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金剛經)』에 대하여
1. 선종의 대표경전으로 착각된 역사적 이유
조선의 불교는 『금강경(金剛經)』을 적통으로 한다라고 말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대장경(大藏經)』이라고 하는 거대한 바구니 속에 삼장(三藏)의 호한(浩瀚)한 경전이 즐비하지만, 우리 민중이 실제로 불교를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독송하고 암송하고 낭송하고 인용하는 소의경전을 꼽으라 하면 그 첫째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꼽히고, 그 둘째로 『금강경』이 꼽힌다.
우리나라 불교, 특히 우리에게서 가까운 조선왕조시대의 불교사, 그리고 오늘날의 한국불교를 이야기하면 임제(臨濟) 류의 선(禪)을 적통으로 하는 선종(禪宗)중심의 역사이고 보면, 선종에서 거의 유일하게 소의경전으로 삼는 것이 『금강경」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금강경』이야말로 선종의 기초경전인 것인 양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건대, 『금강경』과 선종은 역사적으로 일푼어치의 직접적 관련도 없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이 선종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금강경』에서 선종이 나온 것도 아니다. 선(禪)이란 본시, 중국의 당대(唐代)에나 내려와서, 이전의 일체(一切)의 교학불교를 부정하는 데서 생겨난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의 아주 래디칼한 토착적 운동이고 보면, 선(禪)은 문자(文字)로 쓰인 모든 경전을 부정하는 일종의 반불교(反佛敎)운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선은 불교라고 말하기보다는 중국인들의 어떤 시적(詩的) 영감(靈感, poetic inspiration)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선은 그 근본이 아나키스틱(무정부주의적)한 것이요, 따라서 물론 『금강경(金剛經)』도 선의 입장에서 보면 부정되어야 할 교학불교의 대표경전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금강경』이 항상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마치 『금강경』이 선종의 대표경전인 양 착각되어온 소이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역사적 이유(historical reason)요, 그 하나는 논리적 이유(logical reason)다.
첫째로, 역사적 이유라 함은 중국선(中國禪)의 실제 개조(開祖)라 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인 혜능(慧能, 638~713)의 삶의 이야기와 『금강경』이 얽혀있다 함이다. 혜능의 전기적 자료로서 으뜸이라 할 『육조단경(六祖壇經)』과 『전등록(傳燈錄)』, 『지월록(指月錄)』등의 자료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성립한다.
혜능의 속성은 원래 노(盧)씨요, 그 본관은 범양(范陽)이었다. 그의 부친(父親), 행도(行瑫)는 무덕(武德) 연간에 좌천되어 영남(嶺南)으로 유배되어 신주(광동성廣東省, 신흥현新興縣)의 백성이 되었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3세 때에 그 부친이 돌아가신 것이다. 후에 혜능은 노모와 함께 남해(南海)로 이사갔고 거기서 밑창이 째지라 가난한 살림을 이끌게 되었다. 혜능은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시장에 지게짐을 놓고 팔아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공부할 겨를이 없는 일자무식의 나무꾼 노동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어느 손님이 나무를 한 짐 사더니, 그 나무를 자기가 묵고 있는 여관까지 배달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혜능은 그 여관까지 다 배달을 해주고 그 손님에게서 돈을 받았다. 그리고 여관 문밖을 나서려는데 바로 문깐 방에 묵고 있던 어느 손님이 경(經)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그 경전의 내용이 귀에 쏘옥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 경(經)이 바로 문제의 『금강경』이었고, 문제의 구절은 현금의 텍스트 제십분(第十分)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제오절(第五節)에 있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반드시 머무는 곳이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이라는 구절이었던 것이다. 나무꾼 혜능은 그 구절을 듣자마자 마음이 활짝 개이는 것 같았다.
“그 경(經)이 무슨 경이오?”
“『금강경(金剛經)』 이외다.”
“선생은 어디서 오셨길래 그런 훌륭한 경전을 가지고 계시오?”
“나는 기주(蘄州) 황매현(黃梅縣) 동풍모산(東馮母山=동산) 동선사(東禪寺)에서 왔소. 그곳에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께서 주석하고 계시면서 많은 사람을 감화하고 계신데, 그 문인(門人)이 일천 명이나 넘소, 내가 그 산에 가서 홍인대사님께 절을 하고 이 경을 받았소이다. 대사님께서는 항상 승속(僧俗)에 권하시기를 이 『금강경』만 몸에 지니고 있어도, 곧 스스로 견성(見性)할 것이요, 단박에 성불(成佛)하리라 하시었소.”
이 말을 들은 혜능은 그 자리에서 발연(勃然)하여 출가구법(出家求法)의 결심이 스는지라, 어느 손님에게 구걸하여 은십냥(銀十兩)을 얻었다. 그 돈으로 노모의 의복과 식량을 충당하고 노모에게 엎드려 하직하고 발길을 황매(黃梅)로 재촉하였던 것이다. 삼십여일(三十餘日)이 못되어 황매(黃梅)에 도착, 곧 오조(五祖) 홍인(弘忍)을 뵈올 수 있었다. 운운(云云) ……
이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사실인가 아닌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선가(禪家)의 개조(開祖)들이 소의경전으로서, 이 『금강경』이라는 경전을 중시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오조(五祖) 홍인(弘忍)이 『금강경(金剛經)』을 강설하였고,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출가(出家)의 동기가 바로 이 『금강경』에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혜능(慧能)이 득도성불(得道成佛)한 후에도 이 『금강경(金剛經)』을 계속 설파(說破)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금강경』과 선종은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혜능의 수제자인 하택신회(荷澤神會)는 아예, 오조(五祖)ㆍ육조(六祖)부터가 아니라 초조(初祖)인 달마(達磨)로부터 이 『금강경』을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서 전승하여 왔다고 못 박았다. 따라서 하택신회 이래, 신수계(神秀系)의 북종(北宗)이 『능가경(楞伽經)』【AD 400년경 성립한 대승경전, ‘능가’는 스리랑카의 ‘랑카"를 의미한다. 불타가 랑카섬에 강하하여 설파한 내용이라 함. 여래장과 아라야식을 통합】을 중시한데 비하여, 혜능계(慧能系)의 남종(南宗)에서는 『금강경(金剛經)』이 그 소의경(所依經)으로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 것이다.
둘째로, 논리적 이유라 함은 뭔 말인가? 선종의 출발이 역사적으로 8세기 초 중국에서라고 한다면, 『금강경』은 인도에서 대승불교의 초기에 성립한 산스크리트원전(범본梵本)의 존재가 확실한 경전으로, 그 성립시기를 학계에서 대강 AD 150~200년경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과 선(禪)은 최소한 500년 이상의 시간거리와, 인도와 중국이라는 문화적ㆍ지리적(공간적) 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금강경』을 그 자체로 독립된 단일 경전으로 흔히 오해할 수도 있지만, 『금강경』이란 원래 ‘반야경(般若經)’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 6바라밀
그런데 또 많은 사람들이 ‘반야경’이라는 말을 어떤 단일한 책의 이름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반야경이란 단권의 책이 아니요, 반야사상을 표방하는 일군(一群)의 책들에 붙여지는 일반명사인 것이다. 반야경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오는 책들은 한두 권이 아니다(한역漢譯된 것만도 42종). 그런데 반야사상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반야(prajñā)라는 것을 공통으로 표방하는, 기독교의 『신약성경』이 쓰여지기 시작한 1세기, 같은 시기에, 초기 불교승단에서 불꽃같이 타오른 새로운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아주 쉽게 말하면, 반야사상의 성립, 즉 반야경의 성립이 곧 대승불교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출발과 대승불교의 출발은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언어문자권(희랍어-산스크리트어) 내에서, 아주 비슷한 혁신적 생각을 표방하면서 인류사에 등장한 일대종교(一大宗敎)운동이었던 것이다【요즈음의 세계사상계에서는 이 양대 종교운동을 같은 문화권 내에서 같은 사상축을 표방한 운동으로 본다】.
소승 아라한(arhan)에게 주어지는 실천덕목으로 원시불교의 팔정도(八正道)를 든다면, 대승보살(bodhisattva)에게 주어지는 실천덕목은 ‘육바라밀(六波羅蜜)’(육도六度)이라는 것이다. 이 6바라밀이란, 1) 보시(布施), 2)지계(持戒), 3)인욕(忍辱), 4)정진(精進), 5) 선정(禪定), 6)지혜(智慧)의 여섯 덕목을 말하는데, 앞의 5바라밀(前五波羅蜜)은 최후의 지혜 바라밀을 얻기 위한 준비수단으로서 요청되는 것이다. 바로 이 최후의 지혜바라밀, 즉 혜지의 완성, 그것을 우리가 반야(‘쁘라기냐’의 음역)라고 부르는 것이다. 바로 반야사상(=반야경의 성립)이란 최후의 바라밀, 즉 지혜바라밀을 통괄(統括)적으로 이해하면서 아주 새로운 혁신적 불교운동을 선포하기에 이른 일련의 흐름 전체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금강경』은 이 반야운동의 초기에 성립한, 반야바라밀사상을 완성(完成)시킨 결정체인 것이다.
1) ‘보시(布施)’란 요새말로 하면 ‘사랑’이요, ‘베품’이다. 내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눔’이다. 그렇다면 내가 만 원이 있기 때문에 천 원을 남에게 주면, 그것이 보시가 될까? 그럼 이천 원은 어떨까? 그럼 아예 만 원을 다 주면 어떨까? 아니 아예 남에게 꾸어다가 이만 원을 주면 어떨까? 길거리 지나가다 나보다 헐벗은 자가 있으면 내 옷을 다 벗어주고 가야할 텐데! 과연 나는 그러한 보시를 실천하고 있는가? 그럼 추운데 내 옷 다 벗어주고 빨개벗고 간다고 나는 보시를 과연 완성할 것인가?
2) ‘지계(持戒)’란 계율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 삶의 도덕성이요, 일정한 삶의 규율성이다. 그런데 시내에서 모처럼 친구를 만났는데 술 한잔은 어떠할까? 담배 두 가치는 너무해도 한 가치? 아니, 한 모금은 어떠할까? 조갑지에 꽉물리면 곤란해도 살짝 스치는 김에 담구었다 빼면 안될 것도 없다. 아니, 아예 그 물건을 작두로 짤라버리면 어떠할까? 계율을 완벽하게 지키시는 율사님의 사생활에는 과연 흠잡을 구멍이 없을까?
3) ‘인욕(忍辱)’이란 욕됨을 참는 것을 말한다. 욕됨을 참는다는 것은 ‘용서’를 의미한다. 나에게 욕을 퍼붓는 모든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원망이나 복수의 마음을 품어서는 아니 된다. 사실 우리 네 인생이라는 것은, 기독교의 교설을 빌리지 않아도, ‘참음’과 ‘용서함’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까지 참는가? 어디까지 용서하는가? 나를 죽이려 칼을 들고 덤비는 자에게 고스란히 창자를 내어주는 것이 인욕인가? 아니 너무 극단적 비유를 들지 않더라도, 잠결에 따꼼하게 물어대는 모기를 때려 죽여야 할까? 그대로 인욕해야 할까?
4) ‘정진(精進)’이란 올바른 삶의 방향으로 흔들림 없이 매진하는 것을 말한다. 오로지 구부림 없이 불도(佛道)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올바른 삶의 방향이란 말인가? 내가 정진하고 있는 가치관이 과연 최선의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서 받아야 할 것인가? 과연 무엇이 불도이며, 과연 무엇이 올바른 예수님의 가르침인가? 무엇이 과연 내가 정진해야 할 종교적 삶인가?
5) ‘선정(禪定)’이란 명상에 의한 정신의 집중과 통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도인이나 희랍인에게 공통된, 테오리아(theoria, 이론)적 삶의 가치관의 우위를 반영하는 덕목이다. 그러나 구태여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주목(注目)’ 즉 ‘어텐션(attention)’의 능력이 없는 삶은 결국 정신 분열의 삶이 되고 만다.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란 우리가 책을 보거나 대화를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강의를 듣거나 시험을 치거나, 모든 삶의 행위의 순간순간에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훈련을 인도인들은 ‘요가’라는 수행으로 정형화시켰고, 중국인들은 ‘조식(調息)’ ‘도인(導引)’으로 공부화시켰고, 그것은 후대 좌선(坐禪)이라는 갖가지 형태로 발전 정착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승려나 불자들이 ‘선’과 ‘좌선’을 일치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럼 ‘와선’은 어떠하고, ‘행(行)선’은 어떠하며 ‘처처사사(處處事事)선’은 어떠한가? 그렇다면 도대체 ‘선’이란 게 무엇이냐?
나는 동안거ㆍ하안거 결제를 100번이나 거쳤다. 어간에만 앉는 최고참 최상등자다! 그래, 그래서 그대는 성불(成佛)했는가? 뇌리피리 피죄죄한 얼굴이나 하고 앉아 지댓방조실의 소화(笑話)나 경청하고 있는 신세가 되질 않았는가? 과연 선정(禪定)이 성불(成佛)을 보장하는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의 다섯 바라밀은 종교생활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할 덕목임에 틀림없다. 사랑을 실천하며, 계율을 지키고, 참고 온유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진하는 생활을 하며, 고요히 명상하고 기도하는 생활, 불자(佛子)나 야소자(耶蘇子)나 가릴 바가 없는 덕목임에 틀림이 없다. 이 다섯 바라밀은 부파불교시절의 엄격한 많은 계율이 추상화되고 간략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 다섯 바라밀은 마지막 바라밀, 즉 지혜의 바라밀이 없이는 완성될 수가 없는 불완전한 덕목인 것이다. 아무리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을 완벽하게 해도, 그것이 지혜를 결(缺)할 때는, 형식주의적 불완전성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그럼 제육도(第六度), 즉 여섯 번째의 바라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반야 즉 지혜란 무엇인가? 바로 여기에 대한 대답이 곧 『금강경』이란 서물을 구성하는 것이다. 『금강경』은 곧 『금강반야바라밀경』의 약칭이며, 『금강경』이야말로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을 최초로 명료하게 규정한 대승운동의 본고장인 것이다.
3. 현장의 신역
다음으로 내가 ‘논리적 이유’라 말한 뜻은 무엇인가? 논리적 이유라 함은, 비록 『금강경』의 성립과 선종(禪宗)의 성립 사이에 5ㆍ6세기의 시간이 가로놓여 있지만, 그리고 선종의 불립문자적 정신으로 볼 때, 『금강경』은 부정되어야 할 문자로 이루어진 초기경전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선종이 ‘불립문자(不立文字)ㆍ직지인심(直指人心)ㆍ견성성불(見性成佛)’등의 말을 통하여 표방하고자 하는 모든 논리적 가능성이, 아니, 정확하게는 논리 이전의 가능성이, 이미 『금강경』이라는 대승불교의 초기경전 속에 모두 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이라는 대승교학의 바이블은 비록 그것이 교학불교의 남상(濫觴)을 이루는 원천적인 권위경전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가 하나의 선(禪)이요, 가장 ‘선적인’ 경전으로 선사들에게 비추어졌던 것이다(The Diamond Sūtra is considered the Sanskrit work closest in spirit to the Zen approach, EB). 그러므로 이 『금강경』이야말로 대승불교의 최초의 운동이면서 최후의 말미적 가능성을 포섭하는 포괄적인 내용의 위대한 경전인 것이다. 『금강경』이야말로 대승불교 전사(全史)의 알파요 오메가다. 선종이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는 것은, 곧 선의 가능성이 초기불교운동 내에 이미 구조적으로 내장되어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며, 동시에 역으로 선(禪)이 반불교적(反佛敎的)임에도 불구하고, 대승운동의 초기 정신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역사적 정황을 잘 대변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처럼 사상의 폭이 넓은 불교경전이 없으며,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전불교사를 통하여 가장 많이 암송되고 낭송되고 독송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이 내재하는 것이다. 『금강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대승불교정신의 알파-오메가를 다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 경전이 소략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불교 전사(全史)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없이는 그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반야사상을 집대성한 기념비적 반야경으로서 우리는 현장(玄奘)이 칙명을 받들어 조역(詔譯)한 『대반야경(大般若經)』을 꼽는다【이것은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과는 별도의 책이므로 혼동치 말것】. 이 기념비적 반야경의 스케일은 대장경을 뒤적거리는 우리의 눈길을 경악으로 이끈다. 그것은 16회(十六會) 600권에 이르는 참으로 방대한 분량의 서물인 것이다. 이 방대한 분량의 『대반야경(大般若經)』을 뒤적거리다 보면, 제9회(第九會) 권제 577(卷第五百七十七)에서 「능단금강분(能斷金剛分)」이라는 한 챕터를 만나게 된다. 이 챕터에 실린 「능단금강분(能斷金剛分)」의 내용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금강경』과 일치하는 것이다. 『금강경』에 해당되는 「능단금강분(能斷金剛分)」은 지금 『대정대장경(大正大藏經)』의 편집체제로 불과 6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7/980~985). 그런데 『대반야경(大般若經)』 전체의 분량은 『대정(大正)』으로 세 책(5~7)에 해당되며, 그 페이지수는 자그만치 3,221쪽이나 되는 것이다. 3,221쪽의 분량의 방대한 서물【오늘날의 작은 활자본, 큰 판형의 서물기준이니까 이것을 한번 목판으로 계산해보라! 이 책 한 종만 해도 몇 만 장이 되겠는가?】의 6쪽에 해당되는, 즉 600권 중의 577권에 자리잡고 있는 서물이 바로 우리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이 『금강경』이라는 것이다. 그럼 『금강경』은 본시 『대반야경』의 한 권(卷)을 분립시킨 것인가?
그렇게는 말할 수 없다. 현장(玄奘)의 『대반야경』은 당(唐)나라 때, 660~663년 사이에 성립한 것으로, 그 내용은 실로 600년 이상에 걸친 반야사상운동의 표방경전들을 한 종으로 묶어 낸 것이며, 따라서 그 내용은 이전에 독립경전으로 존립(存立)하고 있었던 것이 대부분인 것이다. 그러면 현장의 『대반야경』 이전에 독립경전으로써 한역된 『금강경』이 있었는가? 물론 있다! 그럼 왜 현장(玄奘)은 그것을 구태여 다시 번역했는가?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쉬앤짱(玄奘, 602~664)이라고 하는 역사적 인물의, 『대반야경』을 위시하여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섭대승론(攝大乘論), 유식론(唯識論), 구사론(俱舍論) 76부(部) 1,347권(卷)에 이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 개인의 방대한 역경사업(62세밖에 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에 걸쳐 논의되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쉬앤짱의 문제의식은 중국한역불교(中國漢譯佛敎)의 격의적(格義的) 특색에 관한 비판적 검토로부터 출발한다. 한마디로 그의 문제의식은 한역불교의 모호함과 애매함에 대한 답답함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이런 종류의 고민과 비슷하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일본교사, 내지 그들에게 배운 사람들을 통하여 이해된 ‘서양철학’, 데카르트가 어떻구 칸트가 어쩌구 쇼펜하우어가 저쩌구하는데 도무지 모호하다. 그러지 말구, 직접 서양에 가서 그 언어를 배우고, 그 언어사상 체계가 발생한 문화적 분위기를 익히고, 그 사람들을 알아보자! 그래서 유학을 간다! 직접 가서 알아보자! 그는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사람! 그가 살았던 시기는 수당교체의 난세(亂世)였다. 장안(長安)ㆍ성도(成都) 각지에서 스승을 구하고, 『열반경(涅樂經)』, 『섭대승론(攝大乘論)』, 소승(小乘)의 제론(諸論)에 통달(通達)했으나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몸소 직접 산스크리트 원전에 기초하여 그 뜻을 철저히 고구(考究)하고 싶은 학문적 열망으로 가득찬 27세의 청년, 독력(獨力)으로 만난(萬難)을 각오하고 장안(長安)을 출발하여 구도행(求道行)의 걸음을 내친 것이 정관(貞觀) 3년(629)! 간난신고를 무릅쓰며 신강성 북로를 뚫고, 서(西)투르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북(北)인도로 들어가 중(中)인도의 나란타사(那爛陀寺)에까지 이르렀다. 그곳에서 계현(戒賢, Śīlabhadra, 529~645)을 스승으로 모시고, 무착(無着)ㆍ세친계(世親系)의 유가유식(瑜伽唯識)의 교학(敎學)을 배웠다. 인도 각지의 불적(佛跡)을 방문하고, 불상(佛像)ㆍ불사리(佛舍利)를 비롯하여 범본(梵本)불경 657부(部)를 수집하여, 파미르고원을 넘고 천산남로남도(天山南路南道)를 통하여 장안(長安)에 도착한 것이 정관(貞觀) 19년(645)! 그의 나이 43세! 당태종(唐太宗)은 너무 기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62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19년 동안 홍복사(弘福寺), 자은사(慈恩寺), 옥화궁(玉華宮)에서 번역한 그 방대한 사업이 오늘 『대장경의 위용의 골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의 여행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가 명대(明代)에 희곡화(戱曲化)된 것이 바로 『서유기(西遊記)』!
배불(排佛)의 유교국가임을 자처하는 조선의 궁궐의 용마루 처마에도 그의 서유(西遊)의 소상(塑像)들이 나란히 서있고, 한때 우리 코메디 입담에도 ‘사오정’이 판을 치고 있는 실정, 그 위대한 법력을 어찌 내가 새삼 논구할 필요가 있으랴!
현장(玄奘)의 번역의 특징은 가급적인 한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충실하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음역도 가급적이면 원래의 발음에 충실하려 한다. 예를 들면, ‘samādhi’를 ‘삼매(三昧)’라 하고, ‘yojana’를 ‘유순(由旬)’으로, ‘sattva’를 ‘중생(衆生)’으로 번역하는 것으로 묵약되어 있었지만, 현장(玄奘)은 이를 모두 와류(訛謬)로 간주하고 ‘삼마지(三摩地)’, ‘유도나(踰闍那)’, ‘유정(有情)’으로 고친다. 발음과 의미를 모두 원어에 충실케 하려는 자세인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자수(字數)나 리듬에 얽매인 번역을 산문화시켜 상세히 연술(衍述)한다. 『금강경』의 경우 그 유명한 사상(四相)의 번역에 있어서도, ‘중생상(衆生相)’(sattva-samjñā)은 ‘유정상(有情想)’(정이 있는 자라는 생각)이 되어 버리고, 마지막의 ‘pudgala-samjñā’는 아예 ‘보특가라상(補特伽羅想)’으로 음역해버린다.
이러한 식의 현장(玄奘)의 번역을 우리는 중국역경사(中國譯經史)의 특수용어로서 ‘신역(新譯)’이라고 부르고, 현장 이전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고 부른다. ‘구역’의 대표로서 우리는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350~409년경)과 진체(眞諦, Paramārtha, 499~569)를 꼽는다. 그렇다면 대체적으로 신역이 구역보다 더 정확하고 우수한가? 반드시 그렇게 일괄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사계의 정론이다. 나 역시 신역이 구역의 아름다움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현장의 번역은 당나라 때의 국제적인 문화의 분위기를 잘 전달하고 있다 해야 할 것이다.
4. 소명태자
『금강경』의 경우, 한역본으로 우리는 보통 다음의 6종을 꼽는다. 이를 시대적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후진(後秦)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역(譯),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일권一卷), 402년 성립.
2. 북위(北魏) 보데류지(菩提流支, Bodhiruci) 역(譯),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일권一卷), 509년 성립.
3. 진(陳) 진체(眞諦, Paramārtha) 역(譯),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일권一卷), 562년 성립.
4. 수(隋) 급다(笈多, Dharmagupta) 역譯,
『금강능단반야바라밀경(金剛能斷般若波羅蜜經)』(일권一卷), 590년 성립.
5. 당(唐) 현장(玄奘) 역(譯),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 「제구능단금강분(第九能斷金剛分)」(일권一卷), 660~663년 성립.
6. 당(唐) 의정(義淨) 역(譯),
『불설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佛說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일권一卷), 703년 성립.
그런데 이 많은 판본 중에서(모두 내용이 조금씩 다르고 저본이 된 산스크리트 원어 텍스트 자체도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것을 과연 『금강경』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닌 역사의 선택이었다.
우리가 보통 『금강경』이라 부르는 것은 현장역본(玄奘譯本)을 저본으로 삼지 아니한다. 역사적으로 『금강경』으로 유통되어 온 것은 바로 최고역(最古譯)이라 할 수 있는 꾸마라지바(鳩摩羅什)의 역본이다. 다시 말해서 신역이 아니라 구역인 것이다. 신역이 구역의 권위에 눌렸기 때문인가? 그렇지는 않다. 평심이론(平心而論)컨대 신역이 구역의 아름다움과 고결함을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중의 선택이었다. 현재 다행스럽게도, 상기(上記)의 6종(六種)번역이 모두 말끔하게 정돈되어 『대정(大正)대장경』에 실려있다. 현장의 번역은 제7책, 980~985쪽에 실려있고, 나머지 5개의 번역은 제8책, 748~775쪽에 순서대로 실려있어서 아주 손쉽게 여섯 개의 텍스트를 비교검토 해볼 수 있다【보데류지(菩提流支, ?~527)의 역본(譯本)의 경우는 이본(異本) 2개가 실려 있다)】 이 6본(六本)의 텍스트의 본격적인 비교연구 또한 우리 불교학계의 주요한 연구테마가 될 것이다.
우리가 흔히 『금강경』이라고 부르는 텍스트는 라집(羅什)의 역본,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經)』을 양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가 삼십이분(三十二分)으로 분절(分節)하여, 각 분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 분절이 반드시 학구적으로 올바른 나눔이라 말할 수 없는 상황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텍스트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그 이름 또한 모두 그 분(分)의 내용을 개관하고 있는 의미 있는 명칭으로 대체적으로 적절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 소명태자(昭明太子, 501~531)가 누구인 줄 아는가? 그가 바로 『벽암록(碧巖錄)』 제1칙(第一則)의 주인공, 달마(達磨)와 초면(初面)하고 ‘몰라’(불식不識)의 일화를 남긴 그 유명한 대보살(大菩薩) 황제, 남조불교(南朝佛敎)의 극성(極盛)시대를 연출한 양무제(梁武帝, 464~549)의 장자(長子)였다. 명(名)은 소통(蕭統), 자는 덕시(德施), 태어난 다음해 바로 황태자(皇太子)가 되었고, 인품이 총명하고 인애롭고 호학(好學)의 일도(一道)를 걸었다. 그의 서재의 장서 3만(萬)! 유효작(劉孝綽) 등의 문학(文學)의 사(士)를 자택에 불러들여 같이 편찬한 그 유명한 『문선(文選)』은 만고(萬古)의 명저(名著)로 남아있다. 바로 그 소명태자(昭明太子)가 라집(羅什)의 『금강경(金剛經)』을 오늘의 삼십이분(三十二分) 텍스트로 만든 것이다. 그 다섯 자로 이루어진 분의 이름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 제일(第一) |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 제이(第二) |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 제삼(第三) |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 제사(第四) |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 제오(第五) |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 제육(第六) |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 제칠(第七) |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 제팔(第八) |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 제구(第九) |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 제십(第十) |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 | 제십일(第十一) |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 | 제십이(第十二) |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 제십삼(第十三) |
리상적멸분(離相寂滅分) | 제십사(第十四) |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 제십오(第十五) |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 | 제십육(第十六) |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 제십칠(第十七) |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 제십팔(第十八) |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 | 제십구(第十九) |
리색리상분(離色離相分) | 제이십(第二十) |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 제이십일(第二十一) |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 제이십이(第二十二) |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 제이십삼(第二十三) |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 | 제이십사(第二十四) |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 제이십오(第二十五) |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 제이십육(第二十六) |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 제이십칠(第二十七) |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 | 제이십팔(第二十八) |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 제이십구(第二十九) |
일합리상분(一合離相分) | 제삼십(第三十) |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 제삼십일(第三十一) |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 제삼십이(第三十二) |
이 분명(分名)만을 일별하여도 소명태자가 얼마나 불교의 이치를 깊게 공독(攻讀)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분절(分節)이나 제명(題名)이 우리의 이해를 그르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아울러 병기(幷記)해둔다. 그리고 보통 제일분(第一分)을 서분(序分)이라 하고, 제이분(第二分)부터 제삼십일분(第三十一分)까지를 정종분(正宗分)이라 하고, 제삼십이분(第三十二分)을 유통분(流通分)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규정은 『금강경』의 내적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 형식적으로 희론(戱論)하는데 불과하다. 『금강경』은 그러한 식의 서(序)- 정종(正宗)- 유통(流通)의 구조로 되어 있지 않다.
한 가지 텍스트 상(上)의 문제로 특기해 둘 것은 구마라집(鳩摩羅什) 텍스트에서 제이십일분(第二十一分)의 후반부분(‘이시혜명수보리백불언爾時慧命須菩提白佛言’부터 ‘시명중생是名衆生’까지의 62자)은 라집(羅什)텍스트에 부재했던 것으로 보데류지(菩提流支) 텍스트에서 빌려와 보완(補完)한 것이다【당(唐) 장경(長慶) 2년에 영유법사(靈幽法師)가 보입(補入)한 것】. 현재의 『대정(大正)』 및 『고려대장경』 라집(羅什) 텍스트는 보완(補完)된 상태로 실려 있다. 그 부분을 잘 들여다 보면 그것은 분명히 라집(羅什)의 역본(譯本)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선택한 용어와 문장스타일이 크게 다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이 부분에 대해 그릇된 주석을 달고 있는 상황도 쉽게 목격된다. 후학들의 주의를 요청한다.
내가 여기서 강해하려는 『금강경』은 물론 라집(羅什)이 역(譯)한 『금강경』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라집(羅什)의 『금강경』의 판본이 또 수없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라집(羅什)의 『금강경』의 가장 정본(正本)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우리나라 해인사 장경각에 보존되어 있는 『고려대장경판본』인 것이다. 그리고 사계의 가장 정밀한 판본으로 통용되고 있는 일본의 『대정대장경(大正大藏經)』도 바로 우리의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통탄스러운 것은 조선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모든 『금강경』이 이 정본(正本)인 우리 『고려대장경』본을 거의 하나도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나의 『금강경』 강해는 『고려대장경판본』을 최초로 사용한 우리말 『금강경』이라는데 무한한 자부감을 느낀다. 『고려』본을 원칙으로 하고 『대정(大正)』본과 비교해가면서 나의 텍스트를 정확하게 구성할 것이다. 그리고 이 텍스트에 소명태자(昭明太子)의 분절(分節)을 따른다. 콘체도 이 분절(分節)을 썼다. 이 『고려』본 라집(羅什) 텍스트를 주축으로, 가능한 모든 텍스트를 비교 연구하여 현재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한국사람들에게 가장 의미있는 방식으로 나의 역문(譯文)의 문의를 창조해나갈 것이다.
『고려대장경이라 하는 것은, 현종때 새긴 초조대장경판(1011~1087)과 제2차 의천대장경판(1092~1100)이 1232년(고종19) 몽고군의 침입으로 불타자,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崔瑀) 등을 중심으로 고종23년(1236)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16년 만에 재조(再雕), 완성한 것이다(고종38년, 1251년에 완성). 『고려대장경』은 정확하게 말하면 ‘고려제국대장도감판(高麗帝國大藏都監版)’이라 해야 옳다. 우리의 『금강경』은 1238년(무술戊戌)에 조조(彫造)된 것이다.
5. 두 경전과의 최초 만남
나의 생애에서 이 지혜의 서를 처음 접한 것은, 1960년대 내가 당시로서는 폐찰이 되다시피 쇠락하였던 고찰, 천안의 광덕면에 자리잡고 있는 광덕사(廣德寺)에서 승려생활을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계통을 밟아 정식 출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머리 깎고 승복 입고 염불을 외우며 승려와 구분 없이 지냈으니 출가인(出家人)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구멍 숭숭 뚫린 판잣대기로 이어붙인 시원한 똥간에 앉아 있는데, 밑 닦으라고 꾸겨놓은 휴지쪽 한 장에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이 현토를 달아 뜻이 통하도록 해석되어 있는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랫도리에 힘을 주는 일도 잊고 꾸부린 가랭이가 완전히 마비되도록 하염없이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랫도리에 힘을 주는 일보다 내 시선이 닿고 있는 휴지쪽에서 튀어나오는 의미가 내 몸뚱아리에 헤아릴 수 없는 모종의 전율을 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문자 그대로 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불교학개론강의를 듣고 불교를 몸소 체득하고 싶어 출가승이 되었건만, 나는 ‘반야심경’이란 그냥 아무런 의미도 되지않는 그냥 염불용의 기호체계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것이 어떤 일정한 의미를 갖는 경전 텍스트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중노릇을 하기 위해 외우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나같이 문외한인 자들에게는 리얼할 수밖에 없었던 무지의 소치였다.
한 줄, 한 줄, 정확하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엉성한 현토 문장들을 따라가면서, 그것이 나에게 던지는 어슴프레한 영감은 나의 짧은 생애에서 미처 경험할 수 없었던 어떤 태고의 푸릇푸릇한 이끼와도 같은 신비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사실 ‘불교’에 대해 최초의 영적 체험을 하게 된 것은, 어느 대선사와의 만남이 계기가 된 것도 아니요, 내가 수없이 들었던 세계적인 불교학 석학의 열띤 강의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싱그러운 호도님 향기바람이 구수한 분뇨에 배어 태고의 토담의 정취를 한층 더 짙게 만들어주는 바로 그 측간의 마루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지쪽 한 장과의 만남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의 전율이 나의 인생에 ‘불학(佛學)’이라고 하는 인류지혜의 보고를 맞아들이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우리네 인생이란 참으로 우연의 연속인 것이다. 그때 나는 『반야심경』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분명 내가 평생토록 고구(考究)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진리의 체계가 담뿍 함장(含藏)되어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고, 언젠가 내 손으로 그것을 상세히 파헤쳐 보리라고 결심하면서 마비된 다리를 어루만져 가면서 그 뒷깐을 절룩절룩 걸어나왔던 생각이 난다. 그 ‘언젠가’가 삼십여 년의 세월을 소요하게 될 줄이야!
그 뒤로 나는 불자 독송의 경전들을 똥숫간에 가지고 가서 뒤적이고 앉아 있는 취미에 빠지게 되었다. 내가 다음으로 접한 책이 바로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 수뜨라」라고 불리우는 『금강경』이었던 것이다. 『금강경』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선 ‘금강석’ 즉 ‘다이아몬드’ 생각이 나고, 무언가 보석 중의 보석, 세상에서 가장 비싼 무엇, 그리고 가장 귀한 무엇이라는 생각이 들어 금강경하면 뭔가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지혜로 가득찬 위대한 경전이라는 선입견이 들었던 것이다. 지혜의 다이아몬드를 발견하자!
나는 곧 실망에 빠지고 말았다. 내가 『반야심경』을 접했을 때는, 그 분량이 매우 적고, 또 그 압축된 뜻이 가물가물했지만, 아주 정확한 논리체계들이 수없이 착종되어 있고, 그것을 풀어내기만 하면 우주의 비밀이 다 풀릴 것과도 같은 그러한 농축된 비의(秘義)의 느낌이 강렬히 들었다.
그러나 『금강경』은 비교적 짧은 글이기는 했지만 『반야심경』처럼 압축되어 있지도 않았고, 우선 나에게 아무런 ‘논리적인’ 사색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바가 없었다. 그리고 같은 말의 반복이 심했고, 따라서 아주 진부하고 상투적인 말의 나열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한마디로 아무런 재미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금강경』은 ‘대중을 위한 용속한 경전’일 뿐, 학문적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유치한 책이라고 덮어버리고 말았다. 『반야심경』과 『금강경』과의 최초의 해후는 이러한 나의 대비적 인상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그렇게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나는 『금강경』을 내 인생에서 다시 꺼내볼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얻지 못했다. 『금강경』과의 진검일전(眞劍一戰)은 20세기가 종료를 고해가는 1999년 여름, 도올서원 제12림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푸릇푸릇한 동승의 모습이 이제 원숙한 선승의 모습으로 변했건만 진정코 내가 그 반야의 일단(一端)이라도 체득했단 말인가?
6. 명심포니
회고컨대, 푸릇푸릇한 청춘의 시기에, 지적인 갈구에 영혼의 불길이 세차게 작열하고 있었던 그 시기에 내가 『반야심경』을 포(褒)하고, 『금강경』을 폄(貶)한 것은 실로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그 성립시기가 약 3세기 정도(정확한 시기를 추정키는 어렵지만)의 세월을 격한다. 비록 『반야심경』은 『금강경』에 비해 분량이 극소한 것이지만, 그 내용은 『금강경』보다 훨씬 더 복잡한 개념과 논리적 결구로 이루어져 있다. 『금강경』은 원시불교의 아주 소박한 수뜨라의 형태, 즉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하여 ‘환희봉행(歡喜奉行)’으로 끝나는 전형적인, 소박한 붓다설법의 기술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야심경』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반야심경』은 이미 이러한 초기 대중운동이 당대의 최고의 식자들에게 소화되면서 집필되기 시작한 모든 철학적 논서(論書)의 개념들을 소화하고, 그것을 압축하여 놓은, 실생활적 설법이 아닌 철학적 논설이다. 따라서 『반야심경』의 진정한 이해는 용수(龍樹)의 『중론(中論)』서와 같은 삼론(三論)의 논지라든가 반야경계열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공사상에 대한 역사적이고 개념적인 인식의 전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반야심경』이 『금강경』에서 표방하고 있는 사상내용의 4세기 동안의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전개를 압축해놓은 것이라고 한다면, 『금강경』은 『반야심경』의 모든 가능성을 포섭하고 있는 비개념적ㆍ비논리적 배태(胚胎)와도 같은 것이다.
예를 들면, 『반야심경』하면 우리는 그 유명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하는 공사상의 문구를 떠올리고,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하는 팔불중도(八不中道)의 문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금강경』에는 ‘공(空, śūnya)’이라는 글자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은 반야경전의 대표경전임에도 불구하고, ‘반야사상=공(空)사상’이라는 일반적 도식이 성립하기 이전의 초기경전인 것이다. 그리고 『금강경』 원문에는 ‘소승(小乘)’ ‘대승(大乘)’이라는 표현도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표방하는 사상운동을, ‘소승(小乘)’에 대한 ‘대승(大乘)’이라고 개념적으로 규정 짓는 역사적 의식이 형성되기 이전에 성립한 경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승경전이 사용하고 있는 일체의 상투적인 개념들이 『금강경』에는 개념화된 형태로 등장하는 바가 없다. 『금강경』은 고졸(古拙)하나 참신하기 그지없고, 소략하나 세밀하기 그지없고, 밋밋하나 심오하기 이를 데 없다. 개념과 개념의 충돌의 벌판에서 논리의 창칼을 휘두르는 호전(好戰)의 만용을 즐기었던 동승, 도올이 그러한 고졸한 청신의 맛을 흠상하기에는 너무도 어렸던 것이다. 삼십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겨우 그 일단의 묘미(妙味)를 씹게 될 줄이야!
인도고어(古語)인 산스크리트어(語) 데와나가리(Devanāgarī)는 장음과 단음의 주기적인 배열, 우리말에서 보기 어려운 복자음의 중첩, 그리고 자음과 모음, 받침의 율동적인 배열, 그리고 모든 자음 뒤에 숨어있는 ‘아’음 …… 하여튼 데와나가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것은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이기 전에 하나의 신적 영감을 표현하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經, 수뜨라)’이라고 부르는 원래의 최초의 의미는 ‘구슬을 꿴 스트링, 코드’라는 것인데, 이것은 바라문교에서 설교(說敎)의 내용을 짧은 문구로써 간결하게 압축시켜 암송에 편리하게 만든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최초의 의미는 ‘경(經)’이라는 역사적 의미 전반에 남아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원래 산스크리트어의 교의전통은 일차적으로 써서 보는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암송하여 듣는 것을 위한 것이었다. 데와나가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우빠니샤드 전체를 정확히 암송하는 자가 많다고 한다.
예를 들면, 용수(龍樹, Nāgārjuna, AD 150~250년경 사람. 초기 대승불교의 대논사大論師)의 『중론(中論)』은 분명 문자로의 집필이 구전에 앞섰을 것이다. 그러나 『금강경』은 문자화되기 전에 구전(口傳)으로 성립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은 보고 분석해야 할 철학서가 아니라, 듣고 즐기고 깨달아야 할 음악이요, 한 편의 시(詩)인 것이다.
『금강경』을 잘 들여다보면, 제일품(第一品)으로부터 전체의 절반에 해당되는 제십육품(第十六品)까지가 하나의 단락을 형성하고(여시아문如是我聞 …… 과보역불가사의果報亦不可思議) 제십칠품(第十七品)으로부터 제삼십이품(第三十二品)까지가(이시수보리백불언爾時須菩提白佛言 …… 개대환희皆大歡喜, 신수봉행금강반야바라밀경信受奉行金剛般若波羅蜜經) 또 하나의큰 단락을 형성하여 전반(前半)의 주제를 후반(後半)에서 반복하고 있는 인상을 받는다. 이러한 『금강경』의 전반과 후반의 어구문의(語句文義)의 사동(似同)을 놓고 역사적으로 주석가들이 논의를 폈다. 그 유명한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수제자 승조(僧肇)는 전반(前半)은 중생공(衆生空)을 설(說)한 것이요 후반(後半)은 법공(法空)을 말한 것이라 했고, 지의(智顗)와 길장(吉藏)은 이를 중설중언(重說重言)으로 간주하고, 전반은 전회중(前會衆)을 위한 것이요 후반은 후회중(後會衆)을 위한 것이며, 또 전반은 이근(利根)을 위한 것이요 후반은 둔근(鈍根)을 위한 것이며, 또 전반은 연(緣)을 진한 것이요 후반은 관(觀)을 진(盡)한 것이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논의가 결국 『금강경』이 보는 책이 아니라 듣는 음악이요 시라는 그 원초적 성격과, 그리고 문헌비평상 간파될 수 있는 구전문학 편집구도의 특이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구차한 논설이라고 생각한다.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잘 분석해보면, 처음에 베토벤의 멀어가는 귀를 두드리는 운명의 사자의 소리라 하는 ‘따다다 따안~’하는 테마가 나온다. 그리고는 그 테마가 다양한 형식으로 변주되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베토벤의 운명교향곡 전체가 하나의 테마의 변주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주제와 변주’라는 이러한 형식은 확대, 축소, 혼합, 세분, 생략과 부가, 반진행, 역행, 반진행의 역행 등의 다양한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베토벤은 화성음악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변주를 ‘자유변주’라는 아주 독특한 새로운 형식으로 개발하여 뛰어난 예술적인 경지를 개척했던 것이다. 주제의 각종요소를 성격적으로(음형, 화성, 리듬의 변화를 통하여) 변화시킴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본래의 주제와 전혀 다른 국면을 전개시키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금강경』이 바로 베토벤의 『운명교향곡」과 같은 음악적 구성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교향곡을 들을 때, 많이 들은 사람들은 거개가 그 교향곡의 멜로디를 다 암송하고 듣는다. 마찬가지로 『금강경』은 현실적으로 그것을 다 암송하는 자들에게만 들리게 되어있는 명심포니 중의 명심포니인 것이다. 『금강경』은 외워야 한다. 『금강경』은 수지독송(手持讀誦)해야 한다. 『금강경』은 생활 속에서 느껴야 한다. 『금강경』은 그 향기 속에 취해 있을 때만이 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 묘미는 곧 간결한 주제와 그 반복의 묘미인 것이다.
『금강경』은 어느 경우에도, 한 구절도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조금씩 다 다르게 되어 있다. 그것은 반복이 아니라 변주다. 그리고 그러한 반복이 없으면 『금강경』은 『금강경』의 오묘한 맛을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금강경』은 워낙 심오하고 워낙 근본적이고 워낙 철저한 ‘무아(無我)’의 주제를 설(說)하고 있기 때문에, 그 주제는 끊임없이 변주형식으로 반복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인지될 길이 없다. 그것은 철학의 논서가 아니라 깨달음의 찬가이다. 그것은 번쇄한 개념의 나열이 아니라 득도의 환희를 불러일으키는 신의 부름이다. 아~ 위대하도다! 금강의 지혜여!
7. 군주들의 인간적 고뇌
『금강경』은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천하의 명주보다도 더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소명태자(昭明太子)가 이에 취해 그 유명한 분절(分節)을 창조했다면, 나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 금강경』의 향기에 취했던 자로서, 두 얼굴의 사나이, 총명과 예지로 번뜩이는가 하면 탐욕과 음험한 살육의 화신인 사나이, 경세치용의 명군인가 하면 조선의 역사를 부도덕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나이,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世祖)를 서슴치 않고 들겠다.
우리나라 조선왕조의 초기의 사상적 형세는 실로 불교와 유교라는 양대(兩大) 의식형태의 충돌로 특징지워진다. 조선왕조가, 교과서에 나오듯이 1392년 7월 17일 무장(武將) 이성계(李成桂)가 왕(王)으로 추대되는 사건으로 성립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수 집단들 사이에서 일어난 권력의 변화에 불과할 뿐이요, 역사의 장이 한날 한시에 바뀌는 예는 없다. 박정희의 등극으로 하루아침에 우리나라가 경상도 왕국이 된 것도 아니요, 김대중의 취임 그날로 우리나라가 전라도 왕국이 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박정희의 치세기간 동안에 사회각계각층에 경상도 사람이 점진적으로 득세한 것이 어김없는 사실이라면, 그에 안티테제를 걸고 나온 김대중의 치세기간에 경상도 일변도의 인재포진에서 전라도 사람들의 득세가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간의 변화는 점진적일 뿐 아니라 많은 충돌과 타협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사태라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조선왕조 초기의 불교와 유교의 대립형국은 이와 비슷한 것이다. 유교는 새로운 조선왕조의 이념기반이었다. 그리고 유교적 이념을 구현하고자 하는 유신(儒臣)들은 고려왕조에서는 권력층에서 비교적 소외되었던 신진세력이었다.
김대중정권의 성립과 동시에 전라도사람들의 입지가 싹 바뀌듯이, 이성계(李成桂) 정권의 성립과 동시에 유신들의 입지가 싹 바뀌었다. 조선왕조에 들어오면, 유교는 유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엘리트 관료주의 철학이 되어버리고, 구왕조의 기반이었던 불교는 기묘하게도 역으로 민중사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유교의 문치주의의 극성(極盛)을 과시하는 세종조의 찬란한 치세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만년에 세종이 불교에 기울어 불교식(佛敎式) 제례(祭禮)를 거행하고,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한강수륙재(漢江水陸齋)를 지원하고, 흥천사(興天寺)를 중수하고, 불경의 금서와 전경법회(轉經法會)를 강행하고, 세종(世宗) 30년에는 급기야 내불당(內佛堂)을 건립하였던 것은 그 나름대로 피치못할 역사의 아이러니를 잘 말해주고 있다. 광평(廣平)ㆍ평원대군(平原大君)의 두 아들이 죽고, 중궁(中宮)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연이어 잃고,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는 인간적 연약함을 틈타, 유교적 합리주의(合理主義) 정신의 한계가 노출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세종의 호불(好佛)은 인간적 차원 이상의 조선왕조 초기 권력구조 자체의 구조적 갈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세종 자신이 집현전을 활성화시켰고 또 집현전을 통해 길러진 인재들의 활용으로 조선왕조의 유교적 기반을 공고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말년에 이를수록 집현전의 비대와 그 성격의 언론ㆍ정치기관으로의 변모가 왕권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자초하게 되었다. 집현전의 권위가 팽대됨에 따라 원로학자들은 『주례(周禮)』적인 관념론이나 막연한 모화(慕華)주의에 빠져 현실감각을 상실해갔고, 정치적으로도 그들은 자연히 국왕전제(國王國制)체제보다는 유신권문(儒臣權門)에 의한 귀족정치를 원하게 되었다. 이러한 왕권(王權)고립, 특히 엘리티즘 속에 경색되어가는 왕권의 민중으로부터의 소외감을 막기 위한 세종(世宗) 말년의 두 가지 장치가 있었으니, 그 하나가 바로 ‘한글창제’인 것이요, 그 하나가 ‘호불(好佛)’인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지배권력을 대변하였던 불교가, 조선조에 내려오면, 민중의 갈망을 대변하는 형태로 바뀌는 것 또한 역사의 뉴전(扭轉)이다. 요즈음 현세적 권력과 결탁하는 대부분의 엘리트들이 기독교세에 직접ㆍ간접으로 가담하고 민중들은 불교에 노출되는 현상과, 당대의 유교-불교의 관계는 상응성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한글창제라는 우리민족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 집현전학사들의 외면과 반대 속에 진행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유교를 견제하는 의도에서 나온 호불(好佛) 정책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에 『금강경언해』 등의 불경국역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니 『석보상절(釋譜詳節)』이니 하는 우리말로 이루어진 위대한 불교서사시가 창작되었다는 사실, 또 인류역사에 유례를 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우리민중 자신의 불교음악인 『영산회상곡(靈山會上)』이 작곡되었다는 사실 등등은, 억불숭유비(抑佛崇儒) 정책을 추구하는 유교이념국가인 조선에서 왜 언문과 불교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등장했는가에 대한 절묘한 역사의 틈새를 엿보게 하는 것이다.
세조는 원래 세종의 아들 중에서는 가장 영민하고 왕위에 걸맞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렇게 흘러가지 않은 역사를 무단(武斷)으로 되돌린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세조(世祖)의 실책이다. 세조의 치세는 어느 왕 못지않은 훌륭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교정치의 생명은 명분이요 도덕이다. 세조의 쿠데타는 이 땅의 많은 사림들을 변절자로 만들었고 이 땅의 지식의 도덕적 정통성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세조의 업은 이방원이 지어놓은 업의 연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방원의 악업은 그 나름대로 대의가 전제되어 있었고 역사적 필연성이 있었다. 그러나 세조의 악업은 개인의 탐욕에 불과했다.
세조는 이미 수양대군시절부터 세종(世宗)이 내불당(內佛堂)을 건립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도왔고, 승려 신미(信眉)의 아우인 김수온(金守溫)과 함께 불서(佛書)의 번역을 감장(監掌)했다. 그가 군주가 된 후에는 그는 대호불왕(大護佛王)이 되었다. 그의 행적은 바로 『금강경(金剛經)』이 설하는 진리에 모두 위배되는 업(業)의 삶이다. 그러나 그는 『금강경』에 몰입했다. 오늘 우리에게 전해내려오고 있는 『금강경언해』는 바로 세조가 직접 한글로 토(吐)를 단 것이다. 『세조실록(世祖實錄)』 권32(卷三十二), 10년갑신 2월8일(十年甲申二月八日, 신묘辛卯) 조(條)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공조판서(工曹判書) 김수온(金守溫), 인순부윤(仁順府尹, 인순부는 조선 초기 동궁에 딸렸던 관아) 한계희(韓繼禧), 도승지(都承旨) 노사신(盧思愼) 등에게 명하여 『금강경(金剛經)』을 역(譯)하게 하였다.
국역은 주로 한계희가 한 것이라 하고, 효령대군(孝寧大君)과 판교종사(判敎宗事)인 해초(海超) 등의 승려에게 교정케 하였다 한다. 애사(哀史)의 주인공 단종(端宗), 사육신 등, 세조의 잔악한 칼날에 베임을 당한 수없는 원혼의 피맺힌 한을 압구정 앞을 흐르는 도도한 한강물에 씻어보내기라도 할 셈이었나?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의 칠보공덕의 무상함을 깨닫기라도 했단 말인가? 자신을 질타하고 있는 『금강경』의 무아상(無我相)의 명령에 무릎을 꿇을 줄 알았던 과거 군주들의 인간적 고뇌와 정신적 깊이를 다시 한번 새겨 본다.
8. 기존 주해서
『금강경언해』는 소명태자가 분절한 라집한역본(羅什漢譯本)과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구결(口訣)』이 실려있고 이 양자의 국역이 다 실려 있어, 나는 그 판본과 국역을 다 참조하였다. 불행하게도 세조언해본 『금강경』 판본은 아주 후대에 성립한 열악한 판본이며 우리 해인사본과는 출입(出入)이 크다. 연세대학교 국문과 박사과정에 있는 장경준군(張景俊君, 도올서원 제12림 재생)이 『금강경언해』를 내가 활용할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타이프치고 고어(古語)를 현대말로 옮겨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그 공로에 감사한다. 내가 『금강경』을 번역함에 있어 우리 옛말의 아름다운 표현이 참조될 부분이 있을 때는 그것을 살리도록 노력하겠다. 내가 참고로 한 판본은 홍문각(弘文閣) 영인본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上ㆍ下』(1992)이다.
우리나라에는 일찌기 원효(元曉)가 『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산일散佚하여 전傳하지 않는다)와 같은 주석서를 남겼고 그 뒤로도 『금강경』에 대한 주석이 끊이지 않았으나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선초(鮮初)의 고승, 함허당(涵虛堂) 득통기화(得通己和, 1376~1433)의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를 든다. 여기 오가해(五家解)란, 당(唐) 규봉종밀(圭峰宗蜜)의 『금강경소론찬요(金剛經疏論纂要)』,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금강경해의(金剛經解義)」(구결口訣), 양 쌍림부대사(雙林傅大士)의 『금강경제강송(金剛經提綱頌)』, 송(宋) 야보도천(冶父道川)의 『금강경』 착어(着語)와 송(頌), 송(宋) 예장종경(豫章宗鏡)의 『금강경제강(金剛經提綱)』을 지칭한다. 이 다섯 종의 책이 이미 중국에 단행본으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 다섯 종이 합본(合本)으로 등장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에서부터이다. ‘설의(說誼)’란 바로 이 오가해(五家解)에 대한 기화 스님의 주석이다. 『설의(說誼)』 이전에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란 책이 기존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으나 그것이 과연 중국에서 편찬된 것인지, 한국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조차 확실치는 않다. 『오가해(五家解)』의 성립 자체가 기화(己和) 스님의 『설의(說誼)』를 위하여 편집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기화(己和) 스님의 ‘설의(說誼)’는 오직 『금강경(金剛經)』 본문(本文)과 야보(冶父)와 종경(宗鏡)의 저술에 한정하여 주해했을 뿐, 나머지 규봉(圭峰), 육조(六祖), 부대사(傅大士)의 삼가(三家)에 대해서는 오자의 정정에 그칠 뿐 손을 대지 않았다. 이것은 기화(己和) 스님 자신의 사상적 경향과 관련이 있다. 즉 야보(冶父)와 종경(宗鏡)의 주해만이 선가적(禪家的)인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앞의 삼가(三家)는 선종적 입장을 드러내는 참고서적 가치밖에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화(己和)는 『금강경』을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풍(禪風)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후의 성종때 출간된 언해본인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는 야보의 송과 종경의 『제강(提綱)』과 기화(己和)의 『설의(說誼)』만을 따로 분리하여 국역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금강경』 이해의 선적 취향을 잘 나타내준다고 하겠다. 나는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도 참고하였다. 우리시대의 존경스러운 석학, 고익진 선생(高翊晉 先生)의 피땀이 서려있는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제7책第七冊)본을 썼다.
그런데 나는 본시 기존의 주해서들을 과히 좋아하지 않는다. 참으로 필요하지 않으면 쳐다보지 않는다. 원효(元曉) 정도나 된다면 혹 내가 심복할 것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과거 중국의 선지식이나 한국의 고승의 주해들을 쳐다보면 말장난이 심하고, 그 말장난의 이면에 그들의 심오한 뜻이 숨어있는지는 몰라도 이미 우리의 인식체계나 언어 표현과 맞지를 않아 크게 답답함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주해는 『금강경』 산스크리트 원문과 그 인도철학ㆍ인도문화적 배경을 정확히 이해하질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한계가 너무도 명백한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금강경』은 근본적으로 선풍(禪風)으로 접근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나는 내가 깨달은 바를 설(說)할 뿐이다. 본 강해는 나 도올의 실존적 주석이다. 나는 도올서원 제12림에서 『금강경』을 강의할 때 기본적으로 『금강경』 라집역(羅什譯) 고려본과 산스크리트 원문 이외는 읽지를 않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나온 모든 『금강경』 해설서의 공통된 결함은 자기 자신의 이해를 빼놓고 객관적인 주석만을 달고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본문의 해석에 있어서조차도 명료한 논리적 구조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읽어봐도 뭔말인지 모르게만 문장을 구성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글 씀씀이가 아주 인색하여 『금강경』이 나에게 미칠 수 없는 먼 책으로 만들어 놓거나, 쓸데없는 남의 주석이나 나열해 놓거나, 그렇지 않으면 되도 않는 자기 말만 주절거려서 도무지 한문원전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게 흐려놓고 있다는 것이다.
『금강경』은 범본(梵本)이 엄존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금강경』은 범본의 번역서이다. 그러나 우리가 『금강경』을 말할 때는 결코 범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금강경』이라는 인식을 형성해온 것은 라집(羅什)의 『금강경(金剛經)』이다. 그리고 그 의미 체계는 범본과 무관한 독자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범본의 의미체계가 라집본 『금강경』의 우리 이해를 돕기 위한 레퍼런스(참고서)가 될 수 있을지언정, 한문 『금강경』이 범본으로 환원되어야 비로소 그 정당한 의미가 드러난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려는 『금강경』은 일차적으로 라집(羅什)의 한역 『금강경』 자체의 의미체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본(正本)은 오직 우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장판이 유일한 것이다. 그것이 한문으로써 이해되어온 『금강경』의 절대적 기준이다. 그것의 역사적 의미의 총체를 명료하게 밝히는 작업이 『금강경』 이해의 최초 관문이다. 그것에 준하여 타본(他本)이나 타범본(他梵本)을 비교연구함이 타당하다. 범본(梵本) 자체가 정본(定本)이 없는 상황에서(여러 이본異本이 있을 뿐이다) 어찌 본(本)을 밝히지 않으면서 말(末)의 잡화(雜華)만을 쫓을손가! 나는 라집(羅什) 한역 『금강경』의 한문의 정확한 의미를 나의 실존의 의미에 드러난 그대로 설說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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