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의 의미?
1. 콘체가 다이아몬드로 번역한 이유
20세기 구미(歐美) 반야경전학의 최고 권위라 할 수 있는 에드워드 콘체(Edward Conze, 1904~1979, 영국에서 출생한 독일인. 맑시즘과 부디즘의 대가)는 『금강경』을 ‘The Diamond Sutra’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금강(金剛)’과 ‘다이아몬드"를 일치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오역(誤譯)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물론 콘체 선생이 이것이 오역인 것을 모르고 그렇게 번역하신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다이아몬드라고 부르는 광물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보편적인 보석으로서 자리잡게 된 것은 대강 19세기 중엽 이후, 즉 1867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오렌지강(江) 상류지역에서 대량의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고부터의 일이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휘광(輝光, Brilliancy), 분산(分散, Dispersion), 섬광(閃光, Scintillation) 등의 전문용어로 불리우는 다이아몬드보석의 찬란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들어간 빛이 하부로 새지 않고 상면으로 다시 나오게 고안된 58면의 브릴리언트 커트(Brilliant Cut)라고 하는 특수 연마방식이 개발된 후의 사건이므로, 그것도 17세기 말 이상을 거슬러 올라갈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그 이전에는 원석의 형태로만 존재했을 것이고, 그 원석의 아름다움은 오늘 우리가 보석에서 느끼는 그러한 느낌을 발할 수가 없었다.
원래 다이아몬드는 성분으로 말하면 흑연(graphite)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단지 양자에 공통된 성분인 카본(carbon)의 원자가 공유결합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흑연은 벌집모양의 6면체 평면결합이 중첩되어 있는 방식인데, 다이아몬드는 정삼각형 4개를 합쳐놓은 것과 같은 정삼각 뿔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원자가 등거리의 4개의 원자와 결합하고 있는 입체적 방식이다. 따라서 흑연이 쉽게 마멸되는 반면, 다이아몬드는 놀라운, 아니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체로서는 가장 강도가 높은, 경성(hardness)을 과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다이아몬드가 형성되는 일차적 조건은 고도의 압력이다. 1955년 제너랄 엘렉트릭에서 1평방인치에 60만~150만 파운드의 압력과, 750℃~2750℃의 고온의 조건을 만들어 다이아몬드를 합성해내는 데 성공하였고, 오늘날은 약 1억캐럿량(量)의 인조다이아몬드가 제조되어 공업용으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자연상태에서 킴벌라이트 암석 속에 들어있는 다이아몬드는 최소한 지하 120km 이상의 깊이의 압력의 조건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것이 대개는 화산폭발시에 지상(地上)으로 밀려나와 형성된 1차 광상(礦床, 파이프 광상)이나 2차 광상(충적沖積광상, 표사漂沙광상)에서 채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희귀한 광물이 역사적으로 인도(印度)에서만이 채취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현존(現存)하는 최고(最古)의 다이아몬드로서 알려진 코이누르(Koh-i-noor)의 역사는 14세기 초로 소급된다. 무굴제국등의 파란만장의 역사를 타고 흘러내려오다가 1849년 영국이 펀잡지방을 병합하면서 획득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코이누르는 191캐럿의 분산광택이 없는 투박한 것이었다. 1852년 그것은 109캐럿의 브릴리언트 커트로 다듬어졌고, 1937년 퀸 엘리자베드(엘리자베드 2세의 엄마)의 대관식 왕관에 박히게 되었다. 인도에는 역사적으로 골콘다(Golconda(지방의 퇴적사토(堆積砂土)에서 다이아몬드가 채취되었다. 그러나 서구문헌에 나오는 다이아몬드가 정확하게 이 인도산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출애굽기」 28장 18절에, 대사제의 법의(法依)인 에봇에 걸치는 가슴받이에 박히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보석이야기가 나오는데, 둘째 줄에 박히는 보석이름에 ‘다이아몬드’가 들어 있다【우리나라 개역판 『성경』은 ‘홍마노(紅瑪瑙)’로 번역하였고 ‘금강석(金剛石)’이라 주를 달아 놓았다】. 물론 이것도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색깔을 중시하여 선정된 어떤 여타 보석류일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우리가 다이아몬드라고 부르는 이름은 ‘adamas’(ἀδάμας)라는, ‘정복할 수 없는 것’(the invincible)이라는 뜻의 희랍어에서 왔다. 하여튼 더이상 없는 강도의 어떤 광물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고대로부터 희미하게 있었던 것은 우리가 상정할 수 있고, 그 근원에는 인도산 다이아몬드가 있었다는 것은 말할 수 있으나, 인류의 고대(古代) 세계에 있어서 다이아몬드가 보편적 개념으로서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은 상정하기 힘들다. 그리고 다이아몬드는 기껏 커봐야 어린애 주먹 이상의 크기는 없고 대강은 아주 좁쌀 같은 작은 것이므로 그것이 어떤 무기나 큰 물체의 이미지로 형상화되기는 어렵다.
『금강경』의 범본제명(梵本題名)은 ‘Vajracchedikā-Prajñāpāramitā-Sūtra’인데 ‘금강’에 해당되는 말은 ‘바즈라(vajra)’이다. 발절라(伐折羅), 발도라(跋闍羅), 발일라(跋日羅), 벌절라(伐折羅), 부일라(嚩日囉) 등의 음역 표기가 한역불전에 나타난다. 그런데 이 ‘바즈라’의 원래 의미는 ‘벼락(thunderbolt)’이다. 벼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기 중에 음전하체와 양전하체 사이에 방전이 생겨 발생한 막대한 에너지가 절연파괴(絶緣破壞, dielectric breakdown: 과도한 전압에 의하여 절연체가 전기를 전함) 현상에 의하여 대기를 타고 땅으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 ‘바즈라’의 일차적 의미는 ‘쩨디까’(cchedikā) 즉, ‘능단(能斷)’(자른다)이다. 사실 『금강경』의 올바른 번역은 『벼락경』 즉 『벽력경(霹靂經)』이 되었어야 하는 것이다. 청천벽력처럼 내려치는 지혜! 그 지혜는 인간의 모든 집착과 무지를 번개처럼 단칼에 내려 자르는 지혜인 것이다. 인도인들의 신화적 상상력 속에서는 ‘벼락’은 인드라신이 휘두르는 원판모양의, 혹은 엑스자모양(X)의 어떤 무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사실 콘체가 ‘금강’을 ‘다이아몬드’로 번역한 것은, ‘다이아몬드’의 현실적 기능이 그 최고도의 경성으로 인하여, 여타의 모든 물체를 자를 수 있다고 하는 이미지, 여타 석물은 다이아몬드를 자를 수 없어도, 다이아몬드는 여타 석물을 자를 수 있다고 하는 성격이 ‘벼락’에 상응한다고 하는 전제하에서 그렇게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나의 무화
애초에 중국인들이 ‘바즈라’를 ‘금강(金剛)’으로 번역한 것은 바로 이 신들이 휘두르는 무기의 이미지에서 온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다이아몬드’가 아닌, ‘가장 강한 쇠’(금중최강金中最剛)라는 의미로 쓴 것이며, 대강 철제(鐵製), 동제(銅製)의 방망이었다. 그것이 바로 ‘금강저(金剛杵)’였고, 이 금강저의 위력은 특히 밀교(密敎)에서 중시되었던 것이다.
현장(玄奘)이나 의정(義淨)은 ‘능단금강반야(能斷金剛般若)’라는 표현을 썼고, 급다(笈多)는 ‘금강능단반야(金剛能斷般若)’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무엇이든지 능히 자를 수 있는 금강과도 같은 지혜’라는 뜻이지만, 돈황(敦煌)의 동남(東南)의 천불동(千佛洞)사원에서 발견된 코오탄어표의 『금강경』은 ‘금강과도 같이 단단한 업(業)과 장애(障礙)를 자를 수 있는 지혜’라는 의미로 제명(題名)을 해석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렇게 되면 ‘능단금강"은 ‘금강과도 같이 자르는’의 의미가 아니라 ‘금강조차 자를 수 있는’의 의미가 되어버린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는 본문의 내용에 그 기준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
그런데 과연 무엇을 자른다는 것인가? 우리는 보통 불교의 교의(敎義)를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라는 사성체(四聖諦)로 요약해서 이해한다. 인생의 모든 것, 우주의 모든 것, 산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다(苦). 그런데 이런 고통은 온갖 집착을 일으키는 인연의 집적에서 오는 것이다(集).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모든 집착을 끊어 버려야 하고(滅), 그 끊는 데는 방법이 있다(道). 고(苦)는 오인(吾人)의 소지(所知)요, 집(集)은 오인(吾人)의 소단(所斷)이며, 멸(滅)은 오인(吾人)의 소증이요, 도(道)는 오인의 소수(所修)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고통의 원인으로서 발생하는 모든 집착을 끊어 버리면 과연 나는 열반에 드는 것일까? 내가 산다고 하는 것! 우선 잘 먹어야 하고(식食), 색(色)의 욕망도 충족되어야 하고, 학교도 좋은 학교에 가야 하고, 좋은 회사도 취직해야 하겠고, 사장도 되어야겠고, 교수가 되어 훌륭한 학문도 이루어야겠고, 결혼도 잘해야겠고, 자식도 훌륭하게 키워야겠고, 자선사업도 해야겠고, 죽을 때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죽어 후세에 이름도 남겨야겠고, 자아! 인생의 집연(集緣)을 들기로 한다면 끝이 없는 품목이 나열될 것이다. 자아! 이제부터 하나 둘씩 끊어보자!
『금강경』을 공부했으니, 자아! ‘반소사음수(飯疏食飮水)’로 만족하고, 색골 같은 환상도 다 끊어버리고, 좋은 학교 갈 욕심도 끊고, 회사 취직할 생각도 말고, 사장 따위 외형적 자리에 연연치 않고, 학문의 욕심도 버리고, 결혼할 생각도 아니하고 정남정녀로 늙고, 다 벼락을 치듯 끊어버리자! 이것이 과연 지혜로운 일인가? 벼락은 과연 어디에 내려쳐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흔히 불교의 교의를 ‘집착을 끊는다’(멸집滅執)는 것을 핵심으로 알고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좁은 소견에서 나온 망견(妄見)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을 초연히 사는 척, 개량한복이나 입고 거드름 피우며 초야에서 어슬렁거리는 미직직한 인간들을 세간(世間) 불자(佛子)의 진면(眞面)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기만적인 망동(妄動)이 없는 것이다. 벼락은 나의 존재를 둘러싼 대상세계에 대한 집착의 고리에 내리쳐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금강의 벽력은 곧 나의 존재 그 자체에 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벼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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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 집착 |
대상 |
〈제1도, 보통사람들의 멸집에 대한 생각)
벼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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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 집착 |
대상 |
〈제2도, 『금강경』이 말하는 멸집)
제1도에서는 벼락이 집착의 고리를 끊어도 ‘나’가 여전히 존재하며 또 대상이란 실체가 엄존한다. 단지 그 고리가 끊겼을 뿐이다. 그러나 이 고리는 항상 다시 이어짐을 반복할 뿐이다. 제2도에서는 벼락은 집착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떨어진다. ‘나’가 무화(無化)되고 공화(空化)된다. 나가 없어지면, 곧 대상도 사라지고, 집착이라는 고리도 존재할 자리를 잃는다. 바로 여기에 소위 소승과 대승이라고 하는 새로운 불교 이해의 기준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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