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달타의 자기파멸과 자기 완성의 길
여러분은 정말 고타마 싯달타라는 청년이 정말 샤카족 카필라성의 왕자로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4성문에서 충격 받는 일들을 목격하고 출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이런 말이 맞을 수도 있겠죠. 살아있는 동안 무지막지하게 비상식적인 기적을 많이 행하고 또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예수의 생애와는 달리 아무런 비상식적인 이야기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싯달타의 실존성에 관해서는 예수만큼이나 구체성이 없습니다. 그에 관한 얘기들은 결국 알고 보면 양식화된 후대의 기술이니까요. 그의 생존연대도 BC 6세기부터 4세기까지 왔다갔다 하니깐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만 해도 최근에는, 사도 바울이라는 유대인 사상가가 신화적인 죽음과 부활의 테마를 통하여 에클레시아(교회조직) 운동을 일으켜 크게 성공하자, 그 성공에 힘입어 복음서기자들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이론도 있고, 또 예수는 당시 많았던 인물의 한 유형일 뿐이며, 따라서 예수가 일종의 집단적인 고유명사일 수 있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가공적인 이야기라도 역사적 실존성의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지요. 싯달타에 관해서도 히말라야 네팔 지역 어느 산 중턱의 조그만 종족의 부잣집 청년 정도로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의 ‘4문출유(四門出遊)’라 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의 고뇌의 테마는 노(老, 늙음)ㆍ병(病, 병듦)ㆍ사(死, 죽음)의 3자입니다. 노ㆍ병ㆍ사가 고(苦)로서 자각되었다는 것은 인간 모두가 평소에 젊음에 대한 오만과 건강에 대한 오만과 살아있음에 대한 오만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죠. 젊음에 대한 오만이 깨질 때 인간의 늙어감에 대한 비통이 생겨나고, 건강에 대한 오만이 깨질 때 병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게 되고, 삶에 대한 오만이 깨질 때 나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노ㆍ병ㆍ사를 고(苦)로서 자각할 수 있었던 아주 예민한 감성의 젊은이가 싯달타였기에 그의 고뇌는 모든 인간에게 공감이 되는 보편성이 있는 것입니다. 노ㆍ병ㆍ사를 자각할 때,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결국 나라는 존재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죠. 이 자기파멸의 과정을 어떻게 자기완성의 길로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고뇌 속에서 무명(無明, 인간의 본질적 무지)을 발견하고, 사성제의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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