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돌이킬 수 없는 차이로 인해 내가 더욱 풍요로워지는 그곳
송지원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가족을 되찾게 되고, ‘이한규’의 동생 티가 팍팍 나는 새로운 이름 ‘이상규’도 갖게 되었다. 이한규가 영국에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비행기 표를 선물하고는 자신도 몰래 그 비행기를 탄 이상규-송지원. 언뜻 보아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송지원이 아무리 이상규가 되어도 다가갈 수 없는 ‘평범한 삶’의 아득한 장벽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지만 남파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은 그를 평생 따라다닐 것이다.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의 ‘편’도 아니기에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마음 편히 살 수 없게 된 송지원. 교육비는 물론 생활비 자체가 터무니없이 비싼 한국은 송지원 같은 ‘무리 안의 디아스포라’가 살기에는 너무 척박한 땅이 아닐까.
『의형제』는 ‘자기 땅’에서 디아스포라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21세기 판 오디세이다. 오디세우스는 돌아올 집과 든든한 삶의 토대가 있었지만, 송지원에게는 돌아갈 집은커녕 삶의 토대 전체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스스로의 가난한 몸뚱이 자체가 ‘늘 움직이는, 불안한 집’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상황에도 아주 작은 희망의 틈새는 남아 있다. ‘싸구려 흥신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한규의 회사 ‘인터내셔널 테스크포스’는 이한규뿐 아니라 이 메마른 디아스포라들의 기나긴 겨울 같은 삶을 끌어안는 따스한 요람이 되지 않을까. 이한규는 이미 엄청난 현상금이 걸린 라이다이한 출신 조폭을 늠름한 직원으로 고용한 상태다. 그러고 보면 이한규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죄인조차 자신의 가족으로 만드는 뛰어난 용병술의 대가다. ‘빨갱이 잡는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잃어버린 사람 찾기’로 자신의 직업을 바꾸어버린 이한규의 사람 찾기 프로젝트는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제 자리로 돌아오게 만드는 멋진 사업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바흐친이 말한 ‘이질성’의 언어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정해진 질서’가 아닌 매번 새로 만들어지는 ‘카니발의 언어’로 거듭나는 그곳. ‘나’라는 존재가 영원히 종결되지 않고 타자를 향해 끝없이 열린 정체성으로 기쁘게 살아가는 그곳. 육체와 육체, 문화와 문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사이, 그 모든 ‘경계’와 ‘접촉지점’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차이의 충돌을 이질성의 카니발로 만드는 지혜. 너와 나의 차이로 인해 너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돌이킬 수 없는 차이로 인해 내가 더욱 풍요로워지는 그곳. 바흐친의 말처럼, 타자를 향해 끊임없이 열려 있는 존재의 기원은 ‘대화’가 아닐까. 혼자 있을 때도 우리에겐 대화가 필요하다. 단지 ‘동일성’으로 수렴되는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깃들어 이미 오래전부터 살고 있는 수많은 타자들과의, 소리 없이도 이미 왁자지껄한, 서로의 차이로 인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수많은 그대들과의 대화가. 영원히 완결되지 않을 나를 향해 말을 거는 타자의 모든 의심과 비판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대화를 향한 창조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타자의 말은 내가 나의 말의 잠재력에 말을 걸 수 있게 한다. 내적 대화를 통해 생성되는 것은 아직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내 말의 잠재력이다. 나의 말도 타자에게는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타자 또한 낯선 나의 말을 통해서 자신의 잠재력에 말을 걸게 될 것이다. 그가 나의 말을 향해 열려 있다면 말이다. 타자를 향해서 마음을 열었을 때 나와 타자는 모두 자신의 말에서 ‘잠재력’을 발견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창조성을 발휘하게 된다. 진정한 대화는 그 자체가 창조를 부추기는 행위인 것이다. (……) 일상이란 매일 틀에 박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창조 행위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일상의 말과 행위는 그 자체로 나의 것이며 내가 내 말에 책임을 지는 한 나의 말은 언제나 창조적이다. 책임지는 자아, 창조하는 자아야말로 바흐친의 산문학에 거주하는 시민이다. 책임지는 자아, 창조적인 자아는 언제나 자기 말의 외부를 통해, 잉여를 통해, 타자를 통해 자신의 말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말에 대한 타자의 시험을 두려워하는 사회, 말에 대한 타자의 의심을 통과하지 않는 말을 내뱉는 사회, 그렇게 의심받지 않은 말이 지배하는 사회에 필요한 것이 대화다. 그런 뜻에서 바흐친은 다른 사람의 말에 응답하는 자신과 먼저 대화하기를 권한다.
-게리 솔 모슨·캐릴 에머슨 지음, 오문석 외 옮김, ‘옮긴이의 말’ 중에서, 『바흐친의 산문학』, 책세상, 2006, 799~8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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