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된 변증법을 바로 세우려는 맑스
인당수에 심청을 희생물로 바쳤던 뱃사람들, 그리고 비가 오지 않아 절실하게 기우제를 지냈던 고대 중국인들! 이들은 알튀세르가 ‘마주침의 철학’이라고 부른 사유 전통과는 정반대의 길을 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주친 사건의 우발성을 두려워 합니다. 인당수의 휘몰아치는 폭풍우를 두려워하고 끝나지 않을 듯한 가뭄을 몹시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서 그들은 무의미한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점점 몰입합니다. ‘신이 존재하고 계실 거야. 그리고 그 신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거야. 만약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신이 없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다는 걸 의미하는 거야.’ 이렇게 해서 이 세계에는 어떤 마주침도, 사건이란 것도, 우발성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알지는 못하지만 숨겨진 신의 뜻, 신의 의미, 신의 의도가 항상 존재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래서 필연성의 사유를 따르는 사람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전도된 사유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그들은 우발적인 사건과 마주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건에 나름대로의 의미, 즉 필연성을 부여합니다. 최종적으로 그들은 그 필연성이 자신들이 마주친 사건의 원인으로서 사건 이전에 미리 존재하고 있었다고 믿어버립니다. 바로 이 점에서 필연성의 사유는 ‘결과에 입각한 인식’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발적인 사건과 마주친 이후에 자신이 결과를 통해서 그것에 부여한 의미를, 원래 그 사건 속에 미리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신이라는 인격적 주재자의 존재가 설득력을 잃게 되자, 이제 이것을 순수한 필연성이나 근거, 혹은 순수한 의미로서 대치하려는 사유가 출현하게 됩니다. 아마 헤겔의 사변적인 형이상학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신으로 상징되는 과거의 미신적인 뉘앙스가 사라진다고 해서 사정이 나아지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여전히 중요한 것은 마주친 사건의 우발성을 긍정하느냐 혹은 그렇지 않으냐는 문제이니까요.
알튀세르가 말한 ‘마주침의 유물론’, 즉 우발성의 철학은 이제 다시 한번 등장해서 헤겔과 같은 필연성의 철학이 함축하고 있는 허구성을 공격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알튀세르가 정성을 기울인 맑스의 철학이 지닌 중요성입니다. 헤겔은 변증법(dialectics)【변증법은 형식논리와 달리 모순이나 대립을 근본 원리로 하여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려는 논리이다. 형식논리가 모순율, 즉 ‘모순을 피하자’는 원리에 입각해 있다면, 변증법적 논리는 사물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모순과 부정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이제 그가 더 이상은 ‘어린아이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으로 유명한 철학자입니다. 그에게 있어 변증법이란 세상의 모든 사건이 결코 우발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절대정신(Absolute Spirit)이나 이념(ldea) 이 자기 스스로를 실현하기 위해서 전개되는 분명한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인당수의 뱃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헤겔도 이 세계의 모든 사건에는 모종의 필연성이나 숨겨진 질서가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서 맑스【맑스는 프랑스 사회주의 철학, 영국의 경제학, 그리고 독일의 헤겔 좌파 철학을 비판적으로 아우르면서 자신만의 사유를 전개해갔다. 프랑스의 사회주의 철학으로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영국의 경제학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논리를 숙고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 맑스는, 헤겔 좌파의 철학적 사유로부터 자본주의를 개념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철학적 도구를 얻게 된 것이다. 주요 저서로 『자본론』, 『독일이데올로기』 등이 있다】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자본론(Das Kapital)』 서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나의 변증법적 방법은 근본적으로 헤겔의 그것과 다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정반대이다. 헤겔에게 있어서는 그가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자립적인 주체로까지 전화시키고 있는 사유 과정이야말로 현실 세계의 창조 과정이고, 현실 세계는 사유 과정의 외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정반대인데, 이념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이 인간의 두뇌에 반영되어 거기에서 사유의 형태로 변형된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약 30년 전, 헤겔 변증법이 아직 유행하고 있던 그 당시에 헤겔 변증법의 신비화된 측면을 비판했다. 그러나 내가 『자본론』 제1권을 저술하고 있던 때에는, 독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활개치는 불평 많고 거만하고 또 형편없는 아류들이, 일찍이 레싱(Lessing) 시대에 용감한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이 스피노자를 대하듯이, 헤겔을 바로 ‘죽은 개’로 취급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나 자신을 이 위대한 사상가의 제자라고 공언하고 가치론에 관한 장에서 군데군데 헤겔의 특유한 표현 방식을 흉내 내기까지 했다.
변증법이 헤겔의 수중에서 신비화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다름 아닌 헤겔이 처음으로 변증법의 일반적 운동 형태를 포괄적으로 또 의식적으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에게 있어서는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 신비한 껍질 속에 서 있는 합리적인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로 세워야만 한다.
『자본론』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헤겔에게 있어서는 변증법이 거꾸로서 있다”는 맑스의 지적입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지금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이 결과에 입각한 인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헤겔의 변증법을 단순히 ‘정립(=正) → 반정립(=反) → 종합(=合)’의 운동 논리라고 가정해보도록 합시다. 사실 정반합의 삼박자 구조는 헤겔 자신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연구자들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은 ‘즉자 → 대자 → 즉자/대자’라고 하는 정신의 운동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이 외면적으로는 ‘정’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이해되지만, 사실 ‘합’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헤겔의 변증법은 합을 정당화하기 위한 거꾸로 된 사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헤겔은 정과 반으로 이행합니다. 그다음 그는 이 합의 계기가 ‘정’이나 ‘반’ 속에 이미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변증법을 바로 세운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합’이라는 의미가 발생하기 이전에 ‘정’과 ‘반’이라는 차이 나는 두 계기를 그 자체로 사유하자는 것, 나아가 이 두 계기의 마주침을 사유하자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맑스의 변증법은 ‘합’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정’과 ‘반’으로부터 출발하려는 시도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맑스의 바로 세워진 변증법이란 ‘우발성의 변증법’ 혹은 ‘마주침의 변증법’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었겠지요. 맑스의 『자본론』 이란 바로 이렇게 마주침의 변증법에 입각해서 쓰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생산물의 교환은 서로 다른 가족, 부족 또는 공동체가 접촉하게 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문명의 초기에는 사적인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나 부족 등이 독립적인 지위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공동체는 자신들의 자연환경 속에서 서로 다른 생산수단과 생존 수단을 찾아낸다. 따라서 그들의 생산양식과 생활양식은 그들의 생산물만큼이나 서로 다르다. 바로 이렇게 ‘자발적으로 발전한 차이’가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접촉하게 될 때 생산물의 상호 교환을 부추기고 이어서 점차 그 생산물을 상품으로 전환시킨다.
『자본론』
무엇보다 먼저 가족이나 부족이 ‘독립적인 지위’에 입각해서 각자 ‘자발적으로 발전한 차이’를 키워내야만 합니다. 물론 더 나아가 이들 공동체가 어떤 이유에서이든지 어느 순간 반드시 상대방을 서로 만나야만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바로 이런 마주침에 맑스가 바로 세운 변증법의 비밀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독립적으로 유지되던 두 공동체가 만났을 때에만 상품이라는 ‘합’이 출현할 수 있습니다. 만약 두 공동체가 서로 만나지 않았다면, 에피쿠로스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클리나멘’이 촉발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바다 혹은 모래사장에 무의미한 비가 내리듯이 말이죠.
이렇게 본다면 맑스의 사유는 엥겔스(Engels, 1820~1895)나 스탈린(Stalin, 1879~1953)이 생각했던 ‘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사적 유물론, 즉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는 어떤 사회의 구조나 변화의 법칙을 경제구조의 본성과 진화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이런 이해에 따르면 사회 속의 개인들은 자신들을 결정하는 사회적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지, 자신들이 의식적으로 지향하는 이상과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 간주된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됩니다. 사적 유물론이라는 것은 정치나 사회의 변화가 경제적 하부구조가 그대로 이행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니까요. 이 점에서 엥겔스나 스탈린의 사유는 헤겔의 사유를 단순하게 조금 비틀어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헤겔의 절대정신이나 이념이란 것을 단지 경제적 하부구조 정도로 변환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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