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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해 - ‘소승’은 뭐고 ‘대승’은 뭐냐?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 ‘소승’은 뭐고 ‘대승’은 뭐냐?

건방진방랑자 2021. 7. 12.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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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은 뭐고, ‘대승은 뭐냐?

 

 

1. 소승과 무관한 소승개념

 

 

자아! 너무 번쇄(煩瑣)한 학구적 논의를 떠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개념들을 분석해보자! 도대체 소승(小乘, hīnayāna)이란 무엇이냐? 작은 수레다! 그럼 대승(大乘, mahāyāna)이란 무엇이냐? 큰 수레다! 그럼 소승이 좋은 거냐 대승이 좋은 거냐? 요즈음 아파트도 모두 작은 아파트보다 큰 아파트 못 얻어서 야단인데 아무렴 큰 게 좋지 작은 게 좋을까보냐? 큰 수레가 넉넉하고 좋을 게 아니냐? 작은 길 가는 데는 작은 수레가 좋지, 뭔 거추장스런 큰 수레냐??

 

사실 히나(hīna)’라는 의미에는 단순히 싸이즈가 작다는 물리적 사실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용렬하고 옹졸하다는 가치판단의 의미가 들어가 있다. ‘마하의 의미에는 상대적으로 크고 훌륭하고 장엄하다(magnificent)’는 의미가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그 누가 히나로 불리기를 좋아할 것인가?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상적인 불교이해, 교과서적인 불교이해를 잠깐 들여다보면, 누구든지 이런 말을 서슴치 않는다. 남방불교는 소승불교고, 북방불교는 대승불교다. 그럼 버마ㆍ타이 등지에서 보는 불교는 소승이고, 중국ㆍ한국ㆍ일본의 불교는 대승이란인가? 마치 소승ㆍ대승이라는 말이 규정되는 어떤 고정적 대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어휘 속에서는 소승과 대승이 실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과연 불교와 같이 추상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구원의 정신세계를 더듬는 종교적 세계에 소승과 대승이라는 확연한 구분의 기준이 가능할까? 누런 까샤야를 걸친 미얀마의 스님들은 모두 소승불교인이고, 회색의 가사를 걸친 조선의 스님들은 모두 대승불교인인가? 우리가 흔히 불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통시적으로나 공시적으로나, 모두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 개념들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 ‘소승ㆍ대승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실로 불교를 이해하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일대 편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소승ㆍ대승의 이해가 철저히 실체화되어 있는 오류에 속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교상판석(敎相判釋)’도 중국불교의 교리체계화에 기여한 바가 크지만, 그러한 아전인수격의 서열적 가치판단은 오히려 근원적으로 불교의 이해를 그르치게 만드는 도식성을 조장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경전해석학의 방편으로 수용할 수는 있으나, 불교의 근본교의를 이해하는 열쇠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대승이란 말은 물론 대승이라는 말을 사용한 사람들이 그들의 대승됨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상대적으로 소승이라는 말을 지어냄으로써 역으로 대승의 존재 이유를 확립하려 한 데서 생겨난 말일 뿐이다(소승이라는 말 자체가 대승이라는 말보다 수백 년 후에 생겨났다). 다시 말해서, 소ㆍ대승의 구분개념은 실제로 소승과는 무관한 개념이다. , 대승에게는 소승이 존재하지만, 소승에게는 소ㆍ대승의 구분근거가 근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남방에 가서 그들에게 우리가 규정하는 의미맥락에서 당신은 소승이냐고 물으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유태인들에게 가서 구약을 운운하는 것과 똑같은 바보짓이다(유대인들에게 구약은 없다. ‘바이블이 있을 뿐이다).

 

 

 

 

2. 우월의식과 특권의식의 거부가 대승의 출발

 

 

불교사적으로 소승이란 주로 부파불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대승이란 이 부파불교를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나온 어떤 혁신적 그룹의 운동을 규정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ㆍ대승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정황에서 규정된 원래의 의미만을 정확히 맥락적으로 파악하고, 그 파악된 의미를 상황적으로, 유동적으로, 방편적으로 적용해야 할 뿐인 것이다. 우선 우리의 논의를 단축하기 위해서 이러한 역사적 정황을 압축시킨 도식을 하나 제시해보자!

 

 

소승(hīnayāna) 阿羅漢(아라한, Arhat) 八正道(팔정도)
대승(mahāyāna) 菩薩(보살, Bodhisattva) 六波羅蜜(육바라밀)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도식적 이해 자체가 불교의 근본교의의 이해를 그르치게 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는 데 있다. 지금 내가 이 강의를 하고 있는 곳은 도올서원 제12림이다. 매림마다 우리나라 전국의 각 대학에서 약 150명의 우수한 선발된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내 강의를 직접 듣고 있다. 벌써 12림이 되었으니까, 이것을 나의 12번째 대설법이라고 한번 비유적으로 상정해보자! 우리 도올서원에서는 내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은 유호례(由戶禮)’로부터 승당례(升堂禮)’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며 이 과정을 다 거치면 재생(齋生)’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그리고 재생(齋生)생활을 모범적으로 수차에 걸쳐 완수하면 대중의 추천에 의하여 재수(齋秀)’라는 존칭을 얻는다. 현재 2천여 명 정도의 재생이 있으며, 40여 명 정도의 존경스러운 재수들이 있다. 물론 도올서원은 순수한 학술기관이며, 일체의 종교적 행위가 허락되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깨달음을 던져준다는 데서는 별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아마도 불타의 최초의 승가의 모습도 이와 같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싯달타라고 하는 어떤 실존인물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는 나 도올 김용옥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평상적인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대 또한 인간이라면 여기에 이의를 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싯달타라는 인간은 그의 삶의 어느 시점에 아뇩다라삼막삼보리라고 하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얻었고, 그로 인해 주변의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감화를 던지는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깨달은 자붓다라고 부르고 그에게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 몰려든 사람들이 싯달타 주변을 떠나지를 않고 살게 됨에 따라 그들은 자연스럽게 어떤 콤뮤니티 즉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을 승가(僧伽, saṃgha)라고 불렀다. 아예 집을 떠나(출가出家) 전문적으로 승가에 상주하는 사람들을 남ㆍ녀 구분하여 비구(比丘, bhikṣu)ㆍ비구니(比丘尼, bhikṣuṇī)라고 불렀고, 그냥 가정을 유지하면서 집에서(재가在家) 승가에 다니는 사람들을 우바색(優婆塞, upāsaka, 신사信士)ㆍ우바이(優婆夷, upāsikā, 신녀信女)라고 불렀다. 이 출가이중(出家二衆)과 재가이중(在家二衆)을 합쳐 우리가 초기 승단을 구성한 사부대중(四部大衆, 사중四家, 사부중四部衆)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세에는 항상 이러한 집단이 발생하면 집단의식이 생겨나게 마련이고, 이 집단의식은 항상 그 집단을 성립하게 만든 본래정신과는 무관하게 발전해나가는 상황은 인지상정에 속하는 것이요, 역사의 정칙이다.

 

도올서원에 모여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자기들은 재생이라 하고, 나는 일반 대학생들과 다르다라는 의식을 갖게 되고, 나는 도올선생의 강의소리()를 직접 들었다()는 강한 프라이드를 갖는다고 생각해 보자!(불교초기집단에서 불타의 소리를 직접 들은 자들을 성문聲聞’[śrāvaka]이라 불렀다). 이러한 프라이드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에게 권위를 주고 디시플린(discipline, 기강)을 주고 더 열심히 공부하게 만드는 긍정적 효과도 있겠지만, 그것이 도가 지나치고 고착화되고 장기화되면, 그것은 역으로 권위주의(authoritarianism)와 형식주의(formalism)와 차별주의(distinctionism)를 낳게 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누가 생각해도 바람직하지 않다. 초기의 도올서원의 생동하는 원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 될 것이며, 그것은 분명 개선되어야 할 상황이지만, 기득권자들의 권위의 타성과 관성체계에 의하여 눈덩이처럼 굴러가는 역사가 전개될 수도 있다. 바로 초기 불교승단의 상황은 이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도올서원의 권위주의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역으로 도올선생의 위치를 평범한 교수가 아닌 극존(極尊), 범인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신비스러운 권위의 상징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렇게 도올을 절대의 자리로 높여놓아야만, 그의 소리를 직접 들은 자기들만의 특수성의 권위가 확보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파불교의 상황은 정확히 이런 상황이었다. 싯달타의 사후, 불교는 아쇼까(Aśoka, 아육왕阿育王, 치세治世 268~232 BC)라는 마우리아왕조 제3대의 명군(名君), 전륜성왕(轉輪聖王)을 만나 크게 그 세를 떨쳤지만, 이러한 세의 확대가 불교승단 내부에 많은 부작용을 가져오게 된 것은 쉽게 생각할 수가 있다. 포만은 부패를 낳게 마련이다. 아쇼까 치세기간에 이미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와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대중부(大衆部, Mahāsāṅghika)의 분열이 생겼고, 이후 이 양대파의 세부적인 분열이 가속화되어 우리가 통칭 부파불교(部派佛敎)’라고 부르는 시대가 연출되게 되는 것이다. 이 부파불교시대를 대변하는, 소위 소승(小乘)’으로 규정되는 대표적인 종파가 바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in)’라고 하는 아비달마 교학불교인 것이다.

 

부파불교의 수도인들이 지향한 이상적 인간상을 우리는 아라한’(줄여 라한’)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아라한이라는 말은 원래 초기 불교집단에서 인간 싯달타를 존경하여 부르던 열 개의 존칭(십호十號) 중의 하나였다.

1) 여래(如來) : 진리에서 온 사람

2) 응공(應供) : 응당 공양을 받을 사람

3) 정편지(正遍知) : 두루 바르게 깨달은 사람

4) 명행족(明行足) : 이론과 실천이 구비된 사람

5) 선서(善逝) : 열반을 자유로이 드나드는 사람

6) 세간해(世間解) : 세상을 잘 아는 사람

7) 무상사(無上士) : 최고의 인간

8) 조어장부(調御丈夫) : 사람을 잘 다루는 사람

9) 천인사(天人師) : 신과 인간 모두의 스승

10) 불타(佛陀) : 깨달은 자,

11) 세존(世尊) : 복덕을 구유한 자

(정확히 11개인데, 십호를 말할 때는 이 중 하나를 뺀다).

 

이중 두 번째의 응공(應供)’이라는 것이 바로 아라한인 것이다. 사실 나도 밖에 돌아다닐 때, 누구와 식사를 하게 되면 대강 상대방이 식사값을 치르는 상황이 많은데, 내가 꼭 얌체라서기보다는, 평소 때 내가 많이 베풀고 살기 때문에 그냥 편하게 얻어먹을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응공(應供) 즉 아라한이란, 얻어먹어도 그것이 업이 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만큼 존경스러운 사람이란 뜻이다. 사실 이것은 뭐 대단히 특수한 존칭이 아니다. 경주 석굴암에도 십대(十大)제자 나한상이 삥둘러쳐 있듯이, 부처의 제자들을 나한이라고 부르기도(십육나한十六羅漢), 불전편찬을 위해 일차결집(一次結集)때 모였던 500인의 제자를 보통 오백나한(五百羅漢)’이라고 부르듯이 그것은 특수명사라기보다는 일반명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부파불교시대에 내려오면 이런 아라한의 의미가 변질되어 수도원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는 수도인이 도달하는 최고의 성스러운 경지에 해당되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무학위(無學位)로서 아주 특수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유학위(有學位)1) 예류(預流, srota-āpanna), 2) 일래(一來, sakṛd-āgamin), 3) 불환(不還, anāgāmin)의 세 위()를 거쳐 도달되는 사향사과(四向四果)의 극위(極位)로 엄격하게 설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불타시대에는 불타든 제자든 응공(應供)의 사람들 모두에게 붙여졌던 이 아라한의 명호가, 부파불교시대에는 완전히 불타에서 분리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앞서 든 예대로 도올서원 재생들이 자기들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도올을 넘나보지 못할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즉 부파불교시대에는 인간이 도달하는 최고의 성자의 경지가 아라한이며, 이 아라한은 절대적인 붓다의 경지의 하위(下位)개념으로서 설정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아무리 수도를 해도 붓다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부파불교시대에, 즉 서양에서는 그노시스’(영지)를 추구하는 지혜운동이 요한복음사상의 배경을 이루는 것과 동시대에, 바로 불교종단 내부로부터 이러한 아라한의 독주ㆍ독선ㆍ독재의 편협성을 타파하고 누구든지, 즉 출가자(出家者)나 재가자(在家者)나를 불문하고 곧바로 불타가 될 수가 있다고 하는 대중운동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진보세력은 아라한됨을 추구하는 자들을 성문(聲聞), 독각(獨覺=록각綠覺)이라 불렀다. 성문(聲聞, śrāvaka)이란 곧 수도원(사원)내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서로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으면서 절차탁마 수행하는 자들이요, 독각(獨覺, pratyeka-buddha)이란 선생이 없이 혼자 산속 같은 데서 도사연하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들, 즉 토굴파들을 가리킨 말이었다. 바로 이들 새로운 진보세력이 이 성문(聲聞)ㆍ독각(獨覺)의 이승(二乘)에 대하여 새롭게 내걸은 일승(一乘)이 바로 보살’(bodhisattva)이라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새 포도주는 새 푸대에 담아야 한다! 보살이라는 개념은 곧 그들이 추구하는 새 생명과도 같은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푸대였던 것이다. 이 새 포도주를 우리가 보통 대승(大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대승(大乘)이란 보살운동이다. 즉 보살이라는 개념 이전에 대승이 없고, 대승은 보살과 더불어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살이란 무엇인가? 절깐을 신나게 나돌아 다니는 자유부인들인가? 새 절 짓는 개왓장에 큰 이름을 올리는 부잣집 마나님들인가? 아니면 스님들 공양을 지어올리는 절깐 부엌의 공양주들인가?

 

‘bodhisattva’‘bodhi’라는 말과 ‘sattva’ 두 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bodhi’보뎨(菩提, 속음으로 보리라고 한다)’ 깨달음이다. ‘sattva’살아있는 자유정(有情)’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80년대 우리 대학가를 풍미한 노래가사에 산 자여 따르라!’라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산 자!’ 그들이 곧 보살인 것이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sattva’마음’()의 뜻이 되기도 하고, ‘바램’(지원志願)의 뜻이 되기도 한다. 이 설을 따르면, ‘보살은 곧 깨달음을 바라는 모든 자의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보살운동의 혁명적 성격은 바로 보살이 곧 불위(佛位). 불승(佛乘)이라는 것이다. 즉 보살이 곧 부처 자신의 원래 모습이라는 것이다. 싯달타가 곧 보살이었고(본생담本生譚), 이 보살은 곧 붓다 즉 각자覺者가 된다는 것이다. 보살은 곧 아라한의 정면부정이다. 아라한이 승가라는 제도의 보호를 받는 특수한 디시플린의 출가자(出家者)에 국한되었다면 보살은 출가자(出家者), 재가자(在家者), 가르치는 자, 가르침을 받는 자를 가리지 않는다. 즉 보살에는 승()ㆍ속()의 이원적(二元的) 구분이 사라지는 것이다. 종교적 세계와 세속의 세계의 근원적 구분이 사라지는 것이다. 모든 차별주의(distinctionism)! 가라! 떠나가라!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살에 대한 교과서적 이해는 대강 이러한 것이다. 보살이란 부처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인데, 부처가 아니 되고, 중생의 구제를 위해 사회적으로 헌신하는 자, 소승이 자기 일신만의 구원을 추구하는 데 반하여 대승은 일체중생(一切衆生)과 더불어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 즉 소승은 차안에서 피안으로 자기 혼자만 타는 일인용 보트를 타고 저어가는데, 대승은 많은 사람과 피안으로 같이 가기 위해서 큰 수레, 큰 배가 필요한 자, 그 자가 곧 대승이다!

 

나는 이러한 규정이 구체적으로 불경에 근거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ㆍ소승에 대한, 보살에 대한 이해를 아주 그르치게 만드는 망견(妄見) 중의 망견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인간의 구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홀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구원의 길에는 일인용(一人用) 보트와 만인용(萬人用) 배가 따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의 개인성과 집단성을 기준으로 소ㆍ대승(大乘)을 나누는 것은 극심한 망상이다. 아무리 암자에 홀로 사는 미얀마의 스님이라 할지라도, 낙도에 떨어진 로빈슨 크루소라 할지라도 나 혼자만이 해탈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어차피 해탈의 길에는 인간과의 관계가 절연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 백 사람 만 사람의 양적 차이에 의해서 아라한과 보살의 차이가 가려질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 부처가 될 수 있는데 부처가 아니 되고 보살노릇한다는 말도 참으로 어색하기 그지없는 억설이다. 부처가 될 수 있으면 언제고 그 자리에서 부처가 돼야지, 어찌 부처가 되면 대중구원을 할 수 없고, 부처가 아니 되고 보살이 되어야만 대중구원이 가능하다는 그따위 엉터리없는 말이 도대체 어떻게 성립가능하단 말인가? 이런 엉터리 없는 망견이 바로 불법을 흐리게 만드는 마장(魔障)인 것이다. 부처가 된다는 것과 보살이 된다는 것은 2원적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부처가 곧 보살이요, 보살이 곧 부처다! 지장보살이 어찌 부처가 아닐 수 있으리요!

 

지금 이러한 보살의 사회성에 관한 논의는 원래 인도사상의 회향(廻向, pariṇāma) 개념에서 발전된 것인데, 회향에는 두 가지가 있다. 1의 회향이란, 선근(善根)을 자기의 행복의 추구로부터 자기의 깨달음의 추구로 방향전환하는 것이다. 2의 회향이란 곧 나의 선근(善根)을 자기의 행복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곧 타인의 깨달음과 행복으로 돌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2의 회향은 제1의 회향의 전제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2의 회향은 제1의 회향의 논리적 결과이다. 즉 성불(成佛)이야말로 보살행의 전제며, 보살행이야말로 성불의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1의 회향은 무상정등각을 얻는 것이요, 2의 회향은 그 얻은 무상정등각을 타인의 깨달음으로 전위시키는 것이다.

 

아라한의 팔정도(八正道)의 궁극에는 정정(正定, samyak-samādhi)이라고 하는 관조적인 삼매(三昧)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보살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궁극에는 바로 반야(般若) 즉 지혜, ‘쁘라기냐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1의 회향의 완성은 바로 이 반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요, 이 반야를 획득한 자에게만이 제2의 회향이 가능케 되는 것이다. 이 반야를 최초로 명료하게 제시한 경전이 바로 이 금강경이라는 희대의 지혜서인 것이다.

 

소승과 대승의 궁극적 구분 근거가 바로 보살이라는 새로운 개념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건대 보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체의 차별주의를 거부하는 일승(一乘, ekayāna)인 것이다. 일승(一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나만이, 혹은 내가 속한 어느 집단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일체의 구분의식이나 우월의식이나 특권의식의 거부를 말하는 것이다. 이 우월의식ㆍ특권의식의 거부가 곧 대승의 출발인 것이다. 이 대승정신이 바로 일승정신이요 보살정신이다. 이 보살정신이 바로 반야사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 반야사상의 최초의 명료한 규정이 바로 금강경인 것이다. 따라서 대승의 의미는 금강능단(金剛能斷)의 지혜의 실천, 금강경이 설하는 지혜를 실천하는 자에게만이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승과 대승의 구분 근거는 사회적 실천의 양의 다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금강지혜의 실천의 유무에 있는 것이다. 아무리 엄청난 양의 사회적 실천을 실현했다 하더라도 금강의 지혜의 실천이 없으면 그것은 대승이 아니라 곧 소승이다.

 

 

 

 

3. 무아와 소승

 

 

그렇다면, 금강의 지혜 즉 반야란 무엇인가? 그것이 곧 부처의 삼법인(三法印) 중의 가장 궁극적 법인이라 할 수 있는 제법무아(諸法無我)’에 대한 가장 심오하고 가장 보편적인 규정인 것이다. 금강경이야말로 무아(無我)’의 가장 원초적 의미를 규정한 대승의 가르침인 것이다. 내가 많은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데 보살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많은 중생을 제도하는 내가 있지 아니하다고 하는 아상(我相)의 부정, 금강경에서 말하는 사상(四相: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부정에 곧 그 보살의 원초적이고도 진실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현금 한국의 대부분의 스님은 소승이다. 따라서 한국불교는 소승불교다. 왜냐? 그들은 법당(法堂)에 앉아 있는 스님이고 절깐에 들락이는 신도들은 스님 아닌 보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님이 스님이라고 하는 아상(我相)을 버리고 있지를 않기 때문이다. 밥먹을 때도 따로 먹어야 하고, 법당에 들어갈 때도 따로 들어가고, 수도할 때도 따로 결제(結制)를 해야하고, 옷도 따로 입어야 하고, 방석조차도 다른 방석에 앉아야 하고, 모든 진리의 척도가 그들 중심이 되어있는 것이다. 공양주보살은 당연히 공양을 바쳐야 할 아랫것들이고, 자기들은 당연히 공양을 받아먹어야 할 윗것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신도들에게 절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은 절하는 마음자세를 잃어만 간다. 한국의 스님들이 자신을 보살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들은 아라한이지 보살이 아닌 것이다. 성철당은 성철 스님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성철 스님은 곧 성철보살인 것이다. 현재의 스님과 보살의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 부엌깐의 공양주보살이야말로 스님이요, 료사채의 자신들이야말로 보살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한국의 승려들은 모두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 아무개 스님이 아니라, 아무개 보살로 모두 그 이름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대승이 되는 것이다. 대승의 기준은 큰 수레가 아니다. 대승의 기준은 무아(無我)’일 뿐이다. 무아(無我)의 반야를 실천 못하는 자, 남북(南北)을 무론(無論)하고, 동서(東西)를 막론(莫論)하고, 고금(古今)을 물론(勿論)하고 다 소승(小乘)일 뿐인 것이다! 어찌 소승ㆍ대승이 고정된 함의나 대상을 가질 수 있으리오!

 

 

 

 

4. 금강경은 선이 아니다

 

 

올 봄, 초파일의 신록이 우거질 즈음의 일이었다. 나는 우연히 내설악(內雪岳)의 백담(百潭)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의 회주(會主) 큰스님께서 날 알아보시고 만남을 자청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오실(奧室)로 안내되었다. 법명(法名)이 오현(五鉉)! 아무리 그것을 뜯어 보아도 법명의 냄새가 없었다. 나는 우선 그것부터 여쭈었다.

 

그건 어릴 적부터의 내 이름입니다. 중이라 할 것이 따로 없으니 그 속명이 바로 내 법명이 된 것이지요.”

 

낌새가 좀 심상치 않았다.

 

내가 도올선생을 뵙자고 한 뜻은, …… 아무리 여기 백담에 백칸짜리 가람을 짓는다 한들, 그곳에 인물이 없고 지혜가 없으면 자연만 훼손하는 일이지 뭔 소용이 있겠소?”

 

오현 스님은 다짜고짜 나에게 이와같은 제안을 하시는 것이었다.

 

인류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만한 지혜의 책을 여기 백담에 앉아 쓰시오. 백담사가 만해(萬海) 이래 텅 비었소이다. 도올 선생이 여기 오신다면 내가 무금선원(無今禪院)을 통채로 내드리리다. 여기와서 무금선원(無今禪院) 방장이 되시오. 그리고 도올총림을 만드시오!”

 

스님의 거친 입담에 난 좀 소름이 끼치었다. 방장이니 총림이니 하는 말은 스님과 같이 책임있는 자리에 계신 분이 나같은 속인에게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방장이란 현 조계종 체제상으로 거의 스님의 최고의 존숭(尊崇)의 지위를 의미하는 말인 것이다. 이날 우리의 이야기는 하염없이 깊어만 갔다. 백담에 하염없이 졸졸 흐르는 푸르른 물소리와 함께……

 

스님이 어려서 출가한 시절, 산골의 대가람이라 해봤자 아주 극빈한 처지였다. 그리고 일제 강점시기 대처스님들이 절깐을 운영하던 시절이었고, 대처스님들의 생활은 절도가 있었으나 곤궁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스님도 배가 고파 절깐에 들어가 머리를 깎았는데, 또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죽으라고 하루종일 걸식을 해야만 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가 주로 걸식을 하러 다니는 동네에, 걸식을 하는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문둥이었다. 아마도 한하운님과 같이 학식 꽤나 있었던 문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걸인의 상당수가 문둥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오현 스님은 매번 그 문둥이만큼도 밥을 얻을 수 없었다. 그 문둥이는 샘나게도 밥을 곧잘 얻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스님을 바라보는 조선민중의 눈초리가 스님을 문둥이만큼도 대접을 하지 않는 분위기였던 탓도 있겠지만, 문둥이라는 전염병환자를 사람들은 공포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미리미리 밥을 주어 쫓아내곤 했던 것이다.

 

부화가 치밀어 견딜 수 있어야지요. 에이 비러먹을 중 때려치고 문둥이나 될란다!”

 

배고픈 오현 스님은 진실로 문둥이가 되기로 작심했다. 그리고 그 문둥이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 문둥이가 밥을 걸식하는 비법도 전수받고, 그 문둥이와 같이 한 깡통에 밥을 비벼먹고 추울 때는 추운 동굴 한 거적지 속에서 껴안고 자고 뒹굴었다.

 

처음에 이 문둥이는, 요놈 사미승, 맛 좀 봐라! 너 정말 문둥이 될래? 하고 참으로 날 문둥이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

 

그런데 오현 스님이 진실로 문둥이가 될려면 되라 하고 분별심을 버렸다는 것을 그 문둥이가 깨닫게 된 어느 날, 추운 동굴에서 하루를 지새우고 일어나보니 그 문둥이는 자취 없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먼동이 트는 새벽이슬에 젖은 한 종이쪽지가 뒹굴고 있었다.

 

너는 훌륭한 스님이 될 터이니 부디 성불(成佛)하거라!’

 

눈시울이 뜨거워진 사미승 오현은 문둥이가 사라진 허공을 향해 절을 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아하! 부처님이 문둥이구나!"

 

이 순간이 바로 그의 생애를 지배한 득도의 순간이었다.

 

 

버드나무 밑에서

찌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

 

 

이것은 한하운님의 소록도로 가는 길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그래! 부처님이 문둥이요, 문둥이가 부처님이다. 손톱이 빠지고 손가락이 뭉크러지고, 발톱이 빠지고 발가락이 떨어져나가고, 눈썹 빠지고 코가 뭉그러지고 귀가 찌그러지고, 살갖이 바위처럼 이그러지는, 날로 날로 아상(我相)이 없어져 가는 바로 그 문둥이야말로 부처님인 것이다. 내가 문둥이라면 뭔들 못하겠나? 조선의 스님들에게 묻겠다. 그대들은 과연 문둥이가 될 수 있는가?

 

나는 지금 이 인류의 최고의 지혜서, 금강경을 설()하기에 앞서 독자들에게 이 화두를 하나 던지려는 것이다. 불교는 관념의 종교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불교는 체험의 종교인 것이다.

 

 

부처님은 문둥이다

 

 

“‘시십마(是什麽)’이 뭐꼬가 아니라 그냥 뭐꼬라 한 김선생님의 일갈이 썩 마음에 들었소이다.”

무금선원(無今禪院)을 헐어버립시다.”

그건 뭔 말이요?”

 

나는 이런 제안을 하나 했다. 우리나라 불교가 좌선때문에 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스님들의 수도(修道) 열정 또한 우리나라 수행불교를 떠받치는 힘이다. 나는 백담사만이래도 결제방식을 바꾸자고 했다. 모든 선원이 똑같은 결제방식을 취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안거(安居)란 원래 부처님시대에는 하안거(夏安居)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안거(冬安居)는 불교가 티베트나 중국북방의 추운 지방에 와서 새롭게 발전한 것이다. 하안거(夏安居)란 인도의 기후풍토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우안거(雨安居), 3개월은 우기가 되어놔서 제방(諸方)에 행화(行化)하는 것이 심히 불편하고, 또 초목(草木)ㆍ소충(小蟲)을 살상(殺傷)할 염려가 있어 불제자들을 일개소(一個所)에 집합시켜 금족시킴으로써 수학(修學)을 깊게 하자는 일거양득의 제()였던 것이다. 안거(安居)라 해서 어떤 정해진 규칙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안거는 그냥 그대로 둔다 하더래도 동안거 3개월만이라도 스님들을 선발하여 나하고 집중적으로 불경을 공부하게 하는 새로운 제()를 설()합시다! 3개월 동안만이라도 용맹정진 스타일로 독서하고 토론하면서 정진하면, ‘()’ () 하나 들고 있는 것보다는, 천만 개의 간화(看話)가 쏟아질 것이외다.”

좋소! 거참 좋은 생각이구료!”

 

이날 나는 다음날의 일정 때문에 백담을 떠나와야 했다. 바람이 쌩쌩 스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질주하면서 나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뭔 또 쓸데없는 업을 지으려구. 너 같은 속인이 뭘 또 콧대 높은 스님들까지 교육한다구래! 그런 네 아상(我相)이나 지우려무나!”

 

금강경은 선()이 아니다. 금강경을 선으로 접근하는 모든 주석을 나는 취하지 않는다. 금강경은 오로지 대승(大乘)의 출발이다. 대승됨의 최초의 기준이요, 최후의 기준이다. 만약 선이 금강경과 그 의취가 부합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선이 대승의 정신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버트란드 럿셀경은 말했다

 

 

20세기가 인류의 어느 세기보다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지식의 증대를 가져왔지만, 불행하게도 그에 상응하는 지혜의 증대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제 21세기는 지식의 세기가 아닌 지혜의 세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서구의 소피아는 연금술에 빠지고 말았다. 동양의 금강의 지혜는 연단(煉丹)을 부정하고 아()ㆍ인()ㆍ중생(衆生)ㆍ수자(壽者)를 부정했다. 이제 우리는 금강의 지혜에서 모든 종교적 편견을 회통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발견해야 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제 금강의 문을 두드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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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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