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던 카프카
헤겔의 논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가족은 기본적으로 사랑의 객관성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형식일 것입니다. ‘하나’를 추구하는 헤겔의 사랑은 ‘남자-여자-자식’으로 구성되는 ‘가족’을 통해 객관적인 ‘하나’로서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헤겔의 이런 생각이 사랑과 가족에 관한 우리의 일상적인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남녀 사이의 황홀경적인 일체감,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2세 그리고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가족이란 통일체, 이런 일상적인 이해에 따르면 사랑은 가족으로 완성되어야만 하고, 가족은 사랑으로 충만한 ‘하나’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낭만주의적인 가족 이미지 밑에 일종의 억압과 배제의 논리가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카프카(Franz Katka, 1883~1924)【카프카는 자본주의가 발달한 뒤의 인간의 삶에 대한 비관적인 통찰로 유명하다. 그의 비관주의는 유대계 독일인으로서 프라하에 살 수밖에 없었던 경험으로부터 기원한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 법, 가족 등에 대해 낯설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카프카는 그것들이 모두 동일한 억압 기제의 다양한 측면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 작품으로 『변신』, 『소송』, 『성』 등이 있다】라는 위대한 문학자입니다. 그의 여러 소설을 읽다보면, 우리는 일종의 불편한 느낌을 결코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의 여러 작품이 주는 이런 불편함과 낯섦은 바로 ‘하나’의 논리에 대한 그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변신(Die Verschollene)』
그의 유명한 『변신』은 바로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에 자신이 벌레로 변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영업 사원으로서 그는 나머지 세 식구, 즉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을 부양해왔습니다. 그는 이 가족의 유일한 경제원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벌레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한때는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아들이자 오빠였던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한 뒤에도 잠시 동안은 가족의 보살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머지 세 식구는 곧 그레고르를 가족 성원에서 배제하려고 합니다.
“내쫓아버리는 거예요” 하고 누이동생이 말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아버지. ‘저것’이 오빠인 그레고르라고 지금까지 생각하고 계시니까 그러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믿어온 것이 사실은 우리의 불행이었어요.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저것’이 그레고르란 말인가요? 만일 ‘저것’이 그레고르였다면, 인간이 자기와 같은 짐승과는 함께 살지 못한다는 것쯤은 벌써 알았을 거예요. 그래서 스스로 나가버렸을 거예요, 틀림없이. 그렇게만 되었다면 오빠는 없어져도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서 오빠에 대한 추억을 소중히 간직할 수 있었을 텐데.” 『변신』
나머지 식구로부터 그레고르는 이제 아들이자 오빠가 아니라 ‘저것’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그레고르의 추방을 정당화합니다. ‘만약 저것이라고 불리는 벌레가 오빠였다면, 벌레로서 나머지 식구에게 폐를 끼치기 전에 스스로 가족 성원으로부터 탈퇴했을 것이다. 그런데 저것은 식구에게 지금 폐만 끼치고 있다. 따라서 저것은 가족 성원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 추방해야만 한다.’ 벌레로 변해버린 오빠가 스스로 가족을 탈퇴한다면, 오빠에 대한 소중한 추억이나마 간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누이동생은 말합니다. 결국 그레고르는 스스로 나가든지 아니면 식구에 의해 추방되든지 간에 이제 가족 성원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나머지 식구의 추방 선고를 들은 그날 밤 그레고르의 심리 상태를 카프카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는 감동과 애정을 갖고 집안 식구의 일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아마도 누이동생보다 그 자신에게 훨씬 더 강했을 것이다. 이처럼 공허하고 편안한 명상 상태에 있는 그의 귀에 새벽 세 시를 치는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 문득 그의 머리가 저절로 밑으로 푹 수그러졌다. 그리고 콧구멍으로부터 마지막 숨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변신』
이렇게 그레고르는 죽어갑니다. 마지막까지 가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말입니다. 카프카는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하고, 결국 가족에 의해 배제되어 죽어가는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카프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되물으며 『변신』이란 소설을 꼼꼼히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변신』에서 진정으로 변신한 것은 무엇일까?” 잠시 생각에 잠겨본 여러분은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변신한 것은 집안의 기둥에서 집안의 식충으로 바뀐 주인공 그레고르일까요? 아니면 벌레가 된 아들을 보고 어쩔 수 없이 경제생활에 뛰어들어야 했던 아버지일까요? 아니면 공부를 그만둔 여동생일까요? 사실 변신의 주인공은 이 모두 가운데 그 누구도 아닙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모습을 변형시킨 것은 놀랍게도 바로 ‘가족’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카프카는 ‘가족’이란 것을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변형하는 일종의 유기체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가족’은 단순히 사랑하는 남녀, 그리고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자식으로 구성된 결과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족’은 자신 안에 속한 인간들을 지배·통제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거대한 벌레였던 셈입니다. 그레고르가 죽은 후 나머지 세 식구는 전차를 타고 교외로 소풍을 나갑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가족’이란 거대한 벌레는 그들이 그렇게 하게끔 새로운 명령을 하달한 것입니다. ‘가족’은 나머지 세 사람에게 그레고르가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새롭게 불어넣습니다. “전차가 내려야 할 장소에 도착하자 그레고르의 여동생은 제일 먼저 일어나 싱싱한 팔다리를 쭉 뻗었다. 부부의 눈에 그녀의 모습은 그들의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의 보증처럼 느껴졌다.(변신)” 이제 그레고르가 부양했던 ‘가족’은 그레고르 없는 ‘가족’으로, 마치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여동생의 모습을 통해 다시 화려하게 되살아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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