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나는 과연 어떠한 종교를 믿는 사람일까? 나는 독실한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났다. 나의 어머니는 이화학당을 다니면서 개화의 물결의 선두에 섰고 나의 아버지 역시 휘문고보 시절부터 기독교야말로 우리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라는 믿음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개화된 의사집안 광제병원 일가의 막둥이로 태어난 나는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받았고 장성하여서는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까지 들어갔다.
그렇지만 우리 집안은 증조부가 조선말기에 종2품 전라도병마절도사, 중추원(中樞院) 칙임의관(勅任議官)까지 지낸 사람이고, 할아버지도 무과에 급제하여 동복군수를 지내었다. 조부는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덕수궁돌담 쌓는 작업을 총감독하고 정3품 당상관의 지위에까지 오른 사람인데, 일제에 강점을 당하자 일체의 작위를 거부하고 은거한 선비였다. 그러니 우리 집안은 고지식한 전통적 사대부 가문의 유교적 풍도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분위기에 깊게 물들여져 있었다. 그것이 내가 지금 한시(漢詩)까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한학(漢學)의 소양의 밑거름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유교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의 언어가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내가 학문을 하겠다는 실존적 자각을 하게 되고부터 나의 사유의 출발이 된 경전은 유교경전이 아닌, 도가경전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학문의 적통은 『노자』와 『장자』, 즉 노장사상이다. 나의 기철학의 출발이 『노자도덕경』에서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은 내가 누누이 언명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학문적으로 노장철학 방면에 있어서는 세계적으로 어느 누구도 범치못할 확고한 문헌실력과 학문방법을 다져왔다. 뿐만 아니라 나는 춘추제가경전 중에서 외도라 할 수 있는 『한비자』ㆍ『묵자』ㆍ『순자』ㆍ『회남자』ㆍ『손자』ㆍ『내경』 등의 외경을 폭넓게 공부했으니, 법가(法家), 묵가(墨家), 음양가(陰陽家)라고 말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대학시절부터 이미 삭발하고 절깐에 들어가 입산수도(入山修道)하는 승려의 체험을 했고, 또 『대장경』이라는 방대한 서물 속에서 허우적거린 지도 벌써 30년을 지냈을 뿐 아니라, 불교계에 파문을 던지는 적지 않은 서적을 썼고 여기 저기 대찰에서 설법(說法)을 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으니 독실한 불자라 말해도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당신은 기독교인이요? 불교인이요? 유교인이요? 도교인이요? 선교인이요? 천도교인이요? 원불교인이요? 역술가요? 침술가요? 명리가요? 도대체 뭐요?
도대체 내 종교가 무엇인가? 나는 과연 어떤 종교의 사람이라 해야할 것인가? 이런 질문은 정말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나와 같은 삶의 역정을 가진 사람이 타인에게 줄 수 있는 혼란은 쉽게 이해가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곤혹스러운 것은 내가 아니다. 바로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그 사람들이 곤혹스러운 것이다.
‘당신의 종교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은 그 당신이 꼭 어느 특정 종교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질 때만이 성립할 수 있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결하고 소박하게 나의 평소 견해를 여기 밝히려 한다. 이것은 바로 『금강경(金剛經)』이라는 서물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나의 인생을 살아온 자그마한 실존적 원칙같은 것이래서 많은 사람에게 여실하게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시대에 같은 공기를 들여마시고 사는 한 사람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같이 자유로운 ‘민주세상’에 한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고 있다는 그 여실한 모습이야, 범법을 하지 않는 이상, 윽박 지르거나 묵살하거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1명제: 종교는 신앙이 아니다. 종교는 더더욱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종교는 꼭 믿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생각해 보자! 여기 어떤 사람이 눈사람이 땡볕 아래서 절대 녹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고 하자! 그 믿음이 그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것이었고 확고한 것이었다 한들, 눈사람을 땡볕에 놓고 보니 녹더라는 현상의 분석보다 구극적으로 더 강렬하고 보편적인 믿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그에게 눈사람은 녹지 않는다는 믿음이 성립되었다 하더래도, 또 그와 같은 믿음이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공유된다 하더래도, 결국 눈사람이 땡볕 더위 속에서 녹는다는 사실은 매우 쉽게 관찰될 수 있는 사실로서 보다 일상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믿음’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믿음들이 더 강렬한 믿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믿지 않아도, 세밀하게 깊게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냥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꼭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부활했다)는 것을 믿어야만 종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그냥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 선생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한번 기억해보자!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 있는 말씀을: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 얼마나 훌륭한 말씀인가?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온전하게 알 때에는 폐하리라 한 것은 곧 부분적으로 아는 것에서 전체적으로 아는 것으로 확대되어 갈 때에, 이런 지식의 확대만으로도 훌륭한 깨달음, 훌륭한 종교가 성립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말씀이다. 맹자(孟子)는 이것을 ‘확이충지(擴而充之)’라 하지 않았는가? 여기 ‘거울’ 얘기가 나오는데, 희랍시대의 거울이란, 박물관에 진열된 우리 옛날 거울도 마찬가지였지만, 요새와 같은 유리거울이 아니었고, 동판거울(동경銅鏡)이었던 것이다. 쑤세미에 돌가루를 문대어 닦아놓은 동판거울에 얼굴을 비추어보면 항상 희미하고 뿌열 것이다. 이런 비유는 실상 고린도라는 희랍의 도시에서 동판거울이 많이 생산되었었기 때문에 생겨난 비유였다.
그 뿌연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과도 같은 희미한 인식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들여다보는 것과도 같은 맑은 인식으로 우리의 앎이 확대되고 깊어지는 현상을 사도바울 선생께서는 ‘사랑’이라 표현했던 것이다. 즉 사랑이란 부분적인 앎에서 전체적인 앎으로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부분적으로 알 때보다는 온전하게 전체적으로 알 때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괴팍한 남편(아내)일지라도 전체적으로 알고 이해할 때에 비로소 참으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죽는가? 사는가? 꼭 죽을 것인가? 죽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인가? 죽으면 못 살아나는 것인가? 죽었다가도 살아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모든 질문이 결국 부분적 앞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온전한 앎이 올 때에는 이러한 부분적 앎이 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더 오아(either-or, 이것 아니면 저것)의 질문이 다 폐하게 되는 것이다. 왜 꼭 종교가 신앙이 되어야 하는가? 종교가 사랑이 될 수도 있고, 종교가 단순한 지식이 될 수도 있고, 종교가 지식의 온전한 확대에서 오는 깨달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하여 하나의 고정된 믿음체계나 교리체계를 신앙의 대상으로 강요하는 것만이 종교라고 생각하는가? 나 도올은 말한다. 종교는 신앙이 아니다.
제2명제: 종교의 주제는 신이 아니다. 신이 없이도 얼마든지 종교가 될 수가 있다.
(방편적 언어)
이 두 번째 명제는 실상 상식적인 경우, 제1명제 속에서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개 상식적으로 신(神, God)을 말하는 경우, 신은 초월적인 존재자가 되어야만 하고, 초월적인 존재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곧 바로 믿음 즉 신앙(Faith)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자이고 그것이 초월적이라고 하는 생각은, 신은 우리의 상식적 감관에는 포착되지 아니하며 그의 언어ㆍ행동방식이 우리의 상식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상황이 많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상식에 기초한 합리적 이성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고, 따라서 이성을 초월하는 비합리적 신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생각을 전제로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신앙과 이성의 이원론적 대립이라고 하는 서양 중세철학의 케케묵은 전형적 개념의 짝의 본질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꼭 믿음이어야만 할 필요가 없다고 할 때 이러한 이원적 대립은 근본적으로 해소되어버리고 또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신의 존재가 종교의 필요충분조건일 필요가 하나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신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미켈란제로가 그린 털보아저씨의 모습일까? 그렇지 않다면 과연 신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 자체가 매우 우매한 질문이기 때문에 나는 구차스럽게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또 그러한 질문을 진지하게 내가 인정한다고 할 때는 나는 그러한 질문에 방편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모든 대답을 예비하고 있지만, 너무 갑자기 결론을 내리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기 때문에, 나의 구업(口業)은 여기서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토끼뿔은 몇 그램이냐?”하고 누가 다짜고짜 물을 때, 토끼뿔의 중량에 대한 세세한 논의를 하면서 세월을 낭비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있지 않은 것에 대하여 그 존재의 가능태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 때문에 그 존재의 속성에 관하여 논의를 한다는 것은, 때로 재미가 있거나 유의미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아무런 소득이 없을 뿐 아니라 결말이 날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나가다가 길거리에서 한 옛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다짜고짜 “요즘은 마누라 안 때리냐?”(Did you stop beating your wife?)라고 나에게 묻는다면, 마침 내가 평소 마누라를 패던 사람이라면 이 질문은 대답이 가능할 수 있어도, 근본적으로 내가 마누라를 팬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혀 “응”, “아니”라는 대답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판단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떤 전제(presupposition)의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가 이러한 문화적 전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혀 다른 문화의 언어께임 속에서 살고 있을 때 우리는 그러한 질문에 대답을 할 필요를 근원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하나냐? 둘이냐?’ ‘신은 무엇이냐?’ 이와 같은 질문들은 ‘당신은 요즈음도 부인을 때리십니까?’ ‘술 끊으셨습니까?’와 동일한 류의 질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신은’이라는 주부(主部) 속에는 이미 ‘신의 존재성(存在性)’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 질문은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은’이라는 말은 이미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신은 존재하는가?’와 같은 무의미한 토톨로지(tautology, 동어반복)가 되어버릴 뿐이다. ‘까만 새는 까만가?’라는 질문에 새로운 내용을 첨가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은 누구든지 상식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소소한 끝도 없는 이야기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단지 신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그 신이라는 주부(主部)가 주부로서 그냥 성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신이라는 말을 하는 화자(話者)의 의미체계에 있어서 규정되고 있는 수많은 숨은 술부적(述部的) 전제를 확실히 드러내지 않는 한, 그 어떠한 논의도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신이 ‘사랑’이었다면 이것은 곧 ‘사랑은 존재하는가?’라는 명제로 환원될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신이 ‘전지전능한 아저씨’였다면, 그 질문은 ‘전지전능한 아저씨는 존재하는가?’가 될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신이 ‘내 운명을 관장하는 힘’이었다면, 그 질문은 곧 ‘내 운명을 관장하는 힘은 존재하는가?’라는 명제로 환원될 뿐이라는 것이다. 신이라는 주어의 술부적 속성이 기술(Description)될 때만이 그 맥락에서 구체적이고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 보통사람들은 이런 말을 알아듣는다 해도, 이런 엄밀한 철학적 규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냥 ‘하나님’, ‘하느님’을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보통 종교를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무엇인지 규정할 필요도 없이 그냥 믿으라는 것이다. 도대체 뭘 어떻게 믿으라는 것인가?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신은 어떤 전지전능한 유일한 절대자, 우주의 시공 속의 모든 존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장하는 절대자라는 어떤 막연한 ‘초월신=유일신’이라는 생각의 도식에 사로잡혀 있다. 절대자가 있으니 믿으라는 것이다. 절대자가 있다는 것(존재)과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당위는 도대체 어떠한 필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떠한 근거 위에서 그 필연성이 도출되는 것일까?
(종교는 신학이 아니다)
그런데 믿음의 대상으로서 신(神)을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일신’ 즉 하나밖에 없는 신을 고집한다.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있을 수 없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믿는 신만이 우주 전체에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신이라는 것이다. ‘유일무이하게 존재한다는 것’, 참 그것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나, 유일무이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든 타 존재를 배제한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타 존재를 배제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은, 스피노자의 말대로 존재(存在)하는 모든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보다 쉽게 말하면 우주에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은 우주 전체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존재가 우주 밖에 있다면 그 존재는 또다시 한정되는 일자(一者)가 될 수밖에 없음으로, 타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유일신임을 자처하는 모든 신들이 이름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한정된 모습을 가지고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다. 여기서 ‘존재한다’는 뜻은 저기 있는 저 나무나 의자처럼 ‘실체로서 있다’는 뜻이다. 그럼 과연 신이란 우주 밖에 있거나 우주 내에 있는 어떤 물체인가??
흔히 유일신이라고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서 경배하는 존재의 대표적 예로서 우리는 야훼, 혹은 여호와 하나님, 혹은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은 모두 한결같이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주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하나님이라고 강변한다. 이 말에 거슬렸다간 뼈도 못추리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이 유일무이한 신(神)이 아니라 타신(他神)이 존재(存在)하고 있다고 역설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의 백성에게 내리신 그 유명한 십계명(Ten Commandments)의 첫 계명은 무엇이었든가?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공동번역 「출애굽기」 20:3)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me.(RSV)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는 것은 그 말을 하는 당신 자신이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직접 말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신이라고 하는 것의 구체적 의미는, 많은 신들이 있는데 딴 신들은 섬기지 말고, 나만을 섬기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해석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언명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유일신이라고 믿는 여호와 하나님 당신 자신이야말로 다신론자이신 것이다. ‘유일신’이라 할 때 유일(only)의 실제 의미는 ‘유일하게 받드는’, ‘유일한 방식으로 모시는’, ‘유일한 것처럼 섬기는’ 이라고 하는 부사적 의미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야훼 자신이 유일자(者)임을 자처하는 한,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다자성(多者性)인 것이다. 유일(唯一)은 파다(頗多)를 전제로 한다. 일(一)은 곧 다(多)다. 일은 곧 다의 전제 없이 성립할 수가 없는 명언(名言)에 불과한 것이다.
너희는 다른 신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 (「출애굽기」 34:14).
야훼는 바로 다른 신들을 질투하는 많은 신들 중의 일자(一者)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신관을 자랑하는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조차 ‘유일신’ 관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다. 신ㆍ구약성경이 모두 잡신(雜神)을 존재론적으로 전제한 위에서 성립한 유일신을 말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 내 말은 아무리 위대한 성서신학자라도 부정할 수가 없다. 그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말씀에 대한 거역일 뿐이다. 유일신관은 곧 성서를 부정하는 불경(不敬)이다. 우리가 신을 존재로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결론이다. 신이 존재자인 한 그것은 많은 존재 중의 일자일 수밖에 없다. 야훼래야 그것은 역사적으로 잡신(雜神)을 물리친 만신(萬神)일 뿐이다. 이러한 야훼의 유일신화는 유대민족사에 있어서 다윗왕조의 성립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즉 ‘지상에서의 통일왕조의 성립’과, ‘잡신의 통일’의 일치현상은 모든 인류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보편현상인 것이다. 정치권력의 통일과 신적 권력의 통일은 상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신(神) 중심으로 종교를 논할 수 있을까? 그 많은 신의 역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 많은 유일신들을 어떻게 다 취급할 것인가? 부뚜막에는 조왕신(부뚜막신)이 있고, 툇마루에는 성주대감이 있고, 장독대에는 항아리신이 있고, 돼지우리에는 돈신이 있다. 인간의 이름보다도 더 많을 신들을 따라 종교를 논한다면 과연 종교가 논구될 수 있을 것인가? 신의 족보를 따지려해도 그것은 최소한 우리민족의 대동보(大同譜)를 따지는 것보다 더 복잡할 것이니 과연 어느 장단에 그 유일성을 맞출 것이며, 어느 이름에 그 기준을 짤 것인가?
나는 말한다. 종교는 신학이 아니다. 신학이 진정한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신(神)의 학(學)’[신에 관한 배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신학이 만약 신의 학이라면 그것은 신의 족보학(the Genealogies of Gods), 신의 전기학(the Biographies of Gods)에 불과한 것이다. 실상 모든 신학이라고 하는 것들의 현금(現今)의 수준이, 아무리 정교한 레토릭을 가장해도, 세계적으로 족보학ㆍ전기학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는 신학이 아니다. 종교는 철학일 수도 있는 것이요, 종교는 문학일 수도 있는 것이요, 종교는 예술일 수도 있는 것이요, 종교는 과학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 종교가 신학이어야만 하는가?
종교를 신학이라고 생각하는 옹졸한 자들은 모두 기독교나 그 유사한 아류의 초월신관을 기준으로 삼아 그런 주장을 편다. 그러나 세계종교사에 있어서, 종교학에 있어서, 그러한 편협한 규정은 불교의 엄존으로 말미암아 수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불교는 분명이 지구의 엄청난 인구가 신앙으로 삼고 있는 고등종교이다. 그것은 종교로서 현실적으로 엄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는 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불교는 신을 믿지 않는다. 불교에는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자가 없는 것이다. 단언하건대 불교는 무신론인 것이다. 무신론이 어떻게 종교가 될 수 있는가?
여기 우리는 불교가 무신론이라는 테제를 보다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무신론’이란 ‘신이 없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이 없다’라는 말은 ‘신이 있는데 없다’가 된다. 다시 말해서 신이 있는데 그 존재성이 부정된다는 뜻이 되므로, 신이 없다고 말하는 순간에 곧 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는 세속적 의미에서 무신론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불교는 무신론이 아니다. 불교를 굳이 무신론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근원적으로 신이 존재와 비존재라고 하는 인간의 언어영역 속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는 맥락에서만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신의 실체성 즉 존재성이 근원적으로 성립할 수 없으므로 역시 무신론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신론’이라는 용어를 자랑스럽게 당당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종교의 주제는 신이 아닌 것이다. 신이 없이도 얼마든지 종교는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는 심리학이 될 수도 있는 것이요, 철학적 성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학문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모두 종교적 주제와 만나게 된다. 어찌 신학만을 종교의 유일한 통로라 말할 수 있으며, 어찌 신만을 종교의 유일한 주제라 말할 수 있으랴!
제3명제: 종교는 제도가 아니다.
(제도 속 종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가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절깐에 다니면 부처를 믿는다 하고, 나처럼 일요일날 교회도 아니 가고 절에도 아니 가면 예수도 안 믿고, 부처도 안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교회나 절깐에 가는 것을 예수 믿고 부처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극장 가면서 영화 믿는다고 하고, 식당 가면서 음식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근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영화야말로 나의 삶의 구원이요, 영화를 보는 행위 그 자체가 나의 삶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믿는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의 영화에 대한 특수한 믿음과 그의 극장 가는 행위가 전적으로 일치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한 일이다.
대강 ‘제도적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나 개인 홀로만의 행위가 아니라, 개인들의 집단으로서의 행위를 전제로 한다. 대강 인간의 제도라는 것은 인간집단의 어떤 기능의 유지를 위하여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는 원래 인간 개인의 내면의 요구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고 또 궁극적으로 나의 내면의 구원이라든가 평온이라든가 해탈이라든가 고통의 벗어남이라든가 하는 매우 사적(私的)인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종교의 기능이 사회적 집단을 통한 대중적 행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원숭이나 고릴라도 꼭 떼지어 같이 살고, 나도 생각해보면, 혼자 있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 분명 인간은 사회적 군집생활을 하게 되어 있는 종자인 것 같다. 그러니 종교생활이라는 것도 자연히 군집생활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 같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인간의 사회생활의 제 형태 속에 내재하며, 그러한 사회적 형태의 존속을 위하여 필요하게 되는 제 요소, 예를 들면, 건물, 조직, 규약, 경제 등등의 요소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를 생각할 때 종교적 제도를 부인할 수는 없다. 불교를 생각할 때 절깐을 부인할 수 없고, 기독교를 생각할 때 교회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종교가 제도와 공존하고, 종교가 제도 속에 내재한다고 해서, 그 제도가 곧 종교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20세기 동아시아 역사에 있어서 희한한 인물이 한명 있다. 캄보디아라는 나라의 크메르혁명을 주도한 폴 포트(Pol Pot, 1925~98)라는 인물이다. 폴 포트라고 하면 흔히 ‘킬링필드’를 생각하고, 대규모의 인민학살과 잔혹하고 끔찍한 혁명극을 연상케 된다. 따라서 폴 포트하면 매우 냉혹하고 잔악하게 생긴 혁명가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폴 포트라는 인물은 개인적으로 만나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매우 인자하고 조용하고 온화하고 과묵하고 설득력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성장배경도 아주 유복한,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불란서유학을 했고, 사상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지식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1975년 4월에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정권을 장악하여 1979년 1월에 다시 월남군에 의하여 축출될 때까지, 자그마치 150만 명 이상의 자국민이 살상되었으며 20만 명 이상이 공식처형된 인류사에 그 유례를 보기 힘든 피의 역사를 남겼던 것이다.
그의 오류는 바로 이 인간세의 제도의 부정에 있었던 것이다. 『노자(老子)』 80장에 보면 ‘소국과민(小國寡民)’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그 곳에 ‘이웃 나라간에 닭소리ㆍ개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함이 없다’[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不相往來]라는 매우 목가적인 표현이 있는데, 아마도 폴 포트야말로 노자(老子)가 80장에서 설파한 ‘소국과민’의 농업주의적 평등사회(agrarian egalitarianism)를 극단적으로 실현하려 했던 과격한 이상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는 근본적으로 도시를 철폐해버렸다. 화폐를 없애버리고, 시장을 없애버리고, 학교를 없애버리고, 신문을 없애버리고, 종교를 없애버리고, 모든 사유재산을 없애버렸다. 그의 사고는 극단적인 반문명론적 해탈주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사람을 순박하고 무지한 원시적 농경사회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만이, 가장 원천적으로, 구조적으로 서양의 제국주의의 손길을 벗어나고 오염되지 않은 정결한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판단이 원칙적으로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원칙의 급격한 실현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럽고 원초적인 요구를 위배한 것이다. 도시문명이라는 제도 그 자체가 인간이 수천 년을 걸쳐 구축해온 자연스러운 업(業)이었다. 그 업(業)의 부정이 폴 포트 자신의 해탈을 이루었을지는 몰라도, 수많은 국민을 기아와 질병과 공포의 아수라 속으로 몰아넣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종교는 분명 제도 속에 있다. 그리고 제도 역시 인간의 자연스러운 요구이다. 그러나 제도가 요청된다 해서, 제도가 곧 종교는 아니다. 제도는 종교를 질식시킨다. 제도는 어디까지나 종교의 방편일 뿐이다. 내가 절깐에 앉아있다고 곧 불교인일 수는 없으며, 내가 교회에 앉아있다고 곧 기독교인일 수는 없다. 제도가 곧 그 종교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기실 모든 종교의 역사는 제도와 반제도의 투쟁의 역사였던 것이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기존의 카톨릭 제도와 투쟁하는 새로운 반제도적 성령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령주의의 승리는 또 새로운 제도로 고착된다. 그러면 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제도를 부정하는 새로운 성령주의가 탄생케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제도와 반제도의 변증법은 모든 종교사에 공통으로 구가되는 리듬이다.
(고정불변의 실체)
그런데 사실 이러한 논의는 좀 피상적이다. 아직 우리의 논의가 ‘제도’라고 하는 것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질 못하기 때문이다. 제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하여 만들어 내는 유위적(有爲的) 세계의 총칭이다. 무위(無爲)란 스스로 그러한[자연(自然)] 것임에 반해 유위(有爲)란 인간이 만든다(man-made)고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도라는 것은 대개 약속(convention)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제도란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방편적으로 만들어 내는 모든 약속체계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도 약속이고, 가정도 약속이고, 집도 하나의 약속이다. 그리고 학교도 약속이고, 입시도 약속이고, 선거도 약속이고, 정부부처조직도 약속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유지하기 위한 규율이나 규칙, 법률이나 율법 이 모두가 다 약속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의 체계에 있어서 우리가 흔히 사회제도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가장 본질적인 제도가 인간존재 그 자체에 내장되어 있다. 그 제도란 바로 ‘언어(言語)’라는 것이다. 언어야말로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본질적인 약속체계인 것이다. 언어는 분명, 인간이 만든 것이며, 인간존재의 내재적 절대적 조건이 아닌 외재적 사회적 규약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한에 있어서는 언어를 부정할 수가 없다. 오로지 홀로의 해탈을 추구하는 자에 있어서는 언어는 부정될 수 있지만, 사회적 삶을 추구하는 모든 인간에게 언어는 필요불가결한 존재의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언어가 제도인 이상, 인간의 언어 또한 그것이 곧 종교가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제도가 곧 종교가 아니라면, 언어 또한 곧 종교가 아닌 것이다.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의 말씀이나, 불타의 말씀이 곧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나 절깐이 곧 종교가 아니라면 마찬가지로 예수의 말씀을 적어놓은 『성경』이나, 불타의 말씀을 적어놓은 불경이 곧 종교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결국 종교의 제도적 측면의 유지를 위해서 요구된 언어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의 설법시기와 장소를 AD 30~33년 갈릴리의 어느 시골로 잡는다고 한다면, 예수의 말씀은 그 순간에 듣는 사람의 고막을 울리고 허공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이것은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너무도 상식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그 말씀을 문서로, 언어로 기록했다는 것은 이미 그것을 그렇게 가시적 형태로 보존했어야 할 어떤 제도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한 제도적 요구가 없었다면 『성경』이라는 언어체계는 존속했을 이유가 없다. 물론 『불경』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교회가 요구한 것이고, 『불경』은 절깐이 요구한 것이지, 교회가 있기 전에 『성경』이 있었고, 절깐이 있기 전에 『불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다. 교회ㆍ사찰이라는 종교제도의 발생 이전에는 오직 예수와 불타의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은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그 말씀대로 어떤 고정불변한 절대적 실체적 사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성경』이나 『불경』이야말로 종교의 가장 깊은 본질이라고 생각해온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이러한 논리는 너무도 급작스레 짧은 지면에서 직언(直言)되기 때문에, 의아스럽거나 충격으로 와 닿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다.
『원불교교전』이 20세기 초를 산 전라도인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이라는 각자(覺者)의 말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또 『원불교교전』의 성립이 원불교라는 종단의 성립 이후의 사건이라는 사실 또한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원불교교전의 성립은 원불교라는 사회적 제도의 자내적 요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교전』 편찬내용이 역사적 제도적 요구의 변천에 따라 변천되어가는 것 또한 아주 평범하고 진실한 사실이다. 불교나 기독교나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교전』 이전에는 오로지 초기집단을 구성한 인간들의 행위가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행위는 말로 다 나타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의 언어적(제도적) 측면을 총칭하여 ‘교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교리가 곧 종교는 아니다. 불교의 교리가 곧 종교(불교)가 아니며, 기독교의 교리가 곧 종교(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교리(敎理)란 곧 교(敎)의 리(理)요, 교의 리란 곧 교회조직이 요구한 리인 것이다. 교회가 없다면 교리가 필요할 이치가 없는 것이다. 교리는 어느 경우에도 종교가 아닌 것이다. 교리는 종교가 요구하는 제도가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는 반드시 종교조직이라는 이해관계와 얽혀있다. 인간의 사회조직이라는 것은 이해가 발생시키는 배타관계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리는 인간세의 이해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여 온 인류의 종교사는 바로 이 교리간의 충돌과 분쟁의 역사인 것이다. 그것은 제도적 이해 관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도 화평한 듯이 보이는 깊은 종교심성의 인도인들이건만 항상 종교분쟁으로 나라가 갈라지고 지도자의 암살과 전쟁과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모두 이 교리간의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종교를 곧바로 교리라고 이해한다면 종교는 중상, 모략, 전쟁, 질투, 암살, 음모, 살상, 등등의 단어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 가장 큰 죄악을 저질러온 것이 바로 종교요, 종교간의 분쟁인 것이다. 인간세의 전쟁의 대부분의 명분이 바로 이 종교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종교란 곧 교리인 것이다. 그것은 제도화된 종교(institutionalized religion)를 말하는 것이다. 종교는 분명 교리와 더불어 존립(存立)한다. 그러나 종교는 분명 교리 이전의 그 무엇이다. 종교는 교리 이전의 그 무엇이 아니면 아니 되는 것이다.
종교를 교리라고 이해하게 되면 다른 종교를 가진 아버지와 아들이 싸움을 하게 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반목하게 될 뿐이요, 더 크게는 나라와 나라가 전쟁하게 될 뿐인 것이다. 종교는 분명 교리가 아니다. 이것은 제도가 곧 종교일 수가 없다고 하는 나의 논의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다. 『성경』도 『불경』도 거시적으로는 모두 교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경(經)에서 종교를 찾는다고 하는 생각은 가장 진실된 생각 같지만 실상 그것은 종교의 본질을 영원히 꿰뚫어볼 수 없는 우매한 자들의 유치한 소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경(經)의 그릇된 절대성을 유포한 민족이 바로 유대민족이요, 유대민족의 그러한 종교문화는 그들의 민족사적 특수 상황과 운명에서 기인된 것일 뿐이다.
(유일교에로의 해답)
자아! 한번 다시 생각해보자! 종교란 믿음이 아니요, 종교란 하느님이 아니요, 종교란 제도도 아니다. 종교란 성경도 아니요, 말씀도 아니요, 교리도 아니요, 인간의 언어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종교란 무엇이란 말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바로 나는 여기에 대답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의 입을 열어서는 아니된다. 입을 여는 순간, 나는 ‘아닌’ 또 하나의 종교를 말해버리거나, 나 자신이 하나의 종교를 만들거나, 또 하나의 제도를 만드는 죄업(罪業)을 쌓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침묵한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여기 바로 내가 『금강경(金剛經)』을 설(說)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금강경』은 내가 발견한 유일한 종교에로의 해답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침묵할지어다. 구태여 나의 구업(口業)을 빌리지 않아도 『금강경』이 그 질문에 답할 것이다. 내가 말하면 그것은 나 김용옥의 소견(所見)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금강경』이란, 어떤 종교조직의 교리경전이라기보다는, 두 밀레니엄 동안 한강의 모래알 수만큼의 한강들에 가득찬 모래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여 온 진리체계인 것이다. 나의 설법은 나 개인의 독단이 되기 쉽다. 그러나 『금강경』의 설법은 그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역사의 축적된 진리의 기회가 설법하는 것이다. ‘나’는 침묵하지만, 『금강경』은 침묵하지 아니한다.
나는 불교의 교리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금강경(金剛經)』을 설(說)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키로 『금강경(金剛經)』은 불교를 말하는 경전이 아니다. 경(經)에 종교의 본질이 있지 아니하다고 말한 내가 어찌 『금강경』이 불교의 구극적 진리라 말할손가? 『금강경(金剛經)』은 불교를 말하지 아니한다. 그것은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유교든, 도교든, 모든 교(敎, 제도)를 통틀어 그 이전에 교(敎)가 소기했던 바의 가장 궁극적 진리에 대한 몇 가지 통찰을 설(說)하고 있을 뿐이다. 『금강경』은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통찰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나는 독자들이 『금강경』에서 그 해답을 발견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 나는 독자들이 『금강경』이 설(說)하는 몇몇의 통찰에 감입(感入)됨으로서, 불교도든, 기독교도이든, 이슬람교도이든, 유교도이든, 자기 나름대로의 해답을 구성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답의 구성을 위하여 나는 『금강경(金剛經)』 이상의 좋은 레퍼런스(참고서)는 없다고 단언한다.
새로운 21세기의 인류의 과제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나는 말한다. 그 첫째가 자연과 인간의 슬기로운 공존(ecological concern)이요, 그 둘째가 모든 종교ㆍ이념간의 배타의 해소(religious coexistence)요, 그 세째가 학문의 생활화(The decompartmentalization of human intelligence)이다. 인간세의 화평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가 바로 이 ‘종교’라는 문화현상이었다. 종교가 제각기 인류를 구원한다고 선포하면서, 종교야말로 인간의 죄악에 대한 평화로운 해결이라고 선전하면서, 종교야말로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원천이라고 선언하면서, 종교야말로 인류를 억압하고 대규모의 잔악한 살상을 자행하는 명분이 되었으며,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무지하게 만드는 모든 끔찍한 죄악의 온상이 되었으며, 질투와 배타와 저주의 원천이 되어왔다는 이 인류사의 파라독스야말로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무명(無明)의 소치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종교라는 제도를 말해서는 아니 된다. 이제 우리는 종교 그 자체를 이야기해야 되는 것이다. 종교를 나의 주관적 믿음의 체계로서 접근하거나, 신의 권위나 이름으로 접근하거나, 제도나 규약의 이해로서 접근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서로 알목하고 배타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하기만 할 수밖에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한다고 하는 종교가, 나의 마음에 화평을 가져온다고 하는 종교가, 나의 고통을 덜어준다고 하는 종교가 어찌하여 서로 알목하고 배타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해야만 하는가?
종교간의 배타의 문제에 오면, 우리는 대체적으로 불교도들보다는 기독교도들에게서 매우 강렬한 배타의식을 직면하게 된다. 나의 긍정이 타의 부정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생각이 그들의 ‘전도주의(Evangelism)’의 본질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기독교의 교리의 진정한 본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유대민족의 선민의식(Chosen People)의 연장태일 뿐이요, 유대민족의 선민의식이란 팔레스타인이나 이방민족과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유랑하는 유목민족의 역사적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후천적ㆍ문화적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파기되어야 할 ‘구약’, 즉 ‘옛 약속’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약’ 즉 ‘새로운 약속’이 아닌 것이다. 새로운 약속이란 나만 잘났다고 하는 선민의식의 파기에서 성립하는 보편주의적 사랑의 약속인 것이다. 신약의 약속은 유대인만을 위한 사도가 아닌 이방인을 위한 사도(Apostle for Gentiles), 바울을 통하여 만방에 전파된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더욱 희한한 사태는 만교(萬敎)를 통섭(統攝)해야 할 불교가 매우 배타적인 의식에 사로잡혀 간다는 것이다. 많은 스님들이 불교만이 구원과 해탈의 유일한 길이라고 아집상을 틀고 앉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배타주의적 환경과의 접촉에서 반사적으로 형성되어간 병폐라 할 수 있다. 내가 원광대학교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원불교도들과 많은 접촉을 가지게 되었고 또 깊은 이해를 하게 되었는데, 원불교도 애초에는 조선의 땅의 고유한 환경속에서 피어난 혁신불교운동이었다. 그런데 원불교에서 내가 가장 상찬(賞讚)하는 것은, 바로 그 핵심교리에 있어서 모든 교리의 포용, 인간세의 모든 종교와의 화해를 적극적으로 표방하고 또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잠(鯷岑)의 시골구석에서 태어났건만 그 생각의 포용성이 소박하면서도 세계의 여타 종교의 편협성을 뛰어넘는 면이 있다고 할 것이다.
배타(排他)는 결국 배자(排自)이다. 남을 배척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배척하는 것이요, 나를 배척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옹졸하고 졸렬하고 치졸하게 오그려 붙이는 것이다. 배타를 통해 나를 확장한다는 것은 일시적인 성과를 거둘지 몰라도 결국은 나의 축소와 소멸을 초래할 뿐인 것이다. 20세기 동안 기독교는 조선땅에서 놀라운 확대의 일로를 걸었다. 그러한 확대는 ‘배타적 전도주의(exclusive evangelism)’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확산이 이제 축소의 일로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유기체의 법칙이다. 21세기 조선의 기독교는 결코 20세기의 팽창주의 추세를 유지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팽창주의적 확대만을 모색한다면 기독교는 이 땅에서 불운한 역방향의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배타에 배타로 맞서서는 아니 된다. 배타는 자기논리에 의하여 붕괴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역사의 정칙이다. 배타에는, 수모가 따를지라도, 끊임없는 포용의 자세로 임할 것이다. 나는 이 나의 『금강경』 강해를 불교도가 듣기보다는, 기독교집안에서 자라난 편견 없는 많은 젊은이들이 들어주기를 바란다. 종교간의 갈등의 해소라는, 21세기 문명사적 과제상황의 근원적인 해결의 열쇠가 이 『금강경(金剛經)』, 속에 다소곳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만난 인도의 한 현자(賢者)의 말을 나는 생각한다:
‘종교란 본시 사람의 수만큼 각기 다른 종교가 필요한 것이지요. 종교에 대해 일원적인 논의를 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훌륭한 종교의 교사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제각기 다른 종교의 형태를 발견해주는 것입니다. 마치 옷이 사람마다 그 취향과 색감과 크기가 모두 다르듯이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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