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와 마르코스
ARS 퀴즈 하나. 달라이라마와 마르코스(Marx가 아님)의 공통점은?
① 유머로 승부한다.
② 권력이 없다.
③ 지도자다.
힌트 —— 한 사람은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끄는 수장이고, 또 한 사람은 멕시코 라칸도나 정글에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을 지휘하는 부사령관이다. 한 사람의 얼굴은 사방에 알려져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언제나 검은 마스크에 가려져 있다.
답은? ①, ②, ③번, 요약하면 둘 다 권력이 없는 유머러스한 지도자.
근데 이게 말이 되나? 된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정치적 상상력의 배치를 바꿀 것, 자발적 추대에 의해 구성되는 카리스마, 이데올로기가 아닌 직관의 정치, 적대가 아니라 생성에 기초하는 조직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이 두 사람에게는 영토가 없다. 달라이라마는 1년의 반을 세계를 떠돌며 지내고, 마르코스 역시 정글 속 인디언들의 옥수수집을 옮겨 다닌다. ‘언제나 길 위에 있다’는 것, 이거야말로 내가 지구 양끝에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을 오버랩시키는 진정한 이유이다.
사실 연암이 만난 건 달라이라마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달라이라마 다음인 2인자에 해당하는 판첸라마 6세였다.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는 아주 오랫동안 환생을 거듭하면서 티베트고원을 통치해왔다. 환생은 스스로 다음생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윤회와는 차원이 다르다. 「쿤둔」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 신비로운 제도에 대해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건륭제 당시에는 판첸라마 6세가 대보법왕(大寶法王)의 역할을 하던 때였고, 그의 행차는 중국 역사에서도 굉장한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열하에는 지금까지도 그 흔적이 무렷이 남아 있다.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 있는 포탈라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거대한 사원형 궁전 및 판첸라마가 거주했던 찰십륜포(札什倫布), 또 티베트 전통 사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무녕사 등등. 가장 인상적인 건 찰십륜포의 황금전각 위에 새겨진 용의형상. 그것만으로도 건륭제가 판첸라마를 스승으로 떠받들었다는 걸 실감하기에 충분했다.
환생이라는 제도도 그렇지만, 수행방식도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 우리나라에선 삼천배가 통과의례지만, 티베트에서는 기본이 10만배다. 그것도 온몸을 땅에 던지는 오체투지로, 말하자면, 티베트 민족은 일종의 ‘수행기계’인 셈.
따라서 황제가 조선 사신단으로 하여금 판첸라마에게 경배를 드리게 한 것은 일종의 시혜였다. 그러나 사신단에게 그건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만주족도 노린내 난다고 고개를 돌리는 판에 저 변방 야만족의 승려 따위에게 머리를 숙이라니. 가진 거라곤 ‘소중화(小中華) 프라이드’ 밖에 없는 조선인들은 정사(正使)에서 말구종배에 이르기까지 울고 불고 심지어 황제에게 팔뚝질을 해대는 등 갖은 난리부르스를 다 떤다. 하긴, 지금도 한국은 달라이라마의 방문을 허용하지 않는 극소수 국가 중의 하나다. 이것도 전통의 면면한 계승인가?!
하지만 연암은 달랐다. 그에게 판첸라마의 존재는 충격과 감동 그 자체였다. 연암은 마치 ‘봉인된 비의’를 찾아헤매듯 티베트 불교의 역사와 내막을 추적한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묻고, 그리고 기록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열하일기』에는 조선조에 산출된 문서 중 티베트 불교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라는 독특한 이력이 새겨진다. 낯설고 경이로운 매트릭스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는 구도자, 연암!
기묘한 인연의 마주침인가. 그로부터 150년 뒤, 나 또한 달라이라마가 던지는 화두를 끌어안고 불면의 밤을 통과한다. 과연 자비라는 우주적 지혜가 국가의 통치시스템이 될 수 있는가? 구도와 정치가 일치될 수 있는가? 내 신체는 이 물음들을 감당하기에 버겁다. 그러면 내 충혈된 눈을 향해 달라이라마는 천진난만하게 이렇게 되묻는다. “대체 적에게가 아니면 누구에게 자비를 베푼단 말인가?” 설상가상(!)으로 마르코스의 입을 통해 사파티스타의 슬로건이 그 위에 겹쳐진다. “모두에게 모든 것을, 우리에겐 아무것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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