衣朱裳, 執戈揚盾, 帥百隸而時難, 以索室毆疫].’
그런데 본 장은 이 구나굿을 향당에서 자체적으로 할 때의 광경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지신밟기’와 같은 발랄한 산동지역의 민속굿이었을 수도 있다. 이때에 공자는 향리사람들에게 공경심을 표시하기 위해 조정에 나아 가는 성대한 조복을 제대로 차려입고 지신밟기나 액매기굿 같은 구나(驅儺)를 행하는 공관 뜨락의 동쪽계단(阼階)에 서있었다. 동네사람들과 같이 뛰지는 않지만 권위있는 참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공관’이라고 한 것은 동네의 공동행사장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향음주례가 열리는 곳 같은 공동장소로서 큰 뜨락이 있고, 그 위로 공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로 올라가는 계단이 양쪽으로 나 있는데 보통 오른쪽 계단을 조계(阼階)라 하고 왼쪽 계단을 빈계(賓階)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액매기굿이나 지신밟기는 정월대보름 때 열렸고, 궁중 나례는 섣달 그믐 때 열렸다. 조선조에는 이 나례를 전담하는 나례도감(儺禮都監)이 있었다.
황소에 의하면 방상씨가 역귀를 쫓아낼 때 ‘나나나나 … ’하고 소리를 지르기 때문에 ‘나례’라고 한다 했다. 그리고 3월, 8월, 12월, 일년에 세 번 열린다고 했다. 음ㆍ양이 바뀌는 환절기에 나쁜 귀신들이 머뭇거리면서 잘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이들을 쫓아내기 위한 것이라 한다. 8월의 나(儺)는 나양(儺陽)이고 3월ㆍ12월의 나는 나음(儺陰)이다. 월령(月令)에도 계춘(季春), 중추(仲秋), 계동(季冬)에 나를 행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 장에서 말하는 민간 나(灘)는 3월에 열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황소에 의하면 공자가 조계에 서있다고 한 것은, 동네사람들의 시끌쩌끌한 나례가 종묘의 선조들을 놀래킬까봐 두려워 조복을 입고 종묘(宗廟)로 가서, 주인의 계단인 동계에 서있는 모습을 가리킨다고 했다. 선조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시봉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공자의 효심(孝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공안국의 설을 계승한 것이지만 도무지 사리에 맞지 않는 추측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동네사람들의 굿인 이상, 동네사람들의 굿에 참여하는 공자의 공동체정신을 묘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네굿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혼자 종묘에 가서 외롭게 서있는 공자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은 좀 코믹하다. 그리고 공자의 효심(孝心) 운운하는 것도 논리의 비약이 있다. 종묘의 신주는 결코 공자의 선조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儺’는 내다(乃多) 반이다. ○ ‘나(儺)’는 역귀(疫鬼)를 쫓는 것이다. 『주례』 하관 「방상씨(方相氏)」에는, 방상씨(方相氏)가 이 나례를 관장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조계(阼階)’는 동쪽 계단이다. 나례는 비록 고례이지만 유희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데도 공자께서 조복을 차려입고 이에 임했다고 하는 것은 그 성(誠)과 경(敬)을 다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儺, 乃多反. ○ 儺, 所以逐疫, 『周禮』方相氏掌之. 阼階, 東階也. 儺雖古禮而近於戱, 亦必朝服而臨之者, 無所不用其誠敬也.
혹자가 말하기를(부분적으로는 공안국孔安國), 이 동네 사람들의 나례가 선조나 오사(五祀: 문門ㆍ행行ㆍ호戶ㆍ조竈ㆍ중류中霤)의 신들을 놀래킬까봐 두려워, 자기가 조계에 서있음으로 해서, 신들이 자기에게 의지하여 편안함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或曰: “恐其驚先祖五祀之神, 欲其依己而安也.”
이 한 절은 공자께서 향당에서 거처하시면서 일어난 일들을 기술한 것이다.
○ 此一節, 記孔子居鄕之事.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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