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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 삶을 만나다, 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 1장 사랑 그리고 가족 이데올로기, ‘하나’를 지향했던 헤겔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 삶을 만나다, 제2부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기 - 1장 사랑 그리고 가족 이데올로기, ‘하나’를 지향했던 헤겔

건방진방랑자 2021. 6. 29.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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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지향했던 헤겔

 

 

사랑과 가족에 대한 일상적 이해 방식은 사랑의 완성을 가족을 구성하는 데서 찾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사랑을 결혼이란 형식을 통해서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만약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결혼에 실패하게 된다면, 우리는 두 사람의 사랑이 일종의 미완성, 혹은 비극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사랑과 가족에 대한 이런 일상적 이해를 낯설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헤겔헤겔은 영원한 진리를 추구했던 철학에 역사성, 혹은 시간성을 도입했던 철학자이다. 그는 개인이나 사회도 절대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 변증법적 과정의 결과물이라고 이해했다. 어른이 어린아이의 부정을 전제하는 것처럼 변증법은 부정의 논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변증법은 단순한 방법이 아니라, 생성하는 세계의 본질 자체를 의미했던 것이다. 주요 저서로 정신현상학, 논리학, 법철학 강요등이 있다로부터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의 주장은 매우 난해할 뿐만 아니라 심오하기까지 하다는 상식적인 예상을 깨고, 그는 너무나 친숙한 사랑과 가족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헤겔이 어렵다는 인상은 어쩌면 우리가 그의 철학을 우리 자신의 삶을 통해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헤겔이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직접 들어보도록 하죠.

 

 

사랑은 일반적으로 나와 타자 사이에 통일이 이루어져 있다는 의식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독자성을 포기하고, 나아가 나와 타자 그리고 타자와 나의 통일을 자각함으로써 나의 자기의식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 사랑을 이루는 첫 번째 계기는 내가 오직 나만을 위한 독립적인 인격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스스로를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인간으로 느낀다는 데 있다.

두 번째 계기는 내가 자신을 타자 안에서 발견하고 이 타자 안에서 인정을 얻는다는 것, 그리고 역으로 그 타자도 역시 내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을 얻는다는 데 있다.

법철학 강요(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158[보유]

 

 

헤겔은 말합니다. 사랑은 두 사람의 통일이자, 그것에 대한 의식이라고 말입니다. 사랑 속에서 나는 타자와 하나라는 전체를 이룹니다. 그리고 나는 그 전체 속의 한 부분으로서의 나 자신을 의식하게 됩니다. 결국 헤겔의 말에 따르면 사랑은 기본적으로 하나에 대한 경험이자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어려운 표현인가요? 쉽게 풀어보도록 하죠. 우리가 보통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그 사람과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마치 나의 일부분인 것처럼, 그것도 아주 중요한 부분인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이런 하나라는 느낌에 입각해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세레나데를 부르기 마련입니다. “당신은 나의 영혼이야.”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이야.”

 

그런데 문제는 내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그 타자 역시 나와 마찬가지의 경험을 하고 있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만약 타자가 나와의 관계에서 하나의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내가 느낀 하나의 경험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헤겔의 사랑은 낭만적이지만, 그만큼 또한 유아론적인(solipsistic)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헤겔은 사랑이 함축하는 유아론적 성격을 서둘러 덮어버리려고 합니다. 그가 가족을 도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서의 사랑의 관계는 아직 객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사랑의 감정(Empfindung)이 실체적 통일을 이룬다고는 하지만 이 통일은 아직 아무런 객관성(Gegenständlichkeit)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부모는 자녀를 통해 비로소 이런 객관성을 갖게 되며 또한 바로 자녀를 통해 결합의 전체를 목도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녀를 통해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은 자녀를 통해 아내를 사랑하는 가운데, 마침내 두 사람은 자녀에게서 다름 아닌 그 자신들의 사랑을 직감하는 것이다.

법철학 강요173[보유]

 

 

헤겔의 말처럼 사랑의 감정이 실체적 통일이라고는 하지만, 이 감정에는 아직 어떤 객관성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나라는 감정을 느낀다고 해서, 이것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이 점에서 헤겔은 결국 사랑이 유아론적일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시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는 서둘러 나와 타자 사이에 자녀를 도입하고, 가족이라는 일종의 변증법적 종합의 형태를 제안하게 됩니다. 헤겔의 제안은 사실 지금도 통용되는 방식입니다. 친정어머니는 결혼한 딸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계속 아이를 낳지 않으면 네 남편은 언젠가 바람을 피우게 될 수도 있어. 그래서 아이를 낳지 않은 부부가 이혼하기 쉬운 법이야. 빨리 아이를 낳아. 그래야 부부간의 사랑을 오래 유지할 수 있어.” 분명 결혼한 남녀는 생물학적으로 2세를 낳을 수 있습니다. 헤겔은 이 2세를 바로 사랑의 객관= 대상성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녀(2)를 나와 타자 사이의 사랑이 육화된 존재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에게 있어 자식, 2세는 사랑의 현실화이자 동시에 그것을 매개하는 원리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남자-여자-자식이라는 변증법적 삼각형, 가족; 구조를 통해서 헤겔은 사랑의 유아론적 성격을 근본적으로 탈피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헤겔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당신은 그 아이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과의 관계를 통해 아이를 낳았고 또 그 아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녀가 필연적으로 그 남편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지만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아내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헤겔의 논리는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도입함으로써 부모 쌍방 간의 사랑을 교묘하게 정당화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이 두 남녀 사이의 사랑을 유아론의 위험으로부터 구제해줄 수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헤겔의 기대와는 달리 남녀가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두 사람의 사랑이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족 자체가 사랑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 따라서 헤겔의 사랑이 함축했던 유아론은 가족을 통해서도 결코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그의 사랑, 하나로의 열망과 열정은 쉽게 성공할 수 없는 시도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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