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①강: 박동섭 강의의 특징
강의가 계속 되면서 어느덧 비는 그쳤다. 하지만 바람은 장난 아니게 불며 성큼 다가온 봄을 시샘하듯 갑작스레 추위가 느껴진다.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퇴근길을 재촉하지만, 에듀니티에 모인 사람들은 배움의 열기를 가득 채우며 그 시간을 즐기고 있다.
오늘 강의의 제목은 ‘하품 수련의 역설’이지만 강의가 시작된 지 1시간가량이 지났음에도 ‘하품’이란 단어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 어느덧 비는 그쳤지만, 바람이 장난 아니게 분다. 그러다 보니 체감온도가 엄청 내려갔다.
강의 제목은 하나의 단서일 뿐이다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동섭쌤이 제목을 헛갈렸거나, 다른 할 얘기가 많아서 뒤로 미뤘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작년 제주 강연 때 우치다쌤은 자아를 낡은 목조 건물로 비유했다. 이에 대해 동섭쌤은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은 더러운 목조 아파트 건물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메타포를 가져오면서 중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는 화법으로 탁월하게 풀어내셨다. 물론 강연하시면서 레비나스의 ‘레’자도 꺼내지 않으시고 레비나스의 철학을 풀어내는 스승의 모습에 또 감탄”이라 평가하며, 자신도 그런 스승을 본받아 비고츠키의 ‘비’자도 꺼내지 않고 비고츠키를 전파하겠노라고 의지를 다졌었다.
▲ 우치다쌤의 말을 동섭쌤은 감탄을 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게 바로 '스승은 있다'에서 나오는 배움이 기동하는 장면이다.
그런 의지가 바로 올해 초에 있었던 초중등 교원 연수였던 ‘침대에서 읽는 비고츠키’ 강연에서 빛을 발했다. 그 강의엔 비고츠키의 ‘비’자도 언급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옆집 바이러스’, ‘동천홍의 울음소리’, ‘『14세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라는 책을 읽으면 아이들의 마음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걸 알게 된다’와 같은 이야기만 가득했다. 그러니 강의의 전체적인 내용을 생각하지 않고 ‘비고츠키의 이야기가 언제 나오나?’라고 기다리던 사람이라면, ‘뭐야 왜 제목대로 강의하지 않고 엉뚱한 말만 하지?’라고 불만을 제기할 만도 하다.
하지만 동섭쌤 강의 내용을 쭉 들어보면, 그런 이야기들이 모두 ‘환경과 인간은 떼려야 뗄 수 없다’는 비고츠키의 아이디어로 세상을 본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즉, 비고츠키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ZPD, 구성주의, 비계설정 등의 파편화된 한국적 비고츠키 이해 방식)만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 비고츠키안의 시각으로 강의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처럼 오늘 강의도 ‘하품 수련의 역설’이란 이야기만 아직 나오고 있지 않을 뿐, 실질적으론 처음부터 제목과 관련된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었던 셈이다.
▲ 동섭쌤 강의와 드라마 [진]. 둘은 서로를 돋보이게 해주는 필수템 같은 느낌이다.
강의 형식은 열하일기다
다양한 주제를 통해 이야기를 펼쳐내려다 보니, 강의의 형식은 독특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 교육학을 강의하는 경우, 교육학에 한정된 이야기만 하며, 교육에 관련된 예화를 들게 마련이다. 그렇게 해야만 더 전문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하고, 이 땅의 학문 풍토가 그렇게 짜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박사博士’라고 할 때의 博이라는 한자가 ‘넓다’는 뜻을 지녔음에도, ‘엷다, 얇다’의 뜻을 지닌 薄으로 느껴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지금의 전문가들은 ‘博士(안목을 지니고 넓게 볼 수 있는 사람)’가 아닌 ‘薄士(자신이 아는 것만 진리로 다른 것을 배척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 지금의 박사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느낌이 든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이런 풍토는 근대화 이후 서양학문이 본격적으로 수입되며, 각 학문을 잘게 잘게 쪼개어 분과화하며 시작되었다. 처음엔 잘게 나누어 하나의 학문만을 깊게 연구하다보니, 그 학문의 깊이가 깊어지고 다양한 연구 성과들이 쌓여 전문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자잘한 것까지 따지고 들어가게 되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그 학문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시각은 사라져 갔다. 청나라에서 발달한 고증학考證學이 이와 유사한데, 『논어』나 『맹자』 등과 같은 전통적인 철학서가 후대에 전승되는 과정 속에 어떻게 글자가 바뀌었으며, 때론 어떤 글자들이 추가되고 삭제됐는지를 따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 철학서의 원본을 좀 더 자세히 알게 됐지만, 작은 것에 너무 천착하여 오히려 큰 것들을 보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게 됐다. 이처럼 지금의 학문풍토도 그러하다 보니 학문의 질은 급격히 떨어졌고, 학문의 내용은 협소해졌다.
그런데 근대화 이전의 시대에 살았던 학자들은 문사철文史哲을 아우르며, 세상과 사람, 그리고 삶을 논했다. 그래서 조선시대 학자 중 한 명인 연암이 쓴 『열하일기』만 보더라도, 국제 정치학, 성벽 건축술, 철학, 인간학 등이 모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었고, 그 때의 안목은 여러 사람에게 깊은 감흥을 안겨줬다. 이런 것을 알기에 동섭쌤도 강의를 할 땐 종횡무진 역사를 누비고, 철학을 주파하며, 문학작품을 나열하며 진행한다. 이것이야말로 일반적인 강의 방식과 동섭쌤의 강의 방식이 뚜렷하게 차이 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 그래서 재밌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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