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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향당 제십 - 18. 까투리에 감정 이입한 공자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향당 제십 - 18. 까투리에 감정 이입한 공자

건방진방랑자 2021. 6. 27.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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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까투리에 감정 이입한 공자

 

 

10-18. 새는 뭔가 위험스러운 기색이 느껴지면 튀쳐오른다. 그리고 하늘에서 빙빙 돌다가 나뭇가지 위에 사뿐히 올라앉는다.
10-18. 色斯擧矣, 翔而後集.
 
공자께서 이런 광경을 보시고 시 구절을 읊으셨다: “저 깊은 산 외나무다리에 앉은 까투리야! 좋을 때로다! 좋을 때로다!”
: “山梁雌雉, 時哉! 時哉!”
 
자로가 이 노래를 잘못 알아듣고 까투리를 잡아 요리를 하여 바쳤다. 공자께서 세 번 냄새만 맡으시고는 일어나시었다.
子路共之, 三嗅而作.

 

모든 사람이 이 장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고 잘 모르겠다고 하나, 그것 은 주희가 이 장에 궐문(闕文)이 있어 억지 주석 달 수가 없다고 말하는 바람에 모두 가 덩달아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논어의 여타 구절과 비교하여 이 장이 난해할 하등의 요소가 없다. 이 장을 가지고 문제 삼는다면 논어전체의 구문이 다 궐문이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흐름이 명료하고 충실하다고 나는 생각된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 모든 장에 다 있었던 것이다. 고주도 이 장의 텍스트를 문제시 하지 않았고, 신출의 정현 주 텍스트도 현행본과 동일하며, 그 의 주석도 기존의 고주와 완전히 일치한다. 불행하게도 정주한간에는 이 장이 들어있지 않다.

 

색사거의(色斯擧矣)’()’은 위험하다는 위()자와도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고, 문자 그대로 색깔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새라는 것은 어떤 새이든 조금만 색다른 기색이 있어도 날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위험스러운 기색이라고 번역하였다.

 

상이후집(翔而後集)’은 이론의 여지가 없이 명료하다. 하늘을 빙빙 돌면서 잘 관찰하다가, 위험요소가 없으면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는다. 고주에 인용된 주생렬(周生烈)의 주석이 명료하다: ‘빙빙 돌다가 잘 살핀 후에 내려 앉는다[廻翔審觀而後下止也].’

 

여기 ()’이라는 글자는 대표적인 회의자로 새 추() 밑에 나무 목()이 있다. 여러마리 새들이 나뭇가지 위에 앉는 모습을 그린 회의자로 원래 ()‘이라고 쓴 글자이다. 신출의 정현 주에 의하면 공자는 산에 갔다가[山行] 이 광경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그에 맞는 시를 읊었다. 이 시는 현재 시경에 존하지 않는다. ‘자치(雌雉)’는 암꿩, 우리말로 까투리. 수꿩은 우리말로 장끼. ‘산량(山梁)’이란 심산계곡에 걸려있는 외나무다리이다. 그 외나무다리 위에 한 가로이 앉아있는 화려한 긴 꽁지 꿩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물론 그 밑으로는 계곡물이 흘렀을 것이다. 계곡물을 쳐다보고 있는 까투리의 모습이 마치 서자여사부(逝者如斯夫)’(9-16)를 외치는 자신의 모습을 연상시켰을 수도 있다. 때에 맞게 날고, 때에 맞게 앉고, 무궁무진한 환경의 변화에 아랑곳없이 잘 적응하며 태연자약하게 살아가는 새의 모습을 영탄(詠嘆)하는 노래였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자리를 골라 앉는 모습은 군자의 모습일 수도 있다. 하여튼 공자는 어떤 기능적 목적이 없이 그냥 순수하게 산 속에서 느끼는 호젓한 감회를 읊었을 것이다. 고주는 역시 좀 이념적이다.

 

 

심산 외나무다리의 저 까투리는 때를 얻었는데, 나는 때를 얻지 못했구나! 그래서 탄식의 노래를 부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言山梁雌雉得其時, 而人不得時, 故歎之.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어떠해도 상관없다! ‘때다! 때다!’를 외치자, 자로는 공자께서 꿩요리가 드시고 싶어서 꿩요리가 제철이다혹은 저 놈이 때가 무르익었다는 등등의 말로 오해하고 그 꿩을 잡아 요리해 올렸다. 그 순진한 자로의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는 일, 세 번 냄새만 맡아주고 일어나셨다. 원래 꿩요리는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자로는 야생생활을 오래한 사람이라 꿩 잡는 도사였을 것이다.

 

다른 해석이라고 해봐야, ‘자로공지(子路共之), 삼후이작(三嗅而作)’자로가 꿩을 잡으려고 손을 모으자 꿩이 날개를 세 번 파득거리고 날아가버렸다()’로 해석하는 정도이다. 전체적으로 매우 말끔한 흐름을 가지고 있는 고사이며 자로와 공자의 관계가 코믹하고도 격조있게 표현되어 있다.

 

단지 이상한 것이 있다면 이 장의 성격이 향당(鄕黨)의 전체적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는 것일 뿐인데, 그것은 키무라의 주장대로 이 장이 제나라에서 별도로 전승된 것으로 향당편과는 관계없던 파편이 부록형태로 편입된 데서 오는 성격일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색사거의(色斯擧矣)장을 무조건 불완전한 장으로 간주하 는 것은 주희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색사거의(色斯擧矣)장에 관하여 다산은 훌륭한 또 하나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산량(山梁)’이란 산계곡의 작은 다리(山谿之小橋)이며, ‘시재시재(時哉時哉)’떠날 때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자는 꿩을 쏘는 사냥꾼[射雉者]이 산량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고어(古語)를 읊조렸다는 것이다. 이는 새가 죽을 것을 슬퍼하여, 새가 놀라서 화들짝 날아가 해를 피했으면 하는 염원에서 한 말이라는 것이다[悲其將死, 欲其色擧, 以避害也]. 그런데 결국 꿩은 죽고 말았다. 자로는 공자께서 시재시재(時哉時哉)’라고 누차 말씀하신 것이 시물(時物)을 잡수시고 싶어서 하신 말씀으로 착각하고 요리를 해서 올렸다는 것이다. 오랫만에 제시된 다 산의 창견(創見)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따사로운 공자의 마음, 생명에 대한 존 중, 이런 주제가 표현된 좋은 견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새는 사람의 안색이 좋지 못한 것을 보면 무조건 날아가 버린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난 후에 하늘을 빙빙 돌면서 잘 살펴본 후 내려앉는다. 사람이 오묘한 때의 기미를 파악하여 진작하는데 있어서沃案, 이 말은 주역(周易)』 「계사5장에 있다. 예괘(豫卦) 육이효(六二)의 해석, 처할 곳을 살피어 택하는 것이 마땅이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 아래위로 반드시 궐문이 있을 것이다沃案,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다. 논어의 언어는 사이사이를 다 접속시키지 않는다. 이 정도는 정상이다.

言鳥見人之顔色不善, 則飛去, 回翔審視而後下止. 人之見幾而作, 審擇所處, 亦當如此. 然此上下, 必有闕文矣.

 

은 구용(九用) 반일 수도 있고, 또 거용(居勇) 반일 수도 있다. ‘는 허우(許又) 반이다. 형병(邢昺)이 말하였다. “‘()’은 다리이다. ‘시재(時哉)’라는 것은 꿩이 물을 마시고 모이를 쪼아먹는 것이 제때를 얻었음을 말한 것이다. 자로가 이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철에 알맞은 음식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여 공자께 요리해 바친 것이다. 공자께서는 잡수실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 냄새만 세 번 맡으시고 일어나신 것이다.”

, 九用反, 又居勇反. , 許又反. 邢氏曰: “, 橋也. 時哉, 言雉之飮啄得其時. 子路不達, 以爲時物而共具之. 孔子不食, 三嗅其氣而起.”

 

조설지(晁說之)가 말하였다: “석경에는 자 가 ''로 되어 있는데, 이는 꿩이 우는 것을 일컬음이다.”

晁氏曰: “石經 作戛, 謂雉鳴也.”

 

유빙군이 말하였다: “‘()’ ‘()’이라 해야 마땅하다. 고격(古闃) 반이다. 즉 음이 격이다. 이는 두 날개를 펴는 것이다. 이아에 보인다.”

劉聘君曰: “, 當作狊, 古闃反. 張兩翅也. 爾雅.”

 

나 주희는 생각한다. 후자의 두 설을 따르면 ()’ 자를 자로가 꿩을 두 손을 모아 잡는다는 뜻으로 새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반드시 궐문이 있다. 억지로 설을 만들 필요는 없다. 내가 들은 것만 우선 기입해두어 후학이 밝히기를 기다린다沃案. 후학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이 장은 이것으로 완벽하다.

愚按: 如後兩說, 則共字當爲拱執之義. 然此必有闕文, 不可强爲之說. 姑記所聞, 以俟知者.

 

 

이로써 향당(鄕黨)편이 다 끝났으나 나 도올로서는 이 편의 주석이 가장 힘들었고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선 전통적 주석가들의 견해가 명료하지를 않고, 특히 우리나라 역자들은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해당되는 출전을 조사치 아니 하고, 자신들의 부천(浮淺)한 현재적 체험에 기초하여 마구 해석을 해버리는 경향성이 있다. 그 바람에 의미의 왜곡이 심하고 본의가 멀리 사라져 번역문이 전혀 가슴에 와닿 지를 않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를 일일이 광정하느라고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요해야만 했다. 향당편의 주석이 앞으로 오는 이 땅의 후학들에게 공자 시대의 사람들이 산 모습을 몸소 느껴 볼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서 일상적 지혜를 얻는 어떤 예지의 통찰을 발견하기를 앙망한다. 공자의 삶의 세목들을 살펴가면서 공자의 놀라운 컴먼센스(common sense)와 감성의 섬세함에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향당을 편집한 사람들의 의도에 깔려 있는 철학은 이미 유교가 형식화되고(formalized) 제식화되어 있다(ritualized)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에 대한 비판을 모면할 길은 없을 것이다.

 

 

 

 

인용

목차 / 전문

공자 철학 / 제자들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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