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음식을 대하는 공자의 모습
10-8A. 밥은 도정(搗精)이 잘 된 흰쌀밥을 싫어하지 않으셨으며, 날고기(육회, 생선회)는 가늘게 썬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다. 10-8A. 食不厭精, 膾不厭細. |
어떤 사람은 ‘현미종교’에 빠져있어 그것이면 만병통치인 것처럼 선전 하나, 사실 현미는 먹기에 괴롭다. 나는 흰쌀밥을 좋아한다. 그냥 입맛에 편한 것이 좋은 것이다. 흰쌀밥이라도 제대로 먹을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식생활의 원칙은 영양가에 있는 것이 아니요, 정갈함과 편안한 마음가짐에 있는 것이다. ‘회(膾)’는 육회, 생선회를 다 포괄한다. 지금의 중국인은 별로 육회를 즐기지 않으나 공자 때는 육회가 중요한 음식이었다. 유독 한국인만 육회를 즐기는 것을 보면 역사적으로 고산동지역 문화가 우리 조선과 교류가 빈번해 문화적 양태의 연속성이 있다. 나도 회는 잘게 썬 것을 선호한다. 스시도 얇게 썬 것이 좋지 두꺼우면 부담스럽다. 한마디로 공자는 상식적이다.
‘食’은 사(嗣)라고 발음한다. ○ ‘사(食)’는 밥이다. ‘정(精)’은 도정하는 것이다. 소와 양과 어물의 날고기를 저며 썰어놓은 것을 ‘회(膾)’라고 한다. 밥이 도정이 잘 되면 능히 사람을 자양(滋養)시킬 수 있고, 회가 거칠면 능히 사람을 해칠 수 있다. ‘불염(不厭)’이라 한 것은, 그것을 좋아한다, 그것을 좋다고 생각한다는 뜻이지, 꼭 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남들에게 강요하는 뜻은 없다【沃案. 음식은 개인의 취향이고 주관이다. 아무리 나에게 좋은 음식이라도 획일적으로 강요하면 안된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식생활정보ㆍ의학상식정보가 다 이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한 정보는 접하지 않을수록 좋다. 음식이란 내 몸에 적합한 것을 내가 판단하면서 끊임없이 반추해봐야 하는 것이다】.
食, 音嗣. ○ 食, 飯也. 精, 鑿也. 牛羊與魚之腥, 聶而切之爲膾. 食精則能養人, 膾麤則能害人. 不厭, 言以是爲善, 非謂必欲如是也.
이 장은 전체적으로 공자의 식생활에 관한 것인데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의 인간들에게 일깨우침이 크다. 이러한 생활의 지혜는 반드시 깊게 상고하여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할 것이다.
10-8B. 밥이 쉰 것이나 맛이 변한 것, 그리고 물고기가 상한 것, 육고기가 부패한 것은 잡수시지 않으셨다. 무엇이든지 음식의 색깔이 좋지 않거나 변한 것은 잡수시지 않으셨으며, 악취가 나는 음식은 드시지 않으셨다. 제대로 익히지 않은 것은 드시지 않으셨으며, 제철이 아닌 음식은 드시지 않으셨다. 10-8B. 食饐而餲, 魚餒而肉敗, 不食. 色惡, 不食. 臭惡, 不食. 失飪, 不食. 不時, 不食. 割不正, 不食. 不得其醬, 不食. |
마지막 ‘불시불식(不時不食)’은 하루의 일과 중에서 밥 때가 아니면 드시지 않으셨다라고 해석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공자시대 때 과연 ‘일일삼식(一日三食)’ 체제였는지, ‘일일이식(一日二食)’ 체제였는지 잘 모른다. 송대에 오면 ‘삼식(三食)’ 체제가 확고히 자리잡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전으로 올라가면 확정 지을 수 있는 자료가 빈곤하다. 문제는 우리가 밥을 먹는다’할 때 ‘밥’의 개념은 제대로 음식[(음(飮)과 식(食))체계를 갖춘 것을 의미하는데, 지금 우리가 말하는 ‘점심(點心)’이라는 것은 ‘밥’의 개념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점심이란 ‘혼미한 정신에 불을 켠다’라는 뜻인데 배가 고플 때 살짝 정신들게 하는 것으로 가벼운 스낵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재의 본격적인 삼식(三食)체계는 좀 과중한 것이다. 나는 제철이 아닌 음식은 먹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었다. 다산도 겨울에 수박 먹는 것을 요괴한 일처럼 기술한다【다산 때에도 비닐하우스 역할을 하는 움막이 있었다】.
‘食饐’의 ‘食’는 사(嗣)로 발음한다. ‘饐’는 어기(於翼) 반이다. ‘餲’는 오매(烏邁) 반이다. ‘飪’은 이심(而甚) 반이다. ○ ‘의(饐)’라는 것은 밥이 열과 습기에 상하는 것이니 쉰 것이다. ‘애(餲)’는 맛이 변한 것이다. 물고기가 물러터진 것은 ‘뇌(餒)’라고 한다. 육고기가 부패한 것을 ‘패(敗)’라고 한다. ‘색악(色惡)’과 ‘취악(臭惡)’은 아직 썩지는 않았지 만 색깔과 맛이 변한 것이다. ‘임(飪)’은 요리를 할 때, 생숙(生熟) 즉 익히는 정도에 관한 것이다. ‘불시(不時)’는 오곡이 여물지도 않았는데 먹는다든가, 과일이나 열매가 충분히 영글지 않았는데 먹는다든가 하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이 몇 가지는 모두 사람을 상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드시지 않은 것이다.
食饐之食, 音嗣. 饐, 於冀反. 餲, 烏邁反. 飪, 而甚反. ○ 饐, 飯傷熱濕也. 餲, 味變也. 魚爛曰餒. 肉腐曰敗. 色惡臭惡, 未敗而色臭變也. 飪, 烹調生熟之節也. 不時, 五穀不成, 果實未熟之類. 此數者皆足以傷人, 故不食.
음식은 자연식이어야 하고, 쉬거나 상한 것은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 무리해서 먹고 몸이 손상이 가면, 음식을 아끼는 것보다 몸을 상케하여 그 수고로움이 매우 큰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쉬고 상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멀쩡한 것 속에 이미 화학적 독성이 들어있으니, 날로 인간의 문명의 진보와 함께 날로 인간의 식생활이 위협받는 상황이란 가공스럽다. 인간이 먹는 음식을 가지고 장난을 쳐서 상업적 이익을 취하는 인간세의 행위에 대하여서는 만국(萬國)이 모두 중형을 가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에 대한 도덕성을 어려서부터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 인간의 몸은 인공체가 아닌 자연체이며, 자연체에 들어가는 모든 것은 자연물을 상등으로 삼는다는 지혜를 아동들에게 철저히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비타민을 위시한 모든 인공적인 건강식품이나 서양의 낙농계열의 음식들(dairy foods)이 결코 바람직한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곁들여 말해둔다. 채식 중심의 정결한 한국인의 전통적 식사습관이 매우 바람직한 식사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도 확신을 가지고 말해둔다.
나는 20세 전후로 몹시 병약하여 몸에 대한 나 나름대로의 의식을 획득한 후로는 일체 몸에 좋다는 약을 입에 댄 적이 없다. 감기든 뭐든 사소한 병치레에 우선 약을 먹고보는 현대인의 부지불식간의 습성은 개선되어야 한다. 무슨 약이든 약은 먹지 않을수록 좋다. 그리고 몸의 모든 것은 식(食)의 조절로서 해결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약식일여(藥食一如)에서 그 일(一)은 식(食)이다.
10-8C. 바르게 자르지 아니 한 것은 드시지 않으시었다. 음식에 합당한 소스가 같이 있지 아니 하면 드시지 않으시었다. 10-8C. 割不正, 不食. 不得其醬, 不食. |
‘할부정(割不正)’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시각적으로 반듯하게 썰었다 안 썰었다의 문제가 아니라, 전문적인 요리 칼질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의 부위를 썰 때에도 각 부위에 맞게 칼질하는 방식이 있고, 그러한 칼질이 올바르게 되지 않으면 못 먹을 부위가 들어갈 수도 있다. ‘정(正)’은 반듯하다는 시각적 문제가 아니라 ‘올바르게 칼질한다’는 요리방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문을 피상적으로 인용하는데 생각이 모자라는 것이다.
‘부득기장(不得其醬)’도 ‘간장을 얻지 못하면’이라는 식으로 단편적으로 번역하기 때문에 『논어』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간장이 없으면 밥을 못 먹었다는 말인가? 넌센스! 이 문제에 관해서도 이미 고주에 명료하게 해설되어 있다.
마음이 말하였다: “날생선의 회를 드실 때는 매콤한 겨자장이 없으면 드시지 않았다는 것을 이 구문은 말하고 있다.”
馬融曰: “魚膾, 非芥醬不食.”
이미 후한대의 주석에서 이토록 명료한 해석을 읽는다는 것은 감동스럽다. 여기 ‘개장(芥醬)’이라는 것은 일본인들이 즐겨먹는 와사비류이다. 날생선은 냉(冷)한 음식이다. 이 냉한 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열(熱)한 소스를 써야만 그것이 중화작용을 일으켜 몸에 해가 없는 것이다.
음(陰) | 양(陽) |
냉식(冷食) | 열장(熱醬) |
사시미 | 와사비 |
옛사람들의 음식습관이 모두 이러한 음양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뜻은 그 음식에 합당한 소스가 없을 때는 그 음식을 즐겨 드시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육고기를 자를 때 방정하지 아니 하면 드시지 않은 것은 잠시라도 바름에서 떠나시지 않은 것이다【沃案, 주희는 요리의 전문적인 지식으로 풀지 않고 피상적인 격식으로 풀었다. 송유의 한계이다. 이것은 도덕적 메시지가 아니라 구체적인 몸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나라의 육속(陸續)의 어머니는 고기를 썰 때에도 방정치 아니함 이 없었고, 파를 자를 때에도 한 치를 기준으로 정확히 잘랐다【이 고사는 『후한서(後漢書)』 卷八十一, 「독행열전(獨行列傳)」 第七十一, 육속조에 있다. 육속이 억울하게 옥에 갇혀 있는데 그 어미가 들여 민 고기국만 보고도 어머니가 만든 것인 줄 알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감동스럽게 묘사되어 있다】. 대저 그 어머니의 칼질이 아름다워서 자식이 보고서 어머니의 손길인 줄 안 것이다.
割肉不方正者不食, 造次不離於正也. 漢陸續之母, 切肉未嘗不方, 斷葱以寸爲度, 蓋其質美, 與此暗合也.
고기를 먹을 때 장을 사용하는데, 각기 그 마땅한 장 종류가 있으니, 그 마땅한 장을 얻지 아니 하면 드시지 않는 것은 구비되지 않은 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이었다. 이 두 가지는 사람에게 크게 해는 없으나, 단지 그 맛을 즐겨하여 구차히 잡수시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沃案, 주희는 음식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이 이렇게 상식적으로 말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맛의 즐김’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건강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송유들은 매사를 상식적으로 자기 관념 속에서 해설해버리고 마는 습성이 있다】.
食肉用醬, 各有所宜, 不得則不食, 惡其不備也. 此二者, 無害於人, 但不以嗜味而苟食耳.
공지는 형식주의자(formalist)가 아니다. 공자의 일상적 말이나 행동을 어떠한 경우에도 형식주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공자를 왜곡하는 것이다. 여기 공자에 관한 언급은 모든 것이 실제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다.
10-8D. 고기가 아무리 많아도 밟기운을 이기도록 많이 드시지는 않으시었다. 술은 일정량이라는 제한은 없었지만 절대 주정을 하거나 의식이 어지러워지는 데 이르지는 않으시었다. 10-8D. 肉雖多, 不使勝食氣. 惟酒無量, 不及亂. |
배우는 것이 많다. 육식을 곡기를 승할 정도로 많이 먹는 것은 바보스러운 일이다. 고기를 지나치게 많이 먹는 한국인의 습성은 반성을 요한다. 술에 양을 정하지는 않았다지만, 결국 ‘불급란(不及亂, 어지러워지는 수준에는 이르지 아니 한다)’이란 곧 주량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과음은 몸을 반드시 해친다. 오늘 해가 없는 듯해도 반드시 후일에 나타난다.
‘食’은 사(嗣)로 발음한다. ‘량(量)’은 거성이다. ○ ‘사(食)’는 곡류를 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기가 밥기운을 승(勝)하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 ‘주(酒)’라는 것은 사람들 과 더불어 즐거움을 합(合)하기 위한 것으므로【沃案. 이 말은 『예기』「악기」에 있다】, 양의 한계를 두지는 않는다. 단지 취함에도 절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니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食, 音嗣. 量, 去聲. ○ 食以穀爲主, 故不使肉勝食氣. 酒以爲人合歡, 故不爲量, 但以醉爲節而不及亂耳.
정이천이 말하였다: “‘불급란(不及亂)’이라고 한 것은 단지 그 의식을 어지럽게 한다는 수준의 말이 아니라 기본적인 혈기(血氣)라도 또한 어지럽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몸이 훈훈한 정도에서 그쳐야 옳다.”
程子曰: “不及亂者, 非惟不使亂志, 雖血氣亦不可使亂, 但浹洽而已可也.”
정이천의 말은 역시 각박한 도학자의 말이나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술이란 기분좋기 위하여 마시는 것이나 초장에 절제하지 않으면 절제하기 어렵다. 사람이 기계적으로 살 수는 없는 일이나 술로 몸을 상하게 할 수는 없다. 중용의 도란 실제로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다. 예수도,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술을 많이 마신 편에 속하는 성인들이었다. 단지 싯달타는 술을 좋아한 인물 같지는 않다.
공자시대의 술문화는 이미 상당히 다양화된 것으로 사료된다. 포도는 그냥 놓아두어도 술이 되지만, 밥은 아무리 놓아두어도 썩을 뿐 술이 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누룩’을 필요로 하는 곡주는 서양의 포도주에 비해 지혜가 한 차원 더 높은 것이다. 문명이보다 진화된 세계에서 생겨날 수 있는 발효방법이다. 공자시대의 술은 기본적으로 곡주였으며, 막걸리류로부터 시작하여 증류주인 백주(白酒)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술이 있었다. 따라서 도수도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소흥주(紹興酒)도 거의 그 모습이 공자시대에까지 확실하게 소급된다. 소홍주는 이미 오 태백의 나라에서 제조되기 시작한 것이며, 월왕 구천(句踐)의 고사에 이미 소홍주의 원형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10-8E. 시장에서 산 술과 육포를 드시지 않으셨다. 10-8E. 沽酒市脯不食. |
옛날에는 술도 집에서 담그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육포도 시장에서 산 것은 불안하다. 황간은 술도 집에서 만들지 않은 것은 청결하지 못하고, 육포도 스스로 제작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산 것은 뭔 고기로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酒不自作, 則未必淸潔. 脯不自作, 則不知何物之肉]라고 했는데 참으로 맞는 말이다. 시장에서 산 깡통음식이나 소세지 같은 것은 절대 드시지 않으셨다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고(沽)’와 ‘시(市)’는 모두 시장에서 산다는 뜻이다. 시장에서 산 것은 정미(精微)하거나 청결하지 못할 수가 있고 혹 사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향당(鄕黨)」 11에 나오는 고사, 계강자가 보내온 약을 드시지 않으셨다는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沽, 市, 皆買也. 恐不精潔, 或傷人也. 與不嘗康子之藥同意.
될 수 있는 대로 제품화된 것을 소재로 하는 식사를 멀리할수록 건강에 유리하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너무 지나치게 냉동식품이나 패스트푸드, 깡통류에 의존하는 것은 국력(國力)의 미래를 생각할 때에 결코 유익하지 못한 것이다. 젊은이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나라가 좋은 나라이다. 향락과 편안함을 제공하는 나라가 곧 좋은 나라는 아니다.
10-8F. 평소에 생강 드시는 것을 거두지 않으셨다. 10-8F. 不撤薑食. |
황소에 의하면 재계기간에는 강한 냄새가 나는 것은 먹을 수가 없는 법이나, 생강은 맵기는 해도 금기의 대상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사람들에게서 ‘생강’은 향신료(香辛料)로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생강을 빼놓고는 중국 음식을 논할 수 없다. 명말청초의 대유, 왕선산(王船山, 1619~1692)이 생강농사로 평생을 연명했기 때문에 강재(薑齋)선생이라고 부르는 것도 중국인들의 식생활에 있어서의 생강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한약재에도 ‘강삼조이(薑三棗二)’라 하여 생강과 대추를 반드시 넣는 것은, 생강이 신온(辛溫)하면서도 무독(無毒)하고 화중온위(和中溫胃)할 뿐 아니라 모든 약재의 기운을 소통시키고 해독하 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강(薑)’은 신명(神明)에 통하고, 더러움과 악취를 제거하기 때문에, 평소에 드시는 것을 거두시지 않은 것이다.
薑, 通神明, 去穢惡, 故不撤.
주희의 주석이 명료하다. 신출의 정현 주는 언급할 가치가 없다.
10-8G. 평소 많이 드시지 않으셨다. 10-8G, 不多食. |
소식(少食)이란 예나 지금이나 지혜의 원천이다.
그만하면 됐다고 생각할 때 그쳐야 한다. 이는 탐심(貪心)이 없어야 한다.
適可而止, 無貪心也.
이 세상에 가장 어려운 것이 여기 ‘적가이지(適可而止)’라는 말이다. 평생을 실천하려고 애쓰고 또 애써도 실현키 어려운 것, 『순수이성비판』 같은 책을 한 권 쓰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이 ‘작가이지(適可而止)’이다. 나는 고교를 졸업할 때 몸무게 58kg였는데 지금 환갑이 넘도록 동일한 몸무게를 한결같이 유지하고 있다. 이 글을 쓰고있는 이 순간에도 58kg. 그러나 자만은 금물. ‘적가이지(適可而止)’는 참으로 어려운 인간의 과제상황이다. 몸무게 조절의 제1원리는 소식과 활동.
10-8H. 나라에서 제사 지내고 받은 고기는 그날 밤을 넘기지 않고 주변에 나누어 주셨다. 그러나 집에서 제사 지낸 고기는 사흘까지는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사흘을 넘기면 그것은 먹지 못한다. 10-8H. 祭於公, 不宿肉. 祭肉不出三日. 出三日, 不食之矣. |
공가(公家)에서 임금이 조상들을 제사지내는 것을 도와주고 얻는 고기(소ㆍ양ㆍ돼지 등)는 돌아오는 즉시 주변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하룻밤 재울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것은 하느님의 은혜 지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집에서 제사지내는 고기는 3일을 넘기지 않고 분배하셨다. 대저 3일이 지나면 고기가 반드시 부패하여 사람들이 먹을 수가 없으니, 이것은 귀신(하느님)이 흠향하시고 남은 소중한 것을 함부로 하는 것이다. 단지 임금이 주신 제육(祭肉)에 비해 다소 늦출 수 있을 뿐이다.
助祭於公, 所得胙肉, 歸卽頒賜. 不俟經宿者, 不留神惠也. 家之祭肉, 則不過三日, 皆以分賜. 蓋過三日, 則肉必敗, 而人不食之, 是褻鬼神之餘也. 但比君所賜胙, 可少緩耳.
10-81. 식사를 하시면서 대화를 하시는 법이 없었으며, 잠자리에 드시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습관이 없으시었다. 10-81. 食不語, 寢不言. |
‘식불어(食不語)’라는 것은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어려서부터 귀가 따갑게 들은 말이라 전혀 이상하지 않다. 밥먹을 때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우리 조선민족의 식사전통이었다. 그런데 일본사람들만 해도 이런 것이 납득이 가질 않는 모양이다. 어떻게 사람이 물으면 대답하지 않을 수 있냐는 것이다. 그래서 소라이는 ‘식불어(食不語)’의 ‘어(語)’는 교훈의 말이라고 했다[蓋語者, 誨言也]. 그러니까 식사할 때는 교훈을 하는 것 같은 엄숙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고 풀었다. 일본이 유교전통문화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이런 감각에서도 느낄 수 있다. 밥먹을 때 말하지 않고, 밥만 먹는 것이 나쁠 수가 없다. 밥먹을 때 말을 많이 하 는 것은 시간이 남아 돌아가는 영국귀족들의 일과일 것이다. 우리가 식사시간에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식사시간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하루의 일과에서 식사에 많은 시간을 쏟는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서양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식사시간을 길게 해서 소일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습속이다. 불란서에 가서 간단히 저녁 한 끼 먹으려 해도 세 시간은 족히 낭비해야 한다. 식사시간 중에 많이 떠드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것은 소화를 돕기 위한 것이라고 운운하는 것도 넌센스인 것이, 칼로 스테이크를 저미어 먹는 사람들과 젓가락으로 가볍게 소찬을 집어먹는 사람들의 습관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메인 디쉬가 나오기 전에 쓸데없는 것을 많이 먹게 만드는 코스요리도 잘못된 것이고, 쓸데없이 잔뜩 늘어놓는 한국식 밥상도 제사상을 흉내낸 것으로 아주 잘못된 것이다. 메인 디쉬만 간결하게 짧은 시간에 떠들지 않고 먹는 것이 최상의 식사라고 말하고 싶다. 공자가 그렇게 식사했을 것이다.
고주ㆍ신주 모두 ‘어(語)’는 대화로 풀이하고 ‘언(言)’은 혼자 말하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잠자려할 때는 군소리없이 빠르게 잠으로 진입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묻는데 대답하는 것을 ‘어(語)’라 하고, 혼자 말하는 것을 ‘언(言)’이라 한다.
答述曰語. 自言曰言.
범순부가 말하였다: “성인의 존심(存心)은 별것이 아니다. 먹을 때 먹고, 자야 할 때 지는 것이 곧 마음자세를 바르게 존(存)하는 것이다. 먹을 때 먹기만 하고, 잘 때 자기만 해야지 이때 말하고 중얼거리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范氏曰: “聖人存心不他, 當食而食, 當寢而寢, 言語非其時也.”
양중립이 말하기를, “폐는 기(氣)의 주인이 되어 소리를 발출하는 기관이다. 잠자고, 먹을 때는 기가 응체되어 잘 통하지 않는다. 이때 대화하거나 혼자 중얼거리면 폐를 상하게 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이 또한 통한다.
楊氏曰: “肺爲氣主而聲出焉, 寢食則氣窒而不通, 語言恐傷之也.” 亦通.
양중립은 전혀 의학상식이 없는 무식한 소리를 하고 있고, 그것을 인용하며 역시 통한다고 말하는 주희의 주석이 문제가 있다. 내가 번역을 좀 온건하게 했으나, ‘침식즉기질이불통(寢食則氣窒而不通)’이라고 했으니 직역하면 ‘잠자고 먹을 때에는 기가 막혀 통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어찌 잠자고 먹을 때에 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무식한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말을 하는 것이 폐를 상하게 할 수가 있는가? 오히려 소통케 만들 것이 아닌가? 하여튼 의학상식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송대 의학의 수준이 이미 기본적인 해부학의 상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송유들의 관념성 을 나타내는 성의없는 발언들이다.
10-8J. 공자께서는 비록 거친 밥이나 산나물국을 드실 때라도, 드시기 전에 반드시 제(祭)를 올리셨다. 제를 올리실 때는 엄숙하고 공경한 모습이었다. 10-8J. 雖疏食菜羹, 瓜祭, 必齊如也. |
우리나라 무당들이 굿을 할 때나,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나, 남의 집에서 음식을 가져왔을 때, 그 음식의 일부를 조금씩 떼어 던지면서 ‘고수레!’하고 외친다. 또 그렇게 하는 행위를 고수레(혹은 고시레, 고시래. 방언에 따라 조금씩 발음이 다르다)라고 한다. 전언하는 바에 의하면 단군(檀君) 때에 고시(高矢)라는 사람이 백성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그에게 감사의 표시로 음식의 일부를 바치는 것이라고 한다. 음식의 근원에 대한 감사는 인류의 공통 된 제식의 테마였다. 기독교인들은 지금도 식전에 꼭 기도를 하는데 이것이 과 연 서양인들의 전유물일까? 기독교인들이 식전기도를 하는 것도 이 음식을 먹 을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것으로 음식의 근원에 대한 보편적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전통이 우리의 원래 고래전 통이었다. 『춘추공양전』 양공 29년조에는 ‘음식필축(飮食必祝)’이라는 말이 있고, 여기서도 ‘필제(必祭)’【‘과(瓜)’는 ‘필(必)’로 고쳐 읽는다】라 했듯이, 우리가 먹는 음식을 최초로 먹을 수 있게 만들어준 옛 조상에게 감사하는 제사를 올렸다.
내가 어렸을 때도 식사하시는 노인들의 습속을 보면 반드시 간장을 먼저 떠 드시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독상을 받고 찬합을 열면 그 뚜껑에 음식을 조금 덜어 왼쪽 한 구석에 놓고 난 다음에 식사를 시작하시는 분이 있었다. 이런 것이 모두 식전기도와 같은 약식의 제(祭)이다. 공자도 식사하기 전에 반드시 식사의 일부를 떼어 제사를 지냈고, 그 모습이 매우 엄경(嚴敬)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전통은 다시 살릴 필요가 있다. 일 년에 햅쌀이 나올 때만이라도 밥먹기 전에 고시레의 예식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食’은 사(嗣)로 발음한다. 육덕명이 말하였다: “노론(魯論)에는 ‘과(瓜)’가 ‘필(必)’로 되어있다.”(『경전석문』)
食, 音嗣. 陸氏曰: “魯論瓜作必.”
○ 옛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모든 음식종류에서 각기 조금씩 덜어내어 그릇 사이의 빈 곳에 놓고 선대에 최초로 음식을 만든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었으니, 이는 그 뿌리를 잊지 않는 것이다. ‘제(齊)’라는 것은 엄숙하고 공경한 모습이다【沃案. 이때는 ‘재’라고 읽지 않는다】. 공자는 비록 초라 한 음식이라도 반드시 제(祭)하시었다. 그리고 제하실 때는 반드시 경(敬)하셨으니, 이것은 성인의 성(誠)이다.
○ 古人飮食, 每種各出少許, 置之豆閒之地, 以祭先代始爲飮食之人, 不忘本也. 齊, 嚴敬貌. 孔子雖薄物必祭, 其祭必敬, 聖人之誠也.
이 한 절은 공자의 음식에 관한 예절을 기록한 것이다.
○ 此一節, 記孔子飮食之節.
사현도가 말하였다: “성인께서 음식하시기를 이와 같이 하는 것은 구복(口腹: 입과 배)의 욕심을 다하려 함이 아니다. 대저 기(氣)와 몸(體)을 길러서 생명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면 당연히 이와 같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께서 드시지 아니 하는 음식을, 구복의 욕구를 다하려는 자들은 마구 먹으니, 이 자들은 도무지 욕심이 승하여 무엇을 선택할 겨를도 없는 놈들이다.”
謝氏曰: “聖人飮食如此, 非極口腹之欲, 蓋養氣體, 不以傷生, 當如此. 然聖人之所不食, 窮口腹者或反食之, 欲心勝而不暇擇也.”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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