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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4장 『반야바라밀다심경』 주해 - 제3강 사리자에서 부증불감까지, 『심경』의 육불을 바르게 이해하는 법 본문

고전/불경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4장 『반야바라밀다심경』 주해 - 제3강 사리자에서 부증불감까지, 『심경』의 육불을 바르게 이해하는 법

건방진방랑자 2021. 7. 14.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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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의 육불을 바르게 이해하는 법

 

 

여기 제법(諸法)’이라 하는 것은 모든 다르마(dharma)’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바대로 여기 법이라 하는 것은 무슨 거대한 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사건, 이벤트, 사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Event)이 공상(空相, 공의 모습)인 세계에서는 생멸(生滅)이 없으며, 구정(垢淨)이 없으며, 증감(增減)도 없다. 이 공상의 세계, 반야바라밀다를 깨달아 조견한 코스모스는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여기에 세 종류의 아니 불() 대구가 나열되어 있는데, 상대되는 개념에 아니 불을 붙여 논의를 전개하는 방식은 인도인에게 고유한 것입니다. 우파니샤드에도 이런 식의 용례가 많이 있고, 또 용수, 무착(無着, Asariga, AD 310~390년경. 미륵-무착 세친을 유식학파의 3대 논사라고 한다. 무착은 세친의 형이다)의 논의에도 나옵니다. 특히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이 육불(六不)을 곧바로 용수의 중론의 첫머리 관인연품(觀因緣品)에 나오는 팔불중도(八不中道)’와 직결시켜 논의하는 무책임한 언설들이 많습니다(불생역불멸不生亦不滅, 불상역부단不常亦不斷, 불일역불이不一亦不異, 불래역불출不來亦不出). 그러나 중론중론일 뿐이고, 심경심경일 뿐입니다. 심경의 문자에다가 용수의 논리의 틀을 덮어씌우는 것도 천박한 오류에 불과합니다.

 

용수의 논의는 분명 ‘neither ~ nor ~’라는 짝을 의식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도라고 하는 원시불교의 중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경은 그 논의의 출발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것은 생하지 않고 멸하지 않으므로 그 중간의 양면을 포섭하는 중도를 조견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냥 생하지 않는다’ ‘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짝이긴 하지만 그 나름대로 절대적인 독립명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경의 육불은 기존의 기타 어느 곳에서도 동일한 용례를 찾을 수 없습니다. 심경의 육불은 유니크한 것이죠.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6개의 명제는 모두 그 나름대로 긍정되어야만 하는 절대명제들입니다. 여기에 중도를 운운하고,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운운하면서 경지가 높은 체하고, ‘()-()- ()’의 천태(天台) 논의를 과시한다면, 그것은 심경의 논의를 천년 전에 빚어놓은 반야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김 빠진 맥주로 만들어놓는 것입니다. 나는 광덕사 변소깐에서 심경을 그렇게 읽었습니다. ~ 나는 탄생하지도 않았구나! ~ 나는 멸하지도 않았구나! 엄마ㆍ아버지의 염색체조합으로 내가 태어났나? 나는 죽어 스러지지도 않을 것인가? ‘불생불멸을 이러한 수수께끼 그 자체로 해석하지 않는 한 심경은 바르게 읽히지 않습니다.

 

 

 

 

 

목차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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