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金剛般若波羅蜜多經, Vajracchedikā-Prajñāpāramitā-Sūtra)
요진 천축삼장 구마라집역(姚秦 天竺三藏 鳩摩羅什譯)
무술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戊戌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법회의 말미암음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1-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 고독원에 계셨는데, 큰 비구들 천이백오십인과 더불어 계시었다.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여시아문. 일시, 불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
여시아문(如是我聞)과 일시(一時)
제일 먼저 소명태자가 나눈 분(分)의 이름을 설(說)하겠다. 소명태자의 분명(分名)은 글자수를 모두 네 글자로 맞추었다. 따라서 문법적으로 약간의 무리가 있는 상황도 있다. 인(因)과 유(由)는 같은 뜻의 반복일 뿐이다. 둘 다 ‘말미암다’는 뜻이다. 따라서 ‘법회인유(法會因由)’란 법회(法會)가 일어나게 된 상황의 설명 정도로 번역하면 그 뜻이 명료하게 될 것이다.
다음 ‘1-1’ 식으로 번호가 매겨져 있는 것은 내가 최초로 시도하는 장절(章節)의 구분이다. 『성경』도 장절이 있어 인용에 편리하듯이, 우리 불경도 이렇게 장절번호가 매겨지면 아주 활용에 편리하다. 앞의 번호는 소명태자의 분단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하이픈 뒤의 번호는 전통적 구분을 참고하여 내가 최초로 다시 문의의 흐름에 따라 매긴 것이다. ‘1-1’은 ‘1장 1절’ 혹은 ‘1분(分) 1절(節)’에 해당되는 기호라 생각하면 된다.
‘여시아문(如是我聞)’은 ‘에밤 마야 슈루땀(evaṃ mayā śrutam)’이라는 초기원시경전의 정형화된 표현의 한역이다. 『금강경』은 부처님과 장로(長老) 수보리 사이에서 일어난 문답의 형식이다. 그러나 물론 여기서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아(我)’는 수보리가 아닌 수보리와 부처님 사이의 대화를 목격하고 기술한 제3자일 수밖에 없다. 전통적으로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아(我)’는 아난(阿難) 존자로 여겨지고 있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어도, 부처님의 십대(十大)제자의 일인(一人)인 아난(阿難, Ānanda)은 귀가 밝아 잘 듣고 또 기억력이 탁월한 것으로 유명해 ‘다문제일(多聞第一)’로 꼽히었고, 석존(釋尊)의 멸후(滅後), 왕사성(王舍城)의 불전제일결집(佛典第一結集, 544 BC ?) 때 경전송출(經典誦出)의 위대한 역량을 발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마 이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고 한 것은 곧 아난 자신이 나의 날조가 아닌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 기억하여 송출(誦出)한다고 하는, 그 객관성과 오리지날리티를 높이기 위한 표현인 것이다. ‘결집(結集)’이란 ‘삼기티(saṃgīti)’를 말하는데, 그것은 ‘더불어 같이 노래 부른다’의 뜻이다. 오백결집(五百結集) 때의 장관을 우리는 상상해 볼 수 있다.
육조(六祖)가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아(我)를 추상화시켜 “아(我)는 성(性)이요, 성(性)은 곧 아(我)다. 내외동작(內外動作)이 다 성(性)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니, 일체(一切)를 다 듣는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아(我)가 듣는다(아문我聞)라고 한 것이다[我者, 性也. 性卽我也. 內外動作, 皆由於性, 一切盡聞, 故稱我聞也].”라고 해(解)한 것은 참으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잡설에 불과하다. 아무리 그것이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원의의 소박한 뜻에 위배하여 애써 현묘해지려고 노력하는 소치는 참으로 구역질나는 것이다. 야보(治父)의 송(頌)도 때로 번뜩이는 기지가 엿보인다 해도 참고의 가치가 없다. 내가 『금강경』을 선(禪)으로 접근해서는 아니 된다 함이 바로 이런 뜻이다. 『벽암록」을 해석하는 식으로 『금강경』을 설(說)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야보(治父), 종경(宗鏡), 함허(涵虛)의 주해가 모두 이렇게 무원(務遠)하여 망이(忘邇)하고, 측미(測微)하여 유현(遺顯)하는 말폐에 빠져 있으니 어찌 그러한 말폐를 취하리오?
세조본에는 ‘여시아문(如是我間聞’이 ‘이 같음을 내 듣자오니’로 되어 있다. 아름다운 우리말 옛 표현이다.
‘일시(一時)’의 해석에 관해서도 승조(僧肇)는 그것이 반야시(般若時)라 하고[一時者, 說此般若時也], 이문회(李文會)는 설법의 이치가 상황에 맞아 감응이 일어나고 도(道)가 교감되는 때[一時者, 謂說理契機感應道交之時也]라 하고 야보도천(治父道川)은 그 ‘일(一)’을 ‘건곤이 혼돈하여 나뉘기 전’이니 운운하며 아주 현묘(玄妙)하게 해석하고 있으나 이 모두가 그릇된 해석이다. ‘일시(一時)’는 ‘한 때’ ‘어느 때’ ‘at one time’이란 아주 일상적인 소박한 뜻 외에는 아무 뜻도 없다. 불특정한 시점을 가리키는 말일 뿐이다.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일시(一時, ekasmin samaye)’가 의미상으로 뒤로 붙지 않고 위로 붙는다. 그렇다면 ‘일시(一時)’는 ‘한 때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가 된다. 콘체의 번역은 그렇게 되어 있다: “Thus have I heard at one time.”
사위국(舍衛國)과 서라벌(徐羅伐)
‘불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佛在舍衛國孤樹給孤獨園)’이란 문장은 정확한 사실적 고증과 역사적 상황에 대한 상상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내가 생각키에는 여기서 말하는 ‘사위국(舍衛國)’은 곧이어 뒤에 나오는 ‘사위대성(舍衛大城)’과 구분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분명 국(國)과 성(城)은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성(城)은 국(國) 속에 있는 성곽도시의 개념이다. 사위국(舍衛國)은 여기서는 바로 코살라왕국을 가리킨다. 역사적 붓다가 소속해 있던 샤캬종족의 카필라바쯔는 작은 종족(tribe) 단위의 종족집단정치체제였고, 그것은 보다 거대한 집단인 부족(部族, clan)에 속해 있었다. 당대의 부족은 큰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전제군주체제인 왕국(王國)과 ‘상가’ 혹은 ‘가나’라고 불리우는 공화제의 두 종류의 국가형태가 공존하고 있었다. 샤캬종족이 속해 있던 코살라왕국은 전제군주체제의 나라였다.
코살라왕국은 남북(南北)의 두나라로 형성되어 있는데, 보통 북코살라왕국은 그냥 코살라왕국이라 칭하고 남코살라왕국을 남코살라왕국이라 칭하는데,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에 보면, 남(南)을 그냥 ‘교살라국(憍薩羅國)’이라 하고, 북(北)을 ‘실라벌실저국(室羅伐悉底國, Śrāvastī) 즉 사위국(舍衛國)이라 하고 있다. 바로 여기의 사위국(舍衛國)이라 한 것은 북코살라왕국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위성(舍衛城)’ 즉 슈라바스띠(Śrāvastī)는 바로 북코살라왕국의 수도이다. ‘사위(舍衛)’라는 음역은 슈라바스띠의 쁘라끄리트(Prākrit, 통속어) 어형(語形)인, ‘Śāvatth’에서 유래된 것이다. 사위국(舍衛國)이라는 표현은 그 왕국(王國)의 수도인 사위성(舍衛城)의 확대개념으로 생겨난 것이다. 대한민국을 그냥 ‘서울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그런데 여기 아주 기묘한 일치가 있다. ‘사위(舍衛)’를 현장(玄奘)은 산스크리트 원어에 충실하여 ‘실라벌(室羅伐)’이라고 음역하였다. 우리는 이 ‘실라벌’이라는 음역을 접하는 순간 바로 우리나라 옛 국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등으로 표기되는 음에서 유래된 ‘신라’라는 국명은 바로 ‘부처님이 계셨던 나라의 수도’의 이름, 슈라바스띠(Śrāvastī)에서 온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이 바로 이 ‘서벌’에서 온 것임을 생각할 때, 우리나라 현재 수도의 이름도 각자(覺者)가 설법하신 장소의 이름과 관련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s’발음이 ‘sh’ 발음이 나고, ‘v’ 발음이 ‘위’ 발음이 난다는 것을 생각하면 서벌의 원음은 ‘셔월’이고 그것이 ‘서울’이 된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렸을 때 국민학교 교과서에서 처음 접한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도 바로 인도의 대표적인 지혜설화이며, 『수궁가』 『별주부전』의 이름으로 애창되는 판소리, 『토끼전』의 이야기도 인도의 설화가 불교를 통해 전래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다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인도문화와 우리문화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가깝게 소통되어온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기원정사(祇園精舍)
붓다 당대의 코살라왕국의 군주는 파사익왕(波斯匿王), 즉 쁘라세나지뜨(Prasenajit)였다. 설화적인 이야기겠지만, 파사익왕은 싯달타와 생년월일이 같다 하고, 또 싯달타가 성불한 해에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성불한 싯달타를 만나는 순간 그에게 감화를 입어 독실한 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념적으로 보나, 정치적 관계로 보나 이 두 사람은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복자가 피정복자에게 정신적으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붓다의 인격의 위대성과 함께, 그 위대함을 위대함으로 인지할 줄 아는 당대의 통치자들의 큰마음을 엿볼 수 있다. 파사익왕은 초기승가의 절대적인 외호자(外護者)였다. 바로 파사익왕은 국도(國都)인 슈라바스띠(사위성)에서 살고 있었다.
파사익왕에게 태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제뜨리(Jetṛ), 한역하면 ‘기타(祇陀)’가 된다. ‘제뜨리’라는 말은 원래 ‘전쟁에서 이긴 사람(전승자, 戰勝者)’의 뜻이다. 속어적 표현에서는, 합성어(合成語) 속에서 ‘Jeta(제따)’가 된다. 기타(祇陀)는 Jeta의 번역이다.
최근에 미국의 한 세대를 풍미한 『스타워즈』라는 영화 속에 ‘제다이’라는 전사들이 나오는데, 이 제다이는 바로 파사익왕의 태자인 제다(제따)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전승자(戰勝者)의 이미지와 기원(祇園)의 성스러운 불교적 이미지가 제다이의 모티브를 구성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의 영향은 우리 삶의 곳곳에 숨어 있다.
초기 승가에게는 집단거주의 장소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장소를 물색했다. 그 장소는 번화한 도시 한복판에 있을 수 없고 또 도시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안된다. 한복판에서는 수도(修道)의 분위기가 저해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걸식(乞食)’이 어렵다. 드디어 그들은 부유한 서울도시, 슈라바스띠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교외의 한적한 곳에 명상적 삶에 최적한 아름다운 숲이 있는 한 곳을 발견했다.
슈라바스띠에는 수달(須達, 혹은 수달다須達多, Sudatta)이라는 부상(富商)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돈이 많았지만 항상 빈곤하고 고독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보시를 했기 때문에 그는 보통 ‘급고독(給孤獨)의 장자(長者, anātha-piṇḍada)라는 존경스러움을 표하는 별명으로 불리워졌다. 이 급고독의 장자, 수달은 초기승단에 속해 있었고 부처님 공양을 지극히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이 원하는 그 아름다운 땅을 인류사상 최초의 가람을 지을 곳으로 지목해놓고 그 땅 임자를 알아보았다. 그랬더니 그곳이 바로 쁘라세나지뜨(파사익)왕의 아들 제따 태자의 소유지임을 알게 되었다. ‘기수(祇樹)’의 원어는 ‘Jetavana’인데, 祇(기)는 제따의 음역이고 樹(수)는 바나 즉 숲의 의역이다. 음역과 의역의 합성어로서 기수(祇樹)는 ‘제따 태자의 숲’이란 뜻이다. 수달은 곧 이 기수(祇樹)를 매입하기 위해서 제따 태자를 찾아갔다.
수달은 제따에게 그 땅을 팔라고 간청을 했으나 제따는 절대 그 땅을 팔 수 없다고 했다. 제따 태자는 참으로 그 아름다운 숲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간청을 해도 협상이 결렬되고 말았다. 그래서 풀이 죽어 돌아서는 수달에게 제따는 농을 던졌다:
“기수(祇樹) 땅 전체가 보이지 않도록 금(金)이라도 깐다면!”
그 순간, 수달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면했다. 수달장자는 곧바로 집으로 달려와서, 즉시 금은보화가 가득한 창고를 열어제켰다. 그리고 금을 기수땅 전체에 깔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자는 놀라서 헐레벌떡 달려왔다. 금 까는 대공사를 벌이고 있는 수달에게:
“아이 참! 아까 말은 농담이었는데!”
수달은 진지한 표정을 하고 태자에게 말했다.
“이 나라를 이끌어가실 태자님께서 어찌 망언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기수땅을 곧 금으로 남김없이 휘덮겠습니다.”
이 순간 태자는 수달의 그 진지한 얼굴에 감복되었다. 그리고 수달이라는 부호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서슴치 않게 만든 붓다라는 사람의 위대한 감화력에 충격을 받았다.
“아하! 부처님이야말로 위대한 땅(양전, 良田)이시군요. 정말 그 땅에 위대한 나무가 클 수 있는 씨앗을 심을 수 있다면 난들 어찌 이 땅을 안 내놓겠습니까?”
태자(太子) 제따와 장자(長子) 수달은 진지하게 상의하기 시작했다. 이미 약속대로 그 땅은 수달에게 넘어갔으니, 그 땅은 수달이 부처님께 봉시(奉施)하고, 그 땅에 있는 아름다운 나무들은 태자(太子) 제따가 봉시(奉施)하고, 그 땅에 깔린 금을 거두어 정사(精舍)를 건립하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이로써 인류사상 최초의 불교가람이라 할 수 있는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國)’이 탄생된 것이다. 급고독원(給孤獨國)이란 곧 급고독(給孤獨)의 장자(長者) 수달(須達)이 보시한 원(園)이란 뜻이다. 이 ‘기수급고독원’의 앞글자와 뒷글자를 따서 보통 ‘기원(祇園)’이라 하기도 하고 거기에 건립된 사찰 이름까지 합쳐 ‘기원정사(祇園精舍)’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초기승단의 최초의 확실한 거점이었으며, 부처님의 위대한 설법의 대부분이 바로 이 기원정사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역사적 싯달타의 가장 오랜 안거처(安居處)였으며 불교의 대부분의 초기경전이 바로 이 기원정사를 무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은 『대반열반경(大般涅樂經)』 제29(第二十九), 『오분률(五分律)』 제25(第二十五) 등에 보이는 이야기를 내가 다듬은 것이다. 물론 설화적 요소를 다분히 내포하지만 역사적 진실성을 내포하는 초기승단의 스토리라 할 수 있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돈이란 돈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돈으로 무엇을 하느냐에만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오늘날의 부자들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속성 때문에 그러하기도 하겠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만 돈을 번다. 돈을 벌어서 또 돈을 버는 데만 열중한다. 그들의 돈을 버는 노력이 아무리 진실한 것이라 하더래도 오직 돈을 벌기 위한 진실이라면 그 진실은 아무런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돈이라는 허상(虛像)에만 매달리는 것이다. 돈의 확대재생산은 필요불가결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돈을 기원(祇園)에 까는 가치로 환원시키는 자세가 바로 그 사회의 돈을 만들어 내는 힘이 된다는 것을 우리사회의 부자들은 깊게 깨닫고 있지를 못하다. 미국의 부호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도, 미국 47개 주와 여타 국가에 거대한 도서관 3천여 개를 지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러한 공력이 오늘의 미국의 힘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도올서원과도 같이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사설교육기관은 한 푼 두 푼에 허덕여도 그 서원마루에 황금 한 돈이라도 깔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으나, 라스포사(옷 로비)의 터무니없는 비싼 옷들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고 있는 우리사회의 가치관을 반추해 볼 때, 이 초기승단의 이야기는 오늘 교회나 사찰에 연보돈이 푹푹 쌓이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오분률(五分律)』에 의하면, 기원정사는 경행처(經行處), 강당(講堂), 온실(溫室), 식당(食堂), 주방(廚房), 욕사(浴舍) 및 제방사(諸房舍)가 있었다고 하고, 남방소전(南方所傳)에 의하면, 이 외로도 창고, 측간, 우물, 연꽃 피는 연못, 병실(病室)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사의 중앙에 불전(佛殿)에 해당되는 향실(香室, gandhakuṭī)이 조영(造營)되었고【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의 상황이니까 부처님을 모신 법당(法堂)이나 대웅전(大雄殿)류의 건물은 있을 리 없다】 그 주위에 80개의 소방(小房)이 지어져 있었다고 하니 제따 숲의 향기와 더불어 그 아름다운 장관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후대의 일이지만 아육왕(阿育王)도 친히 이 기원정사를 방문하여 사리불(舍利弗), 목건련(目犍連), 가섭(迦葉), 바구라(婆駒羅, Dvākula)【박구라(薄拘羅)로 쓰기도 한다. 무병제일(無病第一), 장수제일(長壽第一)로 유명】, 아난(阿難) 등의 제대제자(諸大弟子)의 탑을 건립했다고 전한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는 현장(玄奘)이 이 기원정사를 방문한 기록이 있으나, 그때만 해도 이미 폐허(廢墟)가 되어버리고 동문(東門)의 좌우(左右)에 석주(石柱)만 남아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원정사의 유적은 1863년 영국의 고고학자 커닝햄경(Sir Alexander Cunningham, 1814~1893)에 의하여 발굴되었는데, 그곳은 현금의 네팔 남경(南境)에 가까운 라쁘띠(Rapti) 하(河)의 남안(南岸), 웃따라 쁘라데쉬 주(州)의 사헤드(Sāhet)와 마헤뜨(Māhet)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헤뜨는 누벽(壘壁)으로 둘러싸인 성곽(城廓)도시며 그곳이 바로 사위성의 중심거리로 추정되며, 그 성(城)밖으로 서남쪽 약 1km지점에 사헤뜨가 위치하고 있는데 여기가 바로 기원정사의 유적지로 간주되고 있다. 남북 350m, 동서 240m에 이르는 유적지이다. 기원정사의 규모를 생각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기수급고독원(기원)은 사위성 성밖 서남쪽 1km 떨어진 숲에 한가롭게 자리잡고 있었고 여기서 바로 이 『금강경』의 대설법이 이루어진 역사적 정황을 리얼하게 머릿 속에 그려볼 수 있다.
방편설법과 대비구(大比丘)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에서 앞의 ‘여(與)’는 우리말의 ‘~과’에 해당되는 전치사이다. ‘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은 그 전치사의 목적이며, 맨 끝의 ‘구(俱)’가 본동사이다. ‘구(俱)’는 ‘더불어 계시었다.’ ‘같이 생활하였다’는 의미이다. ‘중(衆)’은 여기서는 우리말의 ‘들’에 해당되는 복수격일 뿐이다. ‘대(大)’는 산스크리트 원전의 문맥으로 비추어볼 때, ‘아주 훌륭한 인격을 갖춘’, ‘득도(得道)의 깊이가 있는’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 훌륭한 비구들 1,250인)’이라는 말은 좀 깊은 통찰을 요구한다.
『금강경』의 설법의 내용은 불교적 진리의 최고봉의 간략한 통찰이다. 『화엄경』 같은 장편의 서사시가 깊은 계곡과 봉우리의 모든 세세한 장면을 장엄하게 다 훑고 있다고 한다면, 『금강경』은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건너뛰는 소략하고 담박한 시경(詩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경(詩境)은 설(說)한다 해도 아무나 쉽게 알아들을 수가 없다. 사실 반야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이미 고도의 혜지(慧智)를 체득(體得)한 자들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반야심경』을 염불하면서 우리 불교도들이 나날이 줄줄 암송하고 있는 구절들을 한번 상고해보라!
是故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乃至無意識界.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무의식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오온설(五蘊說)도 부정되며, 육근(六根)도 부정되며, 육경(六境)도 부정되며, 육식(六識)도 부정되며,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도 부정되며, 그 유전문(流轉門)도 부정되며, 그 환멸문(還滅門)도 부정되며, 뿐만 아니라 불교(佛敎)의 가장 근본 요체인 사성체(四聖諦)도 부정된다. 지혜(智慧) 반야설도 부정되며 일체의 ‘깨달음’이라는 것도 부정된다.
자아! 이렇게 되면 『반야심경』처럼 지독한 반불교적(反佛敎的) 이단설(異端說)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불교의 기본교리를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깡그리 쳐부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반야사상은 불교사상인가? 반불교사상인가?
학생들이 방만한 나의 저술을 여기저기 읽다, 여러 군데서 같은 논조가 정반대로 되어 있는 것들을 적어가지고 와서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나에게 지적하고 항의하곤 하는 사태를 나는 종종 경험한다. 이때 나는 미소지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소위 ‘방편설법’이라는 것을 깨닫기에는 너무 어린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방편설법’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 방편이란, 그 설법이 이루어지는 대상과 상황에 맞추어 ‘수단적으로’ 변주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방면’이란 ‘융통성’이나 ‘변통’의 의미가 되겠지만 그렇게 상식적인 의미의 타협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방편(方便)이란 ‘upāya’라고 부르는 것으로 ‘접근한다.’ ‘도달한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이다. 즉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여러가지 교화의 방법, 선교(善巧)의 수단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실(眞實)’ ‘진여(眞如)’ ‘진리(眞理)’ 즉 ‘tathatā’에 대응하는 말로서, 있는 그대로의 진리(yathā-bhūta)에 도달하기 위한 길을 말하는 것이다. 불교를 긍정하는 부정하든 그것은 불교 이전의 어떤 진여(眞如)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종교는 교리가 아니라고 한 나의 서언(序言)을 한 번 다시 상기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반야사상은 지독하게 반불교적 사상(anti-Buddhistic thought)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기에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자들을 불교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가장 큰 맹점은 바로 기독교 교리 자내에 반(反)기독교논리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단지 정통과 이단의 판별의 역사가 되어버릴 뿐이다. 크라이스트(Christ)나 안타이 크라이스트(anti-Christ)나, 기독이나 반(反) 기독이나, 결국 알고보면 동일한 방편(方便)이라는 것을 기독교의 위대한 신학자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 근본 맹점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고도의 지혜는 아무에게나 설파될 수 없다. 초심자가 반야의 사상을 접하면 악취공(惡取空)에 빠져버리고 말 뿐이다. 함부로 선(禪)을 말하는 우리나라 스님들의 말폐가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선은 불교의 최종진리다. 어찌 초심의 어린아이들이 선을 완롱(玩弄)하는가?
우리말에 ‘귀명창’이란 말이 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 송만갑과 같은 위대한 판소리명창이 생겨나지 않는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이미 우리사회에 귀명창이 없기 때문이다. 판소리를 깊게 흔상(欣賞)할 수 있는 귀를 가진 대중이 형성되어 있질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소리명창은 귀명창이 있어야만 탄생되는 것이다. 아무리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부처님의 명강의는, 그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대중이 확보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나도 요즈음 대학에 가서 강의를 해보면, 피곤함만을 느끼고 별 보람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학생들의 질이 저하되어 있는 것이다. 학생들의 수업태도가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고 분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올서원에서 강의를 하면 너무도 강의가 술술술술 풀어진다. 마음의 깊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우수한 학생들이 전국에서 선발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이 내 강의를 들으러 발심(發心)을 일으켜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 왔다는 데 있다. 그들은 내 말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중하는 진지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내 말을 한 마디라도 더 안들을까 하고 궁리하고 있는 대학가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진지하고 장엄한 분위기가 도올서원을 육중하게 누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 ‘큰 비구들 1,250명과 같이 있었다’라고 한 표현은, 부처님이 최고의 지혜를 설법하실 수 있는 특수한 귀명창들의 자리가, 그 마당, 그 분위기가 마련되었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금강반야의 지혜가 설파된 장엄한 자리는 전문적인 불법의 소양을 갖춘, 그리고 출가하여 오랜 수도를 한 큰 비구스님들 1,250명을 청중으로 해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나의 해석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다른 견해가 성립할 수도 있다는데 금강경 강론의 오묘한 성격이 존(存)하는 것이다.
1,250명에 대해
우선 큰 비구들 1,250명이라는 숫자부터 문제다. 왜 하필 1,250명인가? 그런데 이런 질문에 대해 역대주석가들의 신통한 논의가 별로 없다. 원시불교 교단의 구성멤버의 수로서 관념적으로 그 숫자를 구성해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상식으로 비추어, 해인사나 송광사 같은 대찰의 규모에 비견해보아도, 큰 비구스님들 1,250명이라는 숫자는 좀 과장된 표현으로 보인다. 기원정사의 규모로 볼 때 도저히 1,250명의 스님들을 한자리에 수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초기승가의 규모가 큰 스님 1,250명 정도가 한자리에 모일 만큼의 체제를 갖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기원정사 본당이 7층짜리 건물이었고, 또 오늘 발굴된 기단의 주춧돌의 규모로 미루어 굉장(宏壯)한 가람의 모습이 헤아려지고 따라서 그런 인원을 수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반론은 아무리 『금강경』의 설법이 고도의 반야지혜라고 하지만 꼭 선정된 남자 비구승 1,250명이 엄숙하게 앉아 있는 자리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보살대승운동이 성공한 이유는 승단내부의 자기반성으로부터 일어났기 때문이었지만, 그것보다는 본질적으로 광범한 재가 신도들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초기승가의 모습은 오늘날의 절깐에서 보여지는 비구일색의 전문화된 집단이었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부대중(四部大衆)의 화합중(和合衆)이었다. 즉 출가자(出家者)와 재가자(在家者)의 공용적(功用的) 구분은 있을지라도 수도(修道)나 득도(得道)의 경지에 있어 엄격한 서열이나 차별이 있는 그런 집단이 아니었다. 따라서 『금강경』이 설하여진 마당이 큰 비구들 1,250명만의 자리이었다고 하는 것은 『금강경』의 혁신적이고 민중적이고 반아라한적인 성격을 비구의 엘리티즘으로 귀속시키는 병폐를 조장시킬 우려가 있다.
더구나 이 『금강경』 32분(分)이 한자리에서 한나절에 이루어진 짧은 내용이라고 할 때, 그 통일성을 생각한다면 이 설법이 끝나는 장면을 묘사한 제32분에 ‘불설시경이(佛說是經已), 장로수보리(長老須菩提), 급제비구비구니우바색우바이(及諸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夷), 일체세간천인아수라(一切世間天人阿修羅), 문불소설(聞佛所說), 개대환희(皆大歡喜),’ 운운한 것을 보면 애초부터 이 자리에는 비구ㆍ비구니ㆍ재가 신사(信士)ㆍ신녀(信女)가 모두 참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산스크리트 원본에는 분명히 ‘천이백오십인의 많은 비구(比丘, bhikṣu)들과 많은 구도자(求道者)ㆍ뛰어난 사람들과 함께’로 되어 있다. 여기 구도자(求道者)는 원어로 ‘bodhisattva’이며 바로 ‘보살(菩薩)’의 의역이다. 한역경전에서는 ‘대사(大士)’, ‘개사(開士)’로도 의역된다. 여기 ‘뛰어난 사람들’이란 ‘mahāsattva’이며 이것은 ‘마하살(摩訶薩)’로 음역되며, ‘대중생(大衆生)’ ‘대유정(大有情)’으로 의역된다. 꾸마라지바 역본에서 ‘보살’에 해당되는 곳에 현장(玄奘)은 항상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은 바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보편주의를 강조하는 어법인 것이다. 보살(깨달음을 추구하는 자)은 곧 마하살(摩訶薩, 훌륭한 사람)이요, 마하살은 곧 보살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1,250명의 비구들과 함께 부처님께서 금강의 지혜를 설(說)하는 자리에 같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라집(羅什)은 이 후절을 번역에서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이다. 아마도 중국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또 승려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또 도입부 드라마의 그림의 순결성을 위해서, 라집(羅什)은 그런 번역을 선호했을 것이다. 이러한 라집(羅什)의 번역은 현장본(玄奘本)에까지 5종의 모든 번역에 공통된다. 그런데 최후의 역자인 성당(盛唐)의 의정(義淨)은 ‘여대필추중천이백오십인구(與大苾芻衆千二百五十人俱, 급대보살중及大菩薩衆)’이라 하여 산스크리트 원문에 가깝게 바로 잡았다【‘필추’는 ‘비구’의 다른 음역】.
라집과 산스크리트원본
금세기 일본의 대불교학자라 할 수 있는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1912~1999)【동경대학 인도철학과 중심으로 활약】는 역으로 의정(義淨) 외의 타5본(他五本)에 보살ㆍ마하살이 없으므로 범본의 ‘보살ㆍ마하살’ 부분이 후대의 첨가라고 못박았다. 나카무라의 이와 같은 생각은 『금강경』 전체 텍스트와 그 전체 의미를 고려하지 못하고 부분만을 천착한 데서 생겨난 명백한 단견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이기영은 이 단견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한국불교연구원(韓國佛敎硏究院)에서 나온 이기영(李箕永) 번역(飜譯)ㆍ해설(解說)의 『반야심경』ㆍ『금강경』(1978 초판, 1997 개정판)은 일본 불교학계의 거장,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ㆍ키노 카즈요시(紀野一義) 역주(譯註)의 『반야심경(般若心經)』ㆍ『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일서를 거의 그 체제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실제적으로 나카무라 하지메의 일본어역의 우리말 번역에 해당되는 책이다. 「해제」조차도 나카무라의 해제를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단지 산스크리트 원문이 나카무라본에는 실려 있지 않다. 이기영의 범문(梵文)은 콘체본인데 오식이 적지 않다.
이기영 선생께서 서문에 나카무라 하지메의 번역본으로서 본서를 출간하려 했다는 당초의 취지를 밝히고는 있지만, 사실 이 정도의 체제라면 나카무라 책의 개역본(改譯本) 정도의 성격임을 표지에 밝혔어야 했다. 그리고 서(序)에 ‘한문 원전 중의 착오도 바로 잡았다’고 했는데, 나카무라본은 『대정』본이며, 『대정』본은 해인사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나카무라본 한문원전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판본은 고려도감판밖에는 없다. 그러나 이기영은 우리 고려도감판을 보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바로잡음’은 정확한 기준을 결하고 있는 것이다.
나 개인은 ‘보살ㆍ마하살’이 빠진 라집(羅什)의 역보다는 ‘보살ㆍ마하살’이 들어있는 산스크리트 원본의 모습이 보다 수미일관(首尾一貫)되고 『금강경』의 대승정신에 맞는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금강의 지혜는 비구의 전유물이 아닌, 남녀노소, 출가재가 모두 같이 듣고 깨달아야 할 진리인 것이다.
이상이 나 도올의 『금강경』 최초의 한 줄에 대한 강해이다. 이런 식으로 강해를 해나가자면 『금강경』 전체를 해석하는데 『8만대장경』의 분량의 원고가 모자를 것이다. 문제는 내가 라집(羅什) 한역본 한문원본의 해석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물론 내가 이 『경(經)』을 모두 이런 식으로 다 강해해나갈 수는 없을 것이나 우리의 고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편협하고 고식적이고 맹목적인가 하는 일면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내가 모든 경전을 이렇게 번역했으면 좋으련만 나 혼자의 힘으로써는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후학들의 학문하는 자세에 관한 것이다. 최소한 경전을 해석하려면:
1) 경전의 역사적 배경과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오늘 나의 역사적 관심에 대해 일단 상세한 정보와 객관적 관점이 확보되어야 한다.
2) 그리고 경전의 판본에 대한 역사적 고증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며, 그리고 그 쓰여진 문자에 대한 이해, 그 어휘와 문법에 대한 통시적이고도 공시적인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3) 그리고 ‘나의 이해’에 앞선 모든 기타해석의 가능성에 대하여 내 마음이 열려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나의 이해를 선택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의 과정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타인에게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
4) 나의 이해의 최종적 결과를 옮겨놓을 생각을 하지말고 그 이해에 도달하게 된 과정을 독자와 공유할 생각을 해야한다.
5) 번역은 ‘문의(文義)해석’이 아니라 곧 그 문의(文義)에 대한 ‘나의 이해의 구조’를 오늘 여기의 좌중들에게 밝히는 작업이라는 투철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6) 나의 깨달음을 타인의 깨달음으로 회향(廻向)시키려는 열정이 있어야 하고, 그 열정 속에서 우리는 모든 방편을 구사하는 데 있어 자유로와야 한다.
앞으로 한국의 불교학계에 나와 같은 초로(草盧)의 보잘것 없는 학인을 크게 뛰어넘는 대석학들이 대거 배출되기를 희망하면서 다음 줄로 나의 강해를 옮긴다.
내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발음은 우리말 원래의 발음체계를 살린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학계는 유기음을 무기음화 하고 유성음을 무성음화 시키거나, 또 받침이나 된소리를 없애버리는 방식의 두리뭉실한 발음체계를 아주 정통적인 불교식 발음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조선조의 방식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불교 용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사성체’를 왜 ‘사성제’라고 해야만 하며, ‘구마라집’을 ‘구마라쥬’라고 해야만 하는가? 일본어는 기본적으로 ‘송기(aspiration)’가 없으며 받침(CVC의 종성)이나 된소리가 없는 매우 제한된 발음체계이다. 여기서 사용하는 발음은 동국역경원에서 나온 운허 스님의 『불교사전』을 기준으로 하면서, 나 자신의 학술적 판단력에 따라 방편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풍요로운 우리말의 음가를 무시하고 극히 제한된 일본 음역의 표기를 모방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효과를 ‘효과’라고 어색하게 발음하고, 짜장면을 자장면이라고 하는 어리석음과 동일하다. 우리 문명 구석구석에 끼어있는 왜색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
1-2.
이 때에, 세존께서는 밥 때가 되니 옷을 입으시고 바리를 지니시고 사위 큰 성으로 들어가시어 밥 빌으셨다.
爾時, 世尊食時, 著衣持鉢, 入舍衛大城乞食.
이시, 세존식시, 착의지발, 입사위대성걸식.
나의 국역은 세조본 언해의 아름다운 표현들을 참조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수양대군 세조께서는 마지막 ‘걸식(乞食)’을 1~3절의 첫머리에 붙도록 끊어 읽었다. ‘입사위대성(入舍衛大城), 걸식어기성중(乞食於其城中)’ 어떻게 끊어 읽든지 그 의미상에 대차는 없으나 나는 ‘입성(入城)’과 ‘어기성중(於其城中)’이 너무 뜻이 반복되므로, ‘어기성중(於其城中)’이 뒤로 붙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우선 주어의 표현이 달라졌다. 앞에서는 ‘불(佛)’이란 표현을 쓰고, 여기서는 ‘세존(世尊)’이란 표현을 썼다. 둘다 역사적 싯달타에게 쓰였던 칭호, 십호(十號)에 속한다. 불(佛)은 물론 ‘각자(覺者)’라는 뜻으로 그것은 역사적 싯달타에게 국한되지 않는 아주 보편적인 칭호이다. ‘삼세시방제불(三世十方諸佛)’과 같이 ‘진리를 깨우친 성인’ 모두를 가리킨다. 라집(羅什)이 최초의 주어를 불(佛)로 한 것은 불(佛)이 보다 객관적인 느낌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다 상황이 구체화되면서 주관적 느낌이 강화될 때 이 ‘세존(世尊)’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세존(世尊)은 한어 그 자체로는 ‘세상에서 존귀한 사람’의 뜻이 되지만 산스크리트어 표현의 의미는 좀 다르다. ‘Bhagavat’는 ‘bhaga(행운, 번영)’과 ‘vat(~을 소유한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단어다. 따라서 산스크리트어 의미는 ‘복덕을 구유한 자’의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복덕’이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한 습득이 아닐 것이다. 본시 그러한 모든 복덕을 타고난 존귀한 사람이란 뜻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존칭이다.
『아함경(阿含經)』 『성실론(成實論)』에서는 이 세존(世尊)이란 칭호가 나머지 아홉 개의 호칭을 모두 내포하기 때문에 ‘세존(世尊)’이라 하였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이것을 현장(玄奘)은 음역하여 ‘박가범(薄伽梵)’이라 하였는데, ‘불(佛)’, ‘세존(世尊)’을 따로 두지 않고 처음부터 ‘박가범(薄伽梵)’을 주어로 해서 시작하였다. 범어원문에 더 충실하다 하겠지만 라집(羅什)본의 미묘한 맛을 따라갈 수 없다.
‘식시(食時)’는 ‘밥 때’인데, 보통 사시(巳時)라 하니 그러면 9시~11시 사이가 된다. 류지(留支)와 진체(眞諦)는 ‘어일전분(於日前分)’, 급다(笈多)는 ‘전분시(前分時)’, 현장(玄奘)은 ‘어일초분(於日初分)’, 의정(義淨)은 ‘어일초분시(於日初分時)’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하루를 삼분(三分)하여 초(初=전前)ㆍ중(中)ㆍ후(後)인식하는 데서 생겨난 표현들이다. 초분(初分)은 새벽 3시부터 아침 9시까지를 말하고, 중분(中分)은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후분(後分)은 오후 3시에서 밤 9시까지를 말한다. 사실 산스크리트어로는 ‘아침때, 점심때, 저녁때’라는 일반적인 의미 외로 어떤 특수한 의미부여는 없다【제15분 제1절에도 같은 표현이 있다】.
초분(初分) | 새벽 3시 ~ 아침 9시 |
중분(中分) | 오전 9시 ~ 오후 3시 |
후분(後分) | 오후 3시 ~ 밤 9시 |
내가 생각키로, ‘식시(食時)’는 ‘밥 때가 되어’라는 생활관습상의 표현일 뿐이다. 부처님은 너무 일찍도 늦게도 식사를 할 수 없었으므로 아침식사시간을 9시 정도로 잡으면 무난할 것이다. 요즈음 우리 절깐의 승려들의 아침 공양시간이 이른 것은 ‘걸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걸식은 기원에서 사위성까지 1km를 걸어나갔다 또 걸어돌아오는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더더욱 중요한 사실은 성내(城內) 주민들의 밥 짓는 시간과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착의지발(著衣持鉢)’하고 기원정사를 떠나는 시간은 약 새벽 6시경이 되지 않을까? 한번 생각해보라! 새벽 6시 먼동이 틀 무렵, 1,250명의 제자와 불타가 누런 가사를 걸치고 바리를 들고 기원의 정사를 출발하여 사위성으로 향하는 장엄한 모습을! 규모는 물론 더 컸겠지만 낙안읍성 앞 벌교의 너른 들판에 일렬로 1천여 명의 스님들이 줄지어 묵묵히 먼동의 신선한 햇살을 받으며 논두렁 마찻길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여기 ‘대성(大城)’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하다. 즉 1,250명의 스님들이 매일 걸식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성읍(城邑)이라면 그 하부구조의 단단한 토대를 상정하지 않으면 아니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왜 인류최초의 정사(精舍)가 사위대성 곁의 기원(祇園)이 되었어야만 하는지 그 경제사적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맹자(孟子)는 「등문공(藤文公)」 상(上)에서 노심자(勞心者, 마음을 쓰고 사는 자)와 노력자(勞力者, 힘을 쓰고 사는 자), 식인자(食人者, 사람에게 밥대접을 하는 자)와 식어인자(食於人者, 사람에게 밥대접을 받는 자)를 말하였다. 이를 계급적 차별구조의 정당화를 꾀하는 반동철학이라 말하기 전에, 인간세상은 분명 힘써(노력勞力, 육체적 노동) 생업(生業)에 종사하는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나 도올 김용옥도 분명 생업(生業)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다. 마당에 약간의 채소를 길러 먹기는 하지만, 내가 생산업에 종사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내가 먹고 사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걸식자(乞食, 밥을 비는 자)와 급식자(給食者, 밥을 제공하는 자)가 존재(存在)하는 것은 맹자(孟子)의 말대로 ‘천하지통의(天下之通義)’다.
생각해보라! 매일 매일 1,250명의 사람이 성안으로 걸식을 하고, 성안의 주민들은 매일 매일 이들을 위해서 밥을 준비해놓고 한 숟갈 퍼주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사위대성의 모습을! 이것은 남방의 문화요, 오늘날에도 현실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종교적 전통이다. 미얀마에 가면 스님들은 모두 걸식을 해서 먹고 산다. 이러한 분위기가 우리에게는 생소한 듯이 보이지만, 사실 사위성의 이름을 이은 오늘 우리 서울성의 모습도 대차가 없다. 아마 서울장안의 교회에 매주 쌓이는 연보돈만 다 합쳐도 서울시 예산의 몇 곱절이 될 것이다. 이쯤되면 서울이 ‘종교도시’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세상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문제는 ‘걸식자’의 도덕성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어마어마한 연보돈이 라스베가스에서 도박하는데 쓰여지고 라스포사의 밍크코트를 사는데 쓰여진다면 그러한 종교전통은 문제가 있다. 부처님은 걸식하시고 오직 ‘금강의 지혜’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왜, 카필라성의 왕자였던 부처는 보시자들도 많았을 텐데 하필 ‘걸식’의 삶의 형태를 취했어야만 했을까? 그 제1의 정신은 법정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무소유’ 정신이다. 이문회(李文會, 자 단우端友, 송나라 진사, 12세기에 활약)는 ‘걸식자(乞食者), 욕사후세비구불적취재보야(欲使後世比丘不積聚財寶也)’[부처님께서 걸식을 하신 가장 큰 이유는 후세의 비구스님들이 재산이나 보화를 쌓아놓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었다.]라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
여기 ‘착의지발(著衣持鉢)’이라 한 것도 바로 그 뜻이 담겨있다. 비구가 소유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이 삼의일발(三衣一鉢)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먹는 밥조차 내가 소유한 것을 먹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과거에 선가(禪家)에서 ‘의발(衣鉢)을 전수(傳授)한다’ 운운한 것도, 그것이 무슨 비전의 대단한 보물이래서가 아니라, 스님이 소유한 것이 ‘삼의일발(三衣一鉢)’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조차 사람들이 집착하니까, 혜능(慧能)은 자기의 의발을 조계산에 묻어버렸다. 선가(禪家)의 위대성은 바로 그 의발상전의 법(法)조차 없애버린 데서 출발했다는 데 있다. 칠조(七祖)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조사선(祖師禪)’이라는 명칭도 잘못된 것이다. 혜능(慧能) 조사가 구현한 삶의 뜻을 깨닫자는 것이지, 혜능(慧能) 조사가 전(傳)한 선(禪)을 배우자는 것이 아닌 것이다. 조사선(祖師禪)을 여래선(如來禪)과 구별하여 그 상위(上位)의 개념으로 설정한 것은 앙산(仰山)【앙산혜적(仰山慧寂), 807~883: 백장회해(百丈懷海), 위산영우(潙山靈祐)의 법통을 이은 당나라의 고승. 조사선을 여래선 위에 별립시킴. 위앙종(潙仰宗) 개조의 한 사람. 앙산은 강서성 의춘현(宜春縣) 남방 60리에 있다】의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다음, 걸식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마음의 무소유다. 마음의 비움이요, 앞서 내가 한 말로 다시 표현하자면 ‘문둥이의 겸손’이다. 승(僧) 약눌(若訥)이 주를 달기를 ‘걸식(乞食)’의 본래 의미는 ‘사리교만(捨離憍慢)’이라 하였으니, 이는 ‘모든 교만한 마음을 버리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아무래도 걸식이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걸식과정에는 끊임없이 도사리고 있는 수모의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먹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대로 무분별하게 먹어야한다. 이러한 수모 앞에 끊임없이 마음을 비운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수행인 것이다. 현재 미얀마에서 행해지는 습속을 보면, 아침에 나가 얻어온 밥과 반찬을 모두 다시 합쳐서 일제히 나누어 먹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아마도 부처님시대에도 그렇게 공양했을 것이다. 한국의 공양주보살님들의 따끈따끈한 요리솜씨의 식사에 비하면, 과히 유쾌한 식사방식은 아니다.
1-3.
그 성 안에서 차례로 빌으심을 마치시고, 본래의 곳으로 돌아오시어, 밥 자심을 마치시었다.
於其城中, 次第乞已, 環至本處, 飯食訖.
어기성중, 차제걸이, 환지본처, 반식글.
우리말은 세조언해본을 많이 따랐다. 고전을 읽을 때, 우리는 그 문의(文義)를 해석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한편의 영화를 보듯이, 그 실제로 일어난 상황을 머릿속에 이미지로 그려보는 것이 중요하다. 1분 3절은 바로 그러한 이미지가 명료하게 그려지는 대목이다. 새벽에 먼동이 틀 무렵, 잠에서 깨어난 비구승들이 가사를 챙겨입고 바리를 들고 1km 떨어진 대성(大城) 안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그 성안에서 차례로 밥을 빌고, 다시 기원(祇園)의 숲으로 돌아오는 평화롭고 웅장한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차제(次第)’란 바로 우리말의 ‘차례’와 같은 표현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말의 ‘차례’가 바로 이 ‘차제(次第)’라는 한자음이 변한 것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후, 훈민정음으로 한자음을 표기하려고 만든 운서(韻書), 그러니까 우리말 음가로 표기된 최초의 『중한사전』이라 말할 수 있는 『동국정운(東國正韻)』【신숙주(申叔舟) 등 집현전 학사 9명이 세종의 왕명으로 편찬하여 1448년에 간행】의 「서(序)」에 한자음이 우리말의 발음 환경 속에서, 그 초성(初聲)이 변한 예로 차제(次第, 차제 → 차례)와 목단(牧丹, 목단 → 모란)의 두 예를 들고 있다.
‘차제(次第)’는 ‘차례로’라는 뜻이며, ‘걸이(乞已)’는 ‘빌으심을 마치시었다’는 뜻이다. 본동사는 ‘걸(乞)’이고, ‘이(已)’는 그 동사의 진행 상태를 나타내는 보어(補語)이다. 문법학에서는 ‘결과보어’라고 칭한다.
그런데 ‘차례로 빌었다’는 뜻은 무엇일까? 1,250명이 한 집을 다 거친다면 그 집은 1년 먹을 곡식이 다 거덜나도 모자랄 것이다. 분명히 비구(比丘)들은 구역을 나누어 중복되지 않게 민폐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빌었어야 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육조(六祖)는 재미있는 주석을 남겨놓고 있다:
‘차례로’라는 말은 가난한 집과 부잣집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대한다는 뜻이며 ‘빌으심을 마치시었다’는 것은 많이 빈다 해도 일곱 집을 넘지않는 것이며, 일곱 집만 되면 다시 다른 집에는 가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次第者, 不擇貧富, 平等以化也. 乞已者, 如過乞, 不過七家. 七家數滿, 更不至餘家也.
이것이 반드시 불타시대의 걸식의 법칙을 나타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부처님시대에 걸식에도 어떤 예법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혹자는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선업(善業)을 더 짓게 한다는 뜻에서 가난한 집만을 찾아다닐 수도 있고, 혹자는 서민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부잣집만을 골라 다닐 수도 있다. 여기 ‘차례로’라는 말에 가난한 집, 부잣집을 불문하고 차례로라는 뜻이 있다함은 일체의 분별심(分別心)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빌어도 많이 빌어서는 아니 된다. 일곱 집만 빌고, 일곱 집에서 밥을 못얻는다 하더래도 더 빌어서는 아니 된다. 주어지는 대로 다른 비구들과 나누어 먹으면 될 것이고, 없으면 굶어야 할 것이다. 빌음에도 어떤 일정한 법도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미얀마에서 현재 행하여지고 있는 습속을 보면, 새벽 6시 먼동이 틀 무렵 장자(長者)가 앞서 일렬로 나가며, 나가기 전에 간단한 게송(偈頌)을 읊는다고 한다. 반드시 맨발로 나가며 비가 와도 일체 우산을 쓸 수 없으며 걸식할 때는 일체 상대방을 쳐다보아서는 안된다. 바리를 가슴에 품고 고개를 숙이는 자세를 취한다. 걸식이 그 자체로 하나의 고행인 것이다.
나는 어려서 비교적 유족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제시대 때 우리 아버지가 세의전을 거쳐 쿄오토제대(京都帝大)에 유학까지 한 분이고 보면 당시로서는 정말 부잣집 대가(大家)였다. 그래서 우리집에는 걸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우리 어머니는 분명 대갓집 큰마나님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큰마나님 노릇하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어머니는 평생 이런 원칙을 가지고 사셨다: ‘누구든지 우리집 대문안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등돌리고 떠나게 해서는 아니 된다.’
옛날 집들의 대문은 24시간 개방되어 있었다. 그때는 밥을 비는 자나 밥을 주는 자나 다 같이 예의가 있었다. 거지들은 주인집 사람들이 밥을 먹는 시간은 피해서 왔다. 그리고 거지가 오면 우리 어머니는 꼭 툇마루에 독상을 차려 주었다. 그러나 거지는 툇마루에 앉아서 그것을 먹는 법이 없었다. 부엌앞 마당 한 구석에 그것을 가지고 가서 먹었다. 그리고 그들은 명절 때가 되면 자기들이 보일 수 있는 성의를 다했다. 그들은 흔히 빗자루나 조리 같은 것을 삼아가지고 왔다. 이것이 옛날에 내가 직접 경험한 걸인들의 예법들이요 우리네 양속(良俗)이다.
"환지(還至)’는 ‘되돌아 왔다’는 뜻이다. ‘본처(本處)’는 기원(祇園)이다. 즉 떠났던 본래의 자리이다. ‘반식글(飯食訖)’에서 ‘반(飯)’은 ‘밥’이라는 명사로 여기서는 ‘아침’에 해당되는 복합적 개념이다. ‘식(食)’은 ‘먹다’라는 동사로써 반(飯)을 목적으로 갖는다. ‘글(訖)’은 식(食)이라는 동사의 보어(補語)이다. ‘반식글(飯食訖)’은 ‘아침먹기를 끝내었다’가 된다【訖은 마친다는 뜻일 때는 ‘글’로 읽는다】.
1-4.
옷과 바리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심을 마치시고, 자리를 펴서 앉으시거늘.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수의발. 세족이, 부좌이좌.
설법에 동참하려면 발을 씻어라
그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잔잔한 영화 속에 클로즈엎 되어 나타나는 컷들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하나둘씩 스러져간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번뜩이는 금강의 지혜가, 너무도 일상적이고 평범한 하루의 일과 속에서 설파(說破)되었다고 하는 사실의 파라독스다. 가장 일상적인데 가장 벼락 같은 진리가 숨어있다고 하는 긴장감을 이 붓다의 행동은 보여 준다. 의발을 거두어들이고, 발을 씻고 자리를 깔고 앉는 이 모든 평범한 의례가 바로 금강의 지혜에 번뜩이는 자가 바로 금강의 지혜를 설(說)하려는 그 순간에 묵묵히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평범 속에 가린 의미를 좀더 깊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수의발(收衣鉢)’이란 무슨 뜻인가? 우리가 스님들이 입는 옷을 ‘가사(袈裟)’라고 부르는데 이는 ‘kaṣāya’의 음역인데, 이는 본시 옷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색깔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적갈색으로서 모든 원색이 파괴된 색깔이라는 의미의 괴색(壞色)을 의미한다. 괴색이라면 우리는 먹물이 흐려진 ‘회색(灰色, grey)’을 생각하지만 남방에서는 색소가 주로 나무껍질이나 과즙, 목란(木蘭)에서 채취되기 때문에 자연 적갈색을 띤다. 원래 스님의 가사는 본래 분소의(糞掃衣, pāṃsu-kūla)라고 부르는 것으로 공동묘지에서 시체를 쌌다가 버린 천이나 난지도 같은 쓰레기 집적소에서 주울 수 있는 천쪼가리들을 꿰매어 염색한 것이다. 자기를 낮추는 지극한 표현이라 할 것이다. 우리말의 ‘납승(衲僧)’이란 표현도 문자 그대로 ‘분소의(糞掃衣) 누더기를 입은 승려’란 뜻이다. 그렇지만 이런 누더기옷을 깨끗하고 귀하게 다루는 것이 곧 초기승가집단의 윤리였다. 삼의(三衣)는 여러 가지 구구한 설(說)들이 있지만, 쉽게 말하면 바지 한 벌과 저고리 한 벌과 그위에 걸치는 대의(大衣, saṅghātī) 한 벌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부처님도 물론 걸식하러 나갈 때에는 이 삼의(三衣)를 다 걸치고 나갔을 것이다. 돌아와서 아침밥을 다 먹고 나서, 이제 깨끗이 씻긴 바리(=발우鉢盂)【이 때는 오늘과 같은 목칠기였다기보다는 금속제였을 것이다】와 겉옷을 곱게 개, 제자리에 갖다놓는 의식을 행한 것이다. 그것을 ‘수의발(收衣鉢)’이라 표현한 것이다. 항상 무엇을 하면 그 원 위치로 매사를 환원ㆍ정돈한다는 것은 모든 공부(工夫)의 원칙이다. 초기승가집단의 이러한 공부(工夫)의 전형, 그 솔선수범하심을 여기 부처님께서 보이신 것이다.
다음 ‘세족이(洗足已)’의 표현에서 ‘이(已)’는 본동사인 ‘세(洗)’를 수식하는 보어(補語)임은 앞서 ‘걸이(乞已)’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런데 ‘세족(洗足)’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우선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물리적 사실은 부처님과 그의 제자 1,250명이 사위성(城)을 갔다 왔다고 하는 신체적 행위가 나족(裸足, 맨발)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맨발로 2km이상을 걸어갔다 왔다면 그 발이 누구나 더러울 것임은 뻔한 노릇이다.
「요한복음」 13장에, 예수가 그의 제자의 발을 씻기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타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에는 보이지 않는다. 예수의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면모를 많이 보이는 「요한복음」에만 유독 이 기사가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여기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길들은 먼지투성이요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때의 사람들이 신는 신발이란 가죽바닥을 발에 노끈으로 묶는 샌달이었다. 당시의 습관으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이할 때는 문깐에 물통을 놓고 하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손님의 발을 씻기는 것이 상례였다. 유월절을 앞둔 이 다락방에 모인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하인이 없었다. 이 때 예수는 자신이 몸소 하인의 몸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이다. 이 때 예수는 이미 자기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는 절박한 최후의 삶의 심정에 있었다.
여기 불타는 물론 제자 비구들의 발을 씻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타는 자기 발을 자기가 씻었다. 그런데 이 모습에도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실이 숨어있다. 요즈음 우리나라 큰스님 정도만 되어도 이러한 행위는 분명 행자 소관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당대의 부처세존(世尊)의 위치는 만인(萬人)의 사표(師表)가 되는 그런 지존의 자리였다. 그러나 부처는 자기 발을 자기가 씻은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초기불교의 건강한 모습, 각자(覺者)의 건강한 모습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스스로 조용히 자기 발을 씻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도대체 이 ‘발씻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 진도에 가면 ‘싯킴굿’이라는 것이 있다. 영혼의 진혼(鎭魂)이지만 ‘씻는다’는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다.
나의 부인도 내가 어디 나갔다 들어오면 손발을 씻기 전에는 무엇을 먹지도 못하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발씻음’은 그런 위생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만약 그런 맥락이었다면 ‘발씻음’의 문구가 ‘반식글(飯食訖, 아침밥 자심을 끝내시었다)’ 앞에 가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발씻음은 바로 ‘자리펴고 앉음’을 위한 것이요, 바로 진리의 설법을 위한 자리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이 명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발씻음은 더러움을 씻는다고 하는 물리적 행위 그 이상의 제식적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4복음서 모두의 벽두에 세례요한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외친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마가 1:8).
우리는 지금 ‘세례(洗禮)’라는 새크라멘트(sacrament, 성례전聖禮典)가 아주 보편화되어있기 때문에, ‘세례’라는 제식이 구약시대부터 있어왔던 유대인 고유의 보편적 이니시에이션 세리모니(initiation ceremony)처럼 착각하기 쉽다. 사람을 물에 잠그었다 빼냄으로써 그 순간에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발상의 제식은 유대인전통에는 전혀 없는 생소한 것이었다. 그럼 이것은 어떻게 오늘날의 기독교의 주요제식으로 정착하게 되었는가? 이 물의 세례, 즉 ‘물의 신킴굿’을 처음 고안ㆍ개발하고 실천한 사람이 바로 요한이라는 광야의 사나이었고, 그래서 우리가 그를 부를 때 그의 트레이드 마크를 붙여서 ‘세례요한(John the Baptis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바로 요한이라는 어떤 역사적 인물은 요단강에서의 ‘세례’라고 하는 제식적 행위를 통하여 새로운 대중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세례란 무엇인가? 그것은 ‘죄사함’이다. 죄사함이 세례로 이루어지는가? 그렇다! 죄사함이 물에 한번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것으로 가능케 되는가? 그렇다! 사실 이것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의 엄격성(legalistic rigorism)에 대한 엄청난 반동이었던 것이다.
죄(Sin)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 karma)이다. 죄는 뭐고, 업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행위(Deed)인 것이다. 행위란 본시 유형이 아니고 무형의 것이다. ‘도둑질’은 그 순간만 모면하면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거짓질’도 그렇고, ‘간음질’도 그렇고, 모든 ‘질’이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존재(存在, 마음) 속에 죄로, 업으로 쌓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괴로워하고 신음하고 고해(苦海)를 헤엄쳐야 한다. 그런데 ‘광야에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마가」 1:4) 요한은 외친다.
여기 지금 이 요단강 물속에 한번만 들어갔다 나오면 모든 죄가 말끔히 씻기고 깨끗한 사람이 된다. 모든 죄가 말끔히 씻기고 온전한 새사람이 된다! 이 얼마나 위대한 복음(Good News)인가! 사람들은 이 복된 소식을 들었다. 예루살렘, 유대아, 사마리아, 갈릴리, 사방에서 이 복음의 기쁨에 동참하기 위하여 몰려들었다. 사실 이 복음에 몰려든 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수였다.
오늘 복음서의 기사들이 모두 예수제자들의 입장에서 집필된 것이기 때문에, 세례요한과 예수의 관계에 관하여 그 정당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세례요한은 예수보다 선각자였고, 예수는 세례요한의 행위의 민중적 가능성과 그 지지성에서 어떤 삶의 전기를 발견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한마디로, 세례요한과 예수는 바로 대승운동의 동반자요, 친구요, 선후배요, 사제지간이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예수의 길을 준비한 자로서 자기를 낮추었다. 사실 세례요한이 그렇게 낮추었다기보다는 예수의 위대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예수 편의 기자들이 그런 식으로 기술한 것이다. 세례요한의 일생은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의 삶과 죽음의 매우 비슷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요한은 당시에 민중들에게 ‘메시아’로 인식되었고 그것은 헤롯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다. 요한은 최근에 사해문서가 발견된 쿰란(Qumran) 콤뮤니티와 같은 어떤 집단에 소속된 사람일 것이라는 견해와, 또 당대의 강력한 종교운동집단들의 한 지파였던 엣세네(Essenes)파 계열의 사상가였다는 지적이 있으나 이 모두가 설(說)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의 세례론, 세례운동의 핵심은 매우 명확한 것이다. 최근에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頓悟頓修)’ 등의 논의로 인하여 우리나라 불교계에 돈(頓, Sudden Enlightenment)과 점(漸, Gradual Enlightenment)이라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지만, 일반적으로 무명(無明)의 업(業)을 씻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점교(漸敎)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시간이 걸릴 필요가 없이 일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면 돈교(頓敎)가 되는 것이다. 후대에 발전한 사상이지만 유식종(唯識宗)에서는 무시이래(無始以來)의 종자(種子)의 훈습에 의한 아라야식의 업(業)을 전환(轉換)시키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릴 뿐아니라 각고의 요가수행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유식종(唯識宗)을 보통 유가종(瑜伽宗)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전식성지(轉識成智)를 위하여 엄청난 요가의 고행을 요구하기 때문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정통불교론은 돈(頓)의 입장보다는 점(漸)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발상! 사람이 한번 강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즉시 그 자리에서 죄업(罪業)이 다 씻기고 새사람이 된다고 하는 그러한 발상은, 바로 돈교(頓敎)의 가장 전형적인 발상이다. 바로 요한의 세례운동이야말로 기독교대승운동의 출발인 것이요, 돈교적(頓敎的)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에는 율법의 약속과 철저한 지킴의 역정이 요구된다고 말함으로써 특수층의 구원만을 고집하는 제사장이나 아라한에 대한 철저한 반역이요, 비로소 복음이 억압받는 자, 가난한 자, 곤궁한 자, 애통하는 자, 그들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금강경』의 설법내용이, 칠보를 길에 까는 자들, 화려한 탑을 무수히 세우는 자들, 장쾌한 사원을 무수히 건립하는 자들에 대해, 단지 부처님의 진리 4구게를 암송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그들에게야말로 구원의 복음이 있다고 선포하는 것과 대차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선포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바로 그 모우먼트(moment)가 바로 그 ‘씻김’인 것이다. 그것이 세례인 것이다. 예수는 이 세례를 ‘물의 세례’에서 ‘불의 세례’로, 보이는 세례에서 보이지 않는 세례로, 물체적 세례에서 성령적 세례로 바꾼 것이다. 바로 그 ‘불의 세례’가 『금강경』에서는 사구게송(四句偈頌)의 세례인 것이다. 그것은 곧 영혼의 노래요 성령의 노래요, 영혼이 부정되는 노래요 성령이 부정되는 노래인 것이다.
여기 부처님께서 ‘발을 씻으셨다’한 것은 단순히 걸식으로 더러워진 맨발을 물로 씻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세례의 전형적 행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을 설하기 이전에 당신 자신의 모든 죄업을 씻으신 것이다. 불자들은 나의 이런 말에 불쾌감을 느낄지 모른다. 부처에게 어찌 씻을 죄업이 있을까보냐? 하구. 그러나 나는 말한다. 역사적 불타는 인간이었을 뿐이다. 아무리 해탈한 자라 할지라도 매일 매일 죄업을 짓고 사는 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는 매일 매일 발을 씻어야 하는 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몸소 무릎 꿇고 앉아 씻기셨다. 고락을 같이 한 제자들의 죄업을 씻기셨다. 예수의 마지막 싯킴굿이었던 것이다. 자아! 이제 나 도올이 말한다. 『금강경』의 설법의 자리에 동참하려면 우선 그대들의 발을 씻어라! 요단강에, 갠지스강에 뛰어 들어라! 그대들의 마음을 성령의 불로 태워버리고 들어라!
앉아서 들어야 들린다
제일 마지막 표현인 ‘부좌이좌(敷座而坐)’는 라집(羅什)의 위대성을 잘 드러내주는 명번역 중의 명번역이다. 그 산스크리트 원문을 보면, ‘이미 마련된 자리에 앉아, 양다리를 꼬고, 몸을 꼿꼿히 세우고, 정신을 앞으로 집중하였다.’로 되어 있다. 이미 설정된 자리에 쌍가부좌를 틀고 등을 세우고 입정(入定)하였다는 뜻인데, 현장(玄奘)은 이러한 원문에 충실하여 ‘어식후시(於食後時), 부여상좌(敷如常座), 결가부좌(結跏趺坐), 단신정원(端身正願), 주대면념(住對面念)’이라고 구구한 문자를 늘어놓았다. 집(什)【앞으로 꾸마라지바(鳩摩羅什)를 약(略)하여 집(什)으로 쓰기도 한다】의 위대성은 바로 문자의 간결함과 상황적 융통성이다.
특정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보다는 불특정의 장소에 방석이나 자리를 깔아 자리를 만드는 것이 보다 더 상황적이고 자연스러운 맛이 있다. 그리고 ‘결가부좌를 하고 등을 세우고 선정(禪定)에 들었다’하는 것보다는 그냥 ‘앉았다’, 그냥 ‘자리 위에 편안하게 앉았다’가 몇천만 배 나은 번역이다. 『금강경』의 설법은 선정이나 삼매에 들은 자가 비의적으로 내뱉는 주문이 아니다. 그냥 편하게 방석 위에 앉은 자가 또렷한 제정신으로 말하는 일상언어인 것이다. 집(什)의 번역의 위대성은 바로 이러한 자연스러움에 있는 것이다. 빈 공간에 자리를 까는 행위는, 바로 자리를 깔음으로써 그 자리를 성화(聖化, sacralization)시킨다는 제식적 의미를 지닌다. 즉 그 주변에 성스러운 공간이 창출되는 것이다. ‘자리를 깐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성화의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좌(坐)’ 즉 ‘앉았다’ 함은 무엇인가?
사복음서에 공통으로 나오는 유명한 스토리 중의 하나가 예수가 다섯 개의 떡덩이와 두 마리의 물고기로 5천 명의 무리를 먹인 사건이다. 예수에게 복음의 진리를 들으러 모인 갈급한 심령 5천 명! 날이 이미 어두웠고 마을에 내려가 사먹으려 해도 돈도 없고 그만한 물자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 오병이어(五餠二魚)! 이것은 혼자 먹기에 딱 좋은 분량이다. 5병2어를 혼자 먹는다는 것은 분명 소승(小乘)이다! 5병2어로 5천 명이 다 함께 먹는 것이야말로 대승(大乘)이다. 나는 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설화처럼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의 갈림길을 말해주는 강력한 상징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사복음서에 공통으로 나오고 있는 이 기적설화를 잘 뜯어보면 이 소승과 대승의 갈림길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예수의 한마디를 모두가 간과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혼자 먹을 수 있는 분량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 이때 예수는 말씀하신다.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그리고 4복음서에 공통으로 기재되어 있는 결정적인 한 마디가 있다. 예수는 5천 명의 무리를 향하여 외친다.
“이 무리들로 하여금 앉게 하라!”
여기에 가장 중요한 멧세지는 배고파 들뜬 오천 명의 무리로 하여금 모두 같이, 함께 앉게 한다는 것이다. 한 마음으로 한 잔디 위에 앉게 하라! 배고픔에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성나서 싸우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복음의 소식에 기쁜 마음을 가라앉히고, 앉아라! 이스라엘의 사람들아! 바리새도 앉아라! 엣세네도 앉아라! 단검을 품은 이스카리옷(Judas Iscariot)도 앉아라! 게릴라인 열성당원들도 앉아라! 제사장도 앉고, 배고픈 자도 앉고 배부른 자도 앉아라! 보통 ‘일어나라!’는 외침은 ‘북돋음’이요. 무위(無爲)가 아닌 유의(有爲)로의 외침이다. 전쟁이 일어났다! 일어나라! 싸우자! 자본가들의 횡포가 심하다. 일어나라! 노동자여! 나가자! 싸우자! 춘투의 계절이다!
다섯 개의 떡덩이와 두 마리의 물고기로 5천 명을 배불리 먹이기 전에 예수가 요구한 것은 ‘앉으라!’라는 명령이었다. 바로 ‘앉음’의 ‘일심(一心)’이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가 5천 명에게 공유될 수 있는 대승(大乘)의 비결이었다.
서서 듣는 진리가 있다. 그러나 금강의 지혜는 앉아서 들어야 들린다. 모든 성난 가슴을 가라앉히고, 북돋아진 모든 양기를 가라앉히고 들어야 들린다. 성문(聲聞)도 독각(獨覺)도 보살(菩薩)도, 삼승(三乘) 모두가 같이 앉아야 들리는 지혜인 것이다. 이것이 제1분(第一分)의 마지막이다. 이제 우리는 겨우 금강의 지혜가 설파되는 자리의 문턱에 온 것이다.
통석(痛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이유
나는 매우 엄격하고도 신실한 기독교신앙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우리어머니는 기독교를 통하지 아니하고서는 우리민족의 구원의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개화(開化)의 세기를 사셨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성경』 구절을 외워야 했다. 그리고 학교 가기 전에 안방윗목 문턱에서 『성경』구절을 외우면 한 구절당 10원을 탔다. 그리고 못 외우면 종아리를 맞았다. 그렇게 해서 『신약성경』을 몽땅 외우다시피 했다. 나의 고전에 대한 소양은 이렇게 해서 길러진 것이다. 동양고전에 대한 기초 소양도 우리 모친이 이렇게 해서 길러준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가장 신나게 외운 것으로 ‘산상수훈(Sermo in monte)’이라는 것이 있다. 이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에 가장 완정한 형태로 나온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여기서도 ‘산에 올라가 앉다’라는 이미지가 나온다. 사실 『금강경』은 기원(祇園)에서 붓다가 아침 한나절에 앉아 설(說)한 것이다. 나는 『금강경』을 예수의 ‘산상수훈(山上垂訓)’과 병치(竝置)되는 붓다의 ‘기원수훈(祇園垂訓)’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산상수훈의 첫머리에 우리가 흔히 ‘비아티튜드(the Beatitudes)’라고 부르는 여덟 개의 ‘유복(有福)’ 시리즈가 나온다. 그 첫 구는 다음과 같다.
심령(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나는 어려서부터 이 산상수훈을 신나게 외웠지만, 도무지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한다면 이해가 쉽게 간다. 예수의 역설적 복음의 진리는 돈 없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려 함이라면 가난한 자들이야말로 오히려 복이 있다는 멧세지는 쉽게 이해가 가는 것이다. 사실 마태와 같은 내용을 전하는 유일한 공관복음의 기사인 누가복음 6장 20절에는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로 되어 있다. 아마도 「누가복음」의 기사가 마태복음의 기사보다 더 소박한 오리지날한 멧세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마음이 가난하다.’ ‘심령이 가난하다’, ‘정신이 가난하다’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은 오히려 복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정신적으로 가난한 것은 동정이나 공감의 여지가 없다. ‘정신의 빈곤’, ‘마음의 빈곤’은 치료되어야 할 상황이지 그 자체로 복 받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이다. 나는 이 숙제를 풀 수가 없었다. 아무리 비슷하게 맞아떨어지는 소리를 하는 성서주석서를 수백 권을 읽어도 내 마음에 석연하게 해석되어지는 희열을 느낄 수 없었다. 어째서 ‘심령의 가난’이 연민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축복의 대상이 된단 말인가?
나는 소꼽장난할 시절부터 품어왔던 이 의문을 1999년 여름 도올서원 12림에서 『금강경』을 강의하면서 비로소 풀게 되었다. 그 열쇠는 바로 『금강경』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 가난한(πτωχοι) 것의 주어로써 쓰여진 ‘마음’에 해당되는 단어는 ‘프뉴마(pneuma, πνεύμα)’이다. 프뉴마는 ‘바람’, ‘목숨’, ‘영혼’, ‘유령’, ‘마음의 상태’ 등의 다양한 함의를 지니는데, 이것은 상키야(Sāṃkhya) 철학에서 쁘라리띠(prakṛti, 물질物質)와 함께 형이상학적 두 원리로 간주하는 뿌루샤(puruṣa, 정신)와 같은 계열의 어원에 속하는 것이다.
프뉴마가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결여’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서 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뿌루샤, 즉 인간존재의 결여인 것이다(‘뿌루사’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프뉴마의 가난은 직설적으로 프뉴마의 결여를 말한다. 그것은 곧 ‘아상의 결여’를 말하는 것이다. 내어 줄래도 내어 줄 마음이 없는 것이다. 보일래야 보일 마음이 없는 상태, 이것이야말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무아(無我)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이여 복이 있도다 함이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내세울 나’가 없다는 것이다. 곤궁하고 가난하고 찌들리어 핍박을 받지마는, 그러기에 마음이 비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중국인들이 그들의 『성경(聖經)』에 이를 번역하여,
虛心的人有福了, 因爲天國是他們的.
쉬신더르언여우후우러, 인웨이티엔꾸어스타먼더
라고 한 것은 참으로 통찰 있는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가난’에 대하여 도가적 개념인 허를 썼지마는 그것은 『금강경』적인 ‘무(無)’나 『반야심경』적인 ‘공포’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복을 받을 수 있는 자는 마음이 가난한 자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없는 자인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애통해 할 수 있고, 그들이야말로 온유할 수 있고, 그들이야말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할 수 있는 것이다.
도올은 말한다. 『금강경』을 읽어야 비로소 『신약』이 보인다. 우리는 『신약』을 소승적으로 읽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대승적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인용
'고전 > 불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강경 강해 - 제3분 대승의 바른 종지 (0) | 2021.07.12 |
---|---|
금강경 강해 - 제2분 선현이 일어나 법을 청함 (0) | 2021.07.12 |
금강경 강해 - ‘소승’은 뭐고 ‘대승’은 뭐냐? (0) | 2021.07.12 |
금강경 강해 - ‘금강’의 의미? (0) | 2021.07.12 |
금강경 강해 - 『금강경』에 대하여 (0) | 2021.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