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대승화 의의
세부적인 면에서 얘기할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일단 대승불교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짓고, 『반야심경』 본문에 즉하여 더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하여 보기로 하죠! 대승불교의 혁명적 성격을 우리는 너무도 진부한 상식적 언어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고 싶습니다.
기독교의 예를 들자면, AD 1세기에 일으킨 예수운동(Jesus Movement) 그 자체는 오히려 매우 혁명적이고 구약(소승)에 대하여 대승적인(신약: 새로운 약속)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서화 되면서 정경화 되었고 권위화 되었습니다. 또다시 그 권위를 뒤엎는 새로운 대승의 개방의 과정을 겪지 못했습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도 일정한 권위의 틀 속에서만 머문 것이고 진정한 대승의 종교혁명을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아나밥티스트들(Anabaptists, 자각적이지 못한 유아세례는 무효라는 것을 주장한 사람들)의 주장도 수용하지 못하고 박해했으며,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 1489~1525, 종교개혁시대의 래디칼한 신비주의 설교자. 루터에 반대)의, 성경은 단지 과거의 영적 체험의 잔재일 뿐, 그것이 내 마음속에서 영적 생명력을 갖지 않는 한 휴지쪽일 뿐이라는 주장을 이단으로 간주했습니다. 뮌처는 비참하게 고문당하고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역사적 불타로부터 한 500년간 지속되어온 초기불교의 모든 이스태블리쉬먼트(establishment, 질서)를 뒤엎었습니다. 교리와 교단조직과 성원(成員)의 성격까지 모두 뒤바꾸는 혁명을 감행했습니다. 대승불교의 출현이 없었더라면, 호모사피엔스가 이 지구에서 만들어낸 모든 종교는 그야말로 사악한 도그마와 배타와 전쟁의 판타지만 만들고 스러지는 그러한 족적만을 남기지 않을까요?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불교가 아닌 반불교, 종교가 아닌 반종교의 위대한 언설이라는 나의 첫 인상을 이제 확인해봅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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