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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3장 싯달타에서 대승불교까지 - 구마라집 『심경』, 번역본의 문제점 본문

고전/불경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3장 싯달타에서 대승불교까지 - 구마라집 『심경』, 번역본의 문제점

건방진방랑자 2021. 7. 14.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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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 심경, 번역본의 문제점

 

 

자아! 그렇다면 구마라집의 번역은 소품일까요, 대품일까요? 우리가 보통 소품이라 하면 현장(玄奘)심경을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라집의 번역을 대품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라집의 번역은 현장의 것과 같은 소품계열입니다. 상기의 8개 중에서 소품계는 127뿐이고 나머지 5개는 다 대품계입니다. 그런데 제7심경』」은 번역이 아니고 산스크리트어본을 발음대로 한자로 써놓은 것이죠. 그러니까 한자발음기호지요. 얼마나 부정확한 발음표기이겠습니까마는 이러한 음역본이 남아있기 때문에 한자의 음가를 재구(再構)하는 데 엄청난 도움을 줍니다. 사실 불경 때문에 중국의 성운학(聲韻學)이 발전했다고도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소품계 한역은 라집 것과 현장 것 두 개밖에는 없는 셈입니다.

 

금강경번역을 놓고 생각해보죠. 금강경의 라집역을 우리는 구역(舊譯)이라 하고 현장(玄奘)역을 신역新譯이라 한다는 것은 제가 이미 저의 금강경강해(신판 53쪽을 참고할 것)에서 충분히 해설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번역의 경우 현장의 신역이 라집의 구역에 영 못 미칩니다. 이것에 대한 해설도 제가 이미 충분히 금강경강해에서 논구한 것입니다. 문장의 간결성과 심미적 아름다움과 의미전달력과 반복의 리듬감에 있어서 도저히 현장의 신역이 라집의 구역의 오리지날리티(originality)를 못 미치는 것이죠. 금강경의 경우는 라집역이 월등히 좋다! 그런데 반야심경(般若心經)의 경우는 현장역이 월등히 좋다!

 

~ 그럼, 반야심경(般若心經)의 경우도 그까짓 260 자밖에 안 되는 동일 텍스트인데 어찌하여 라집역이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고 현장(玄奘)역이 절대우위를 차지했을까? 어떤 연유에서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까?

 

자아~ 이런 문제를 텍스트 크리틱을 해가면서 접근하면 또 하나의 책이 필요합니다. 이런 문제는 텍스트 비평의 전문영역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불교계는 문헌의 고등비평에 너무 소홀해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텍스트비평적 시각을 자세히 펼치자면 너무 난감한 문제가 많습니다. 결론만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누구든지 문헌비평의 전문지식이 없더라도 라집역과 현장역을 비교해 놓고 보면, 라집역이 너무도 졸렬하고 같은 의미체계를 쓸데없이 반복하거나, 전달하는 내용도 그 포괄성이나 심미적 질감에 있어서 현장역에 썩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선 제목만 비교해보아도 당장 라집역의 저열성을 알 수가 있습니다.

 

 

라집 제목 현장(玄奘) 제목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
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
반야바라밀다심경
般若波羅蜜多心經

 

 

가장 큰 차이는 심경(핵심이 되는 경전)’이라는 말을 대명주경으로 바꾸었다는 데 있습니다. ‘흐리다야 수뜨람(hṛdaya-sūtram)’대명주경이라고 바꿀 이유가 없지요. ‘대명주(大明呪, 크게 밝은 주문)’라는 말이 본문 속에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반야바라밀다를 일종의 주술적인 주제로 간주하여 그것을 제목으로 내건다는 것은 반야의 사상을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대명주의 ()’무명(無明)’에 반대되는 개념이며 그것 자체로 이미 반야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을 주술인 것처럼 규정하는 것은 적합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대명주경이라는 제목에는 후대 밀교적 성향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반야바라밀다반야바라밀로 축약되어 있습니다. 축약형이 아무래도 더 후대의 관례인 경우가 많지요.

 

셋째로 마하(摩訶)’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이미 반야바라밀다는 대승운동에서만 가능한 개념입니다. 그 앞에 마하(크다, 위대하다)’라는 군소리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원어도 ‘prajñāpāramitā’이지 그 앞에 마하가 붙어있지 않습니다. ‘반야바라밀다심경’, 그 얼마나 간결하고 심플한 제목입니까?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 좀 촌스러운 무당집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라집은 다른 계열의 소품 산스크리트본을 기초로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학자들이 라집역을 현존하는 많은 산스크리트본과 대조연구한 결과, 라집본은 결코 산스크리트원본을 전제로 한 번역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라집본은 현장(玄奘)의 한역을 보고 적당히 개작한 후대의 날조품이다라는 얘기가 되는 거죠. 이렇게 되면 왜 사람들이 현장역을 택하고 라집역을 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쉽게 설명이 됩니다. 현장역 이전에 라집역이 실존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리고 결정적인 사실은 불교사에서 라집의 대명주경이 언급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죠. 라집은 현장보다 2세기 하고도 반이 이른 시대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시기에 라집의 반야심경번역이 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최초의 기록은 지승(智界)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AD 730)에 나오는데, 그 시점은 현장역보다 81년 후의 시점입니다.

 

하여튼 복잡한 얘기는 그만둡시다. 라집역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 그 텍스트도 신빙성이 희박하다. 그러므로 가장 권위 있는 최초의 심경은 우리 고려제국의 대장경 속에 들어있는 현장(玄奘)반야바라밀다심경이다! 하는 것만을 기억해두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 전체가 부정될 수도 있으며 라집의 번역의 권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학문의 세계에서 독단은 불가합니다. 라집이 번역한 대품반야경계열에 25천송에 해당되는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이라는 책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이 라집 번역본에서 반야심경과 같은 내용을 전하는 구문들을 뽑아 라집의 대명주경과 비교를 해보면 도저히 대명주경의 문장이 라집의 친필이라고 믿겨지질 않아요. 하여튼 이런 문제는 생략키로 하지요. 저는 단지 왜 현장(玄奘)심경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해보았을 뿐입니다. 최종적 결론은 이것입니다.

 

반야심경에 관해서는 현장의 심경텍스트만을 확실하게 이해하면 만사 오케이!

 

 

 

 

인용

목차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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