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중력에서 벗어나
我服地黃湯 | 내가 지황탕을 마시려는데 |
泡騰沫漲 印我顴顙 | 거품은 솟아나고 방울도 부글부글 그 속에 내 얼굴을 찍어놓았네 |
一泡一我 一沫一吾 | 거품 하나마다 한 사람의 내가 있고 방울 하나에도 한 사람의 내가 있네 |
大泡大我 小沫小吾 | 거품이 크고 보니 내 모습도 커다랗고 방울이 작아지자 내 모습도 조그맣다. |
(中略) | |
我試嚬焉 一齊蹙眉 | 시험 삼아 얼굴을 찡그려보니 일제히 눈썹을 찌푸리누나 |
我試笑焉 一齊解頤 | 어쩌나 보려고 웃어봤더니 모두들 웃음을 터뜨려댄다. |
(中略) | |
斯須器淸 香歇光定 | 이윽고 그릇이 깨끗해지자 향기도 사라지고 빛도 스러져 |
百我千吾 了無聲影 | 백명의 나와 천 명의 나는 마침내 어디에도 자취가 없네 |
咦彼麈公 過去泡沫 | 아아! 저 주공은 지나간 과거의 포말인 게고 |
爲此碑者 現在泡沫 | 이 비석을 만들어 세우는 자는 현재의 포말에 불과한 거라 |
伊今以往 百千歲月 | 이제부터 아마득한 후세에까지 백천의 기나긴 세월의 뒤에 |
讀此文者 未來泡沫 | 이 글을 읽게 될 모든 사람은 오지 않은 미래의 포말인 것을 |
匪我映泡 以泡照泡 | 내가 거품에 비친 것이 아니요 거품이 거품에 비친 것이며 |
匪我映沫 以沫照沫 | 내가 방울에 비친 것이 아니라 방울 위에 방울이 비친 것일세 |
泡沫映滅 何歡何怛 | 포말은 적멸을 비춘 것이니 무엇을 기뻐하며 무엇을 슬퍼하랴 「주공탑명(麈公塔銘)」 |
이것은 주공스님이 입적한 뒤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쓴 탑명이다. 내용이 워낙 파격적이라 가상의 고승을 설정하여 불교를 비판하기 위해 쓴 글이라는 설이 있긴 하나, 일단 그 문제는 접어두고 작품을 있는 그대로 음미하기로 하자. 연암답게 주공도 탑명도 없는 기이한 형식의 글이 되었다. 모든 자취가 포말일진대, 주공의 실체를 찾아 무엇하며 또 무엇을 기린단 말인가? 주공이 포말이듯, 이 글을 쓰는 자신 역시 포말이다. 그리고 후세에 이 글을 읽을 모든 사람 역시 미래의 포말인 것을 선승을 무색케 하는 설법 아닌가.
하지만 이걸 단순히 연암의 뛰어난 테크닉의 소산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삶의 무상성, 이름의 허망함에 대해 연암만큼 깊이 체득한 인물도 드물다. 권력의 포획장치를 계속 무력화시키는 한편, 끊임없이 새로운 경계를 펼치는 삶과 사유의 궤적들,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과 소통하는 강렬도는 ‘무상한 연기(緣起)의 장’ 속에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열정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연암 또한 일종의 구도자였다. 다만 그의 도량(道場)은 깊은 산정이 아니라, 암투가 그치지 않는 중앙정계의 언저리와 왁자지껄한 ‘저잣거리’였다는 점이 달랐을 뿐.
일생 동안 하나의 고정점을 갖지 않은 채, 때론 떠돌면서 때론 고요히 앉은 채로 유목을 했던 연암은 이처럼 이름은 무상한 것이라고, 이름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거듭 말한다. 그의 사유의 핵심범주인 ‘명심(冥心)’은 그러한 탈주체화의 극한이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명심(冥心, 깊고 지극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섬세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지금 내 마부는 말에 밟혀서 뒷수레에 실려 있다. 그래서 결국 말의 재갈을 풀어주고 강물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꼰 채 발을 옹송거리고 앉았다.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건만 아무 근심 없이 자리에서 앉았다 누웠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경지였다.
吾乃今知夫道矣. 冥心者, 耳目不爲之累; 信耳目者, 視聽彌審而彌爲之病焉. 今吾控夫足爲馬所踐則, 載之後車, 遂縱鞚浮河, 攣膝聚足於鞍上, 一墜則河也. 以河爲地, 以河爲衣, 以河爲身, 以河爲性情, 於是心判一墮, 吾耳中遂無河聲. 凡九渡無虞, 如坐臥起居於几席之上.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의 절정이자 대단원이다.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내 몸이라 생각하고, 내 마음이라 생각한다?’ 이 경지는 대체 어떤 것일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에 이렇게 ‘태평’할 수 있으려면 어느 정도의 내공(!)이 필요할까? ‘박차도 없이, 고삐도 없이, 말모가지도 말대가리도 없이’ 광야를 질주하는 ‘인디언의 말 달리기(카프카)’ 같은 것일까? 나로서는 실로 가늠하기 어렵다. 연암에게서 구도의 흔적을 느끼게 되는 건 이런 연유에서다.
아무튼 ‘강물과 하나되어 마침내 강물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은 마음을 청정하게 비움으로써 생사심(生死心)을 벗어나 우주와 내가 하나되는 경지를 뜻한다. 귀와 눈, 곧 감각과 선입견에 사로잡힌 분별심을 벗어나면 집착해야 할 ‘아상(我相)’이 사라지는데, 그러면 대체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그가 여행의 초입구에서 던진 화두, ‘여래의 평등안’과 ‘소경의 눈’ 또한 같은 맥락에 있다.
『열하일기』가 발산하는 강렬도는 바로 ‘이름’의 중력에서 벗어나 무상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성할 수 있는 ‘노마드’적 여정의 산물일 터, 이제 그 ‘천의 고원’을 나오면서 나는 다시 묻는다. 대체 연암은 누구인가? 물론 나는 아직도 그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미래의 포말(泡沫)’인 나에게 그의 묘지명을 쓸 자격이 주어진다면, 나는 다만 이렇게 쓰리라.
“살았노라. 그리고 『열하일기』를 썼노라.”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