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사유의 이미지
사실 동양철학에서 필연성의 철학과 우발성의 철학이 갈라서는 가장 극적인 장면은 동중서와 왕충의 대립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노자(老子, 생몰연대 미상)【노자는 고대 중국의 가장 심오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세계의 근본에는 ‘도’라는 실체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 도를 인식하면, 인간이 세계 속에서 갈등과 대립 없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도의 인식이 모든 인간에게 제안된 것이 아니라,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군주에게만 한정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사상은 81편의 철학시로 쓰인 『도덕경』에 압축적인 형식으로 실려 있다】와 장자(莊子, BC 369?~286?)【장자는 인간의 삶이 타자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통찰했던 중요한 철학자이다. 모든 유아론적 사유를 꿈에 비유하면서 공격한 그는 중국 역사상 유례 없는 탁월한 비판가였다. 그에게 있어서 타자를 긍정하지 못하는 모든 사유는 기본적으로 유아론적인 것이다. 장자의 사유는 「내편」, 「외편」, 「잡편」으로 구분되어 있는 『장자』에 실려 있지만, 이중 「내편」만이 그나마 장자 본인의 사상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라는 두 사상가, 그리고 이들에 대한 끈질긴 오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런 오해에 오랫동안 시달려온 사상가는 노자라기보다는 장자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노자의 사유를 그대로 계승한 인물이라는 잘못된 평판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맑스가 헤겔의 계승자라고 오해되는 것에 비유될 만한 사태이지요. 맑스의 변증법이 헤겔의 그것과 같다고 오해되는 이유는, 엥겔스와 스탈린이 맑스를 헤겔 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자의 사유가 노자의 사유와 같다고 오해되는 이유는, 후대 사람들이 장자를 노자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노자의 유명한 주장 하나를 읽어볼까요?
도(道)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도덕경(道德經)』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여기서 ‘하나’, ‘둘’, ‘셋’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노자가 결국 ‘도생만물(道生萬物)’, 즉 ‘도가 만물을 낳았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런 주장의 함의는 무엇일까요? 『도덕경』에 가장 체계적이고 훌륭한 주석을 붙인 왕필(王弼, 226~249)【왕필은 중국 삼국 시대의 혼란기에 살았던 학자이다. 그는 노자 『도덕경』을 체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형이상학을 구축했다. 그것이 바로 뿌리와 가지라는 비유로 설명되는 본말의 형이상학이다. 왕필이 본말의 형이상학 체계를 순수한 철학적 관심으로 구성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삼국 시대의 혼란을 극복하려는 정치 이데올로그였기 때문이다. 주요 저서로 『노자주』, 『주역주』, 『노자지략』 등이 있다】이란 인물은 노자의 철학에서 ‘나무 이미지’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왕필의 본말(本末)에 입각한 노자 이해 방식입니다. 여기서 ‘본말’이란 글자 그대로 ‘뿌리[本]’와 ‘가지[末]’를 의미합니다. 뿌리[本]가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형이상(形而上)의 영역을 나타낸다면, 가지[末]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이하의 영역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뿌리가 통일된 일자(一者)를 상징한다면, 가지는 다양하게 분기된 다자(多者)를 상징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나무 이미지에 근거한 『도덕경』은 어떤 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까요?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가지와 가지 사이의 만남이 결코 직접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뿌리라는 근본적 토대의 매개를 통해서만 서로 만날 수 있을 뿐이죠. 아니, 어쩌면 가지와 가지는 만날 필요도 없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의 뿌리에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 다양한 가지가 서로 만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장자는 과연 이런 노자의 생각을 얼마나 따르고 있는 걸까요? 『장자(莊子)』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을 생각해봅시다.
길(道)은 걸어가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장자』 「제물론(齊物論)」
道行之而成.
장자의 철학은 우리가 살펴본 노자의 나무 이미지와는 사실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장자는 노자의 사유, 즉 필연성의 사유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만물에 앞서서 ‘도’라는 절대적인 필연성이 미리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장자는 어떻습니까? 그는 노자가 이야기하는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우리가 우발적으로 만난 후에 생기는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제 말이 이해하기에 어려운가요? 그러면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례 하나를 더 들어보지요. 두 남녀가 만나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이런 경우를 노자는 어떻게 이야기할까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어. 그 때문에 둘이 서로 만나게 된 것이지, 서로의 노력에 의해서 갑자기 만나게 된 것은 결코 아니야.” 마치 노자는 전생이나 운명과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점쟁이처럼 말할 것입니다. 반면 장자라면 이런 경우를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두 사람은 마주칠 수도 있었고, 혹은 전혀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었지. 그런데 마주쳤고 이제 사랑을 나누게 된 것뿐이야. 물론 두 사람이 마주치기 전에 사랑을 포함한 일체의 의미가 미리 존재했던 것은 결코 아니야. 이제 두 사람에게 남은 문제는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이 우발적인 마주침에 충실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이겠지.”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자 그렇게 무섭게 내리던 비가 그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필연성의 철학과 우발성의 철학이 갈라지는 지점을 예견해보았습니다. 서양철학의 흐름 속에서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사유 전통을 엄격하게 구별했던 철학자는 바로 알튀세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이 두 가지 사유 전통의 갈등과 대립은 분명 동양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났습니다. 필연성의 철학과 우발성의 철학! 이것은 사실 은밀하지만 매우 전형적인 철학의 두 가지 경향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앞으로 과거의 철학자들을 읽어나갈 때, 혹은 여러분의 삶을 철학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할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마지막으로 들뢰즈의 이야기를 읽어보는 것도 이 문제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알튀세르와 마찬가지로 그도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을 발견했던 철학자이기 때문입니다.
‘리좀’은 출발하지도, 끝에 이르지도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는 ‘사이’ 존재이고 간주곡이다. ’나무’는 친자 관계(filiation)를 이루지만 ‘리좀’은 결연 관계(alliance)를 이루며, 오직 결연 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이 존재한다(être)’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와(et) ……와(et)……’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 이 접속사 안에는 ‘……이 존재한다’라는 동사에 충격을 주고 뿌리를 뽑을 수 있는 힘이 충분하게 들어 있다.
『천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들뢰즈는 우리의 사유를 두 가지 이미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나무(tree)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리좀(rhizome, 뿌리줄기)【리좀과 나무를 서로 비교하면서, 들뢰즈는 리좀에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공식을 제안하고 있다.(『천개의 고원』) 그것이 바로 ‘n-1’이라는 공식이다. 사태들의 다양성(n)을 긍정하기 위해서 들뢰즈는 이 다양성을 인위적으로 통일시키는 통일성이나 중심(1)을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이란 이미지입니다. 나무는 땅에 굳건히 뿌리를 박고 서서 무성한 가지와 잎을 지탱합니다. 나무의 뿌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가지와 잎에 앞서 존재하는 절대적인 토대, 즉 절대적인 의미이자 필연성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들뢰즈는 뿌리와 줄기로 구성된 나무 이미지를 아버지와 아들의 구조로 이루어진 친자 관계에 비유합니다. 아버지가 없다면 아들은 존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관계에서 절대적 의미를 지닌 것은 바로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리좀은 어떻게 활동하는지 주목해보지요. 이것은 땅속에서 부단히 증식하면서 다른 뿌리줄기와 연결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 온갖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식물입니다. 리좀의 활동이 새로운 연대와 다양한 유대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남녀가 만나서 맺어지는 것과 같은 결연 관계에 그것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 때문에 리좀은 새로운 타자, 새로운 사건과의 우발적인 마주침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지요.
그런데 들뢰즈의 이야기에서 조금 어려운 대목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나무는 ‘………이 존재한다’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와 ……와……’라는 접속사를 조직으로 갖는다”는 대목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프랑스 지식인들 특유의 현란한 문체에 너무 현혹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읽으면 됩니다. 여러분의 존재를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물론 두 분이 서로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지요. 그러나 두 분은 우연히 만났고, 두 분의 사랑을 통해 정자와 난자가 서로 만나서 수정체를,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이루어냈죠. 물론 정자와 난자는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태어나서 특정한 친구와 우정을 맺은 적이 있지요? 물론 그 친구와도 만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군가 ’와’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물론 이 경우도 여러분은 사랑하는 상대와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발적인 만남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여러분은 바로 현재의 여러분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무한한 만남을 들뢰즈는 ‘……와 ……와……’라는 접속사, 즉 프랑스 말 ‘et’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런 예기치 않았던 사건과의 마주침, 즉 우발적인 만님의 결과물입니다. 결국 여러분이 ‘나는 이러저러한 존재야’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온다고 해서 두 사건 사이에 필연성이 있는 것은 아닌 것과도 같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우리의 존재란 확고 불변한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여러분, 그리고 저 자신은 무한한 우발적인 만남의 결과, ‘……와 ……와……’로 설명될 수 있는 우연한 만남의 효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결코 불안해하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괴로운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지금과는 또 다른 사람, 혹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생성될 수 있다는 축복 말입니다. 앞으로 예기치 못한 우발적인 만남과 사건으로 여러분의 삶이 수놓아질 것입니다. 어찌 보면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책과의 만남도 그리고 저와의 만남도 우리의 삶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 저의 바람이기도 하구요. 여러분과 저와의 만남! 그리고 여러분과 저의 또 다른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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