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연암체’
소문의 회오리
물론 고문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은 국왕이 나서서 치른 공공연한 대결의 장이었다 치더라도, 미시적 차원에서의 충돌 또한 그 못지 않았다. 처남 이재성이 쓴 연암의 제문에는 그런 정황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病世爲文 痴矜自古 | 말세의 문인들은 고문을 짓는다고 스스로 뽐내며 |
麤疏是襲 漓餲不吐 | 거칠고 성근 것을 답습하고 껍데기와 찌꺼기를 본뜨면서 |
自附純質 乃極冗腐 | 깨끗하고 질박한 양 착각하나 실은 너절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지요 |
公所醫俗 反招嗔怒 | 공은 이 풍속 고치려다 오히려 사람들의 분노를 샀었지요 |
그리고 그것은 “흡사 위장병 환자가 맛있는 음식을 꺼리는 것과 같고, 눈병 앓는 환자가 아름다운 무늬를 싫어하는 것과 같[如人病胃, 色難濃旨, 如目羞明, 惡見斐亹]”았다고.
과연 그러했다. 환자들이 몸에 이로운 것을 꺼리듯이, 고문파들은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는 문장들을 견디지 못했다. 그리고 그 속내를 들춰보면, 그건 이미 논리와 설득의 차원을 넘어서 이권과 영역을 사수하기 위한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양상을 띠게 된다. 연암에 대한 숱한 비방들은 그런 점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건 연암의 글이 단지 소품체가 아니라는 데 있다. 연암 역시 소품에 능했고, 촌철살인ㆍ포복절도의 짧은 아포리즘(aphorizm)을 즐겨 구사했지만, 그렇다고 연암의 문체적 실험이 소품으로 수렴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소품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문장에 생(生)의 약동하는 기운을 불어넣을 것인가였다. “남을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데면데면하여 우유부단하기만 하다면 이런 글을 대체 어디다 쓰겠는가[不痛不癢, 句節汗漫, 優游不斷, 將焉用哉]?” 말하자면 글이란 읽는 이들을 촉발하는 ‘공명통’이어야 한다. 찬탄이든 증오든 공명을 야기하지 못하는 글은 죽은 것이다.
그의 글이 언제나 거센 회오리를 몰고 다닌 것도 그 때문일 터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1만 길이나 되는 빛이 뻗어나와 가슴을 툭 트이게 한다.” 이런 열렬한 예찬자가 있는가 하면, 격식에 사로잡힌 고문주의자들은 ‘궤변으로 세상을 농락한다’며 격렬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유한준(兪漢雋)과의 악연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유한준은 소싯적에 고문을 본뜬 글을 지어 선배들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은, 한마디로 ‘잘 나가는’ 모범생이었다. 연임에게도 인정을 받고 싶었던지 한 번은 연암에게 자신의 글을 평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연암의 평은 가혹했다. “그대의 문장이 몹시 기이하다 하겠지만, 사물의 명칭이 빌려온 것이 많고 인용한 전기가 적절치 못하니 이 점이 옥의 티라 하겠기에 노형을 위하여 아뢰는 바요. (……) 제왕의 도읍지를 다 ‘장안’이라 칭하고 역대의 삼공(三公)을 다 ‘승상’이라 부른다면, 명칭과 실상이 혼동되면서 도리어 속되고 비루한 표현이 되고 마오[文章儘奇矣. 然名物多借, 引據未襯, 是爲圭瑕. 請爲老兄復之也. (……) 苟使皇居帝都, 皆稱長安, 歷代三公, 盡號丞相, 名實混淆, 還爲俚穢].” 비유하자면 “얼굴 찌푸림을 흉내낸 가짜 서시의 꼴[效顰之西施]”이라는 것.
이 말은 유한준의 글에 대한 평이면서 동시에 고문에 길들여진 문장가들 일반에 대한 신릴한 냉소이기도 하다. 이런 쓰라린 평을 듣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문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글쓰는 이들에게 이런 혹평은 비수와 다를 바 없다. 과연 유한준은 ‘깊은 한’을 품었다. 그 이후 연암에 대한 비방을 일삼았을 뿐 아니라, 말년에는 연암 조부의 묘를 둘러싼 산송(山訟)까지 일으켜 연암과 그의 가족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아들 박종채가 “이 자는 우리 집안과 100대의 원수다[此吾家百世之讎也].”라고 했을 정도니, 이것만으로도 당시 연암이 고문주의자들과 겪었을 전투의 강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연암의 절친한 친구 유언호는 연암을 대신하여 “이 친구는 위선적인 유자(儒者)를 꾸짖으려고 특별히 풍자한 것뿐일세. 나는 자네들이 걸핏하면 힘을 내어 위선적인 유자를 대신해 분노를 터뜨리는 게 늘 이상하다네”라며 비꼬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인물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이처럼 그의 글은 늘 ‘소문의 회오리’를 몰고 다녔다. 그리고 제도권 밖에서 활동했음에도, 그의 글은 언제나 궁궐로 들어가 관각(館閣, 홍문관과 예문각, 문장짓는 일을 맡는 관청)에서 서로 돌려가며 읽혔다. 문체반정이 있기 전 정조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보고서,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왜적 방비에 대해 논함(備倭論)」 등의 글에 대해 “모두 원만하고 좋구나[諸篇皆圓好]”, 그런데 “연암의 문체를 본떴구나[此燕岩體也]”라고 했다 한다. 그만큼 연암의 문체는 그 나름의 특이성을 분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름하여 ‘연암체’! 임금도 그 추이를 주목했을 정도니 시기와 질투가 끊이지 않을밖에.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