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禮義)
이 정도면 기본적인 것은 대략 정리되었지만,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해서 소음인의 분류 기능, 즉 지방(地方)의 기능이 사회생활에서 가지는 의미를 한번 따져보자. 분류의 기능이 강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할 줄 안다는 것이다. 또 내가 모르는 부분은 모르는 부분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도 여러 가지로 갈린다. 자기가 모르는 부분을 순순히 인정하는 수준 있는 태도부터, 그 부분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라고 무시하는 태도까지. 소음인이라고 다 같은 소음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쨌든 아무리 000없는 소음인도 최소한 인정은 한다. 이런 것들이 소음인이 가지는 민주사회에 어울리는 중요한 장점이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민주시민인 소음인을 보고 소양인들은 흔히 “예의가 없다”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또 반대로 소음인은 소양인이 “예의가 없다”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꽤 있다. 재미있는 일이다. 민주사회에서 중요한 두 가지 가치관이 서로 부딪히는 부분이다.
집중력이 강한 사람이 세상일에 서툰 이야기는 많이 나온다. 달걀인 줄 알고 시계를 삶았다는 뉴턴, 별 보며 가다가 웅덩이에 빠졌다는 탈레스 등, 뭐 사람 이름은 잘 기억 안 나지만 위인전 뒤지면 그런 이야기가 많다. 집중력이 강할수록 자기 집중 범위 밖의 일은 어두우니까. 당연한 세상의 규칙을 본의 아니게 무시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들이 세회(世會)에 밝은 소양인이 보면 아주 예의를 모르는 짓이다. 공공에 피해를 주는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거꾸로 소음인이 소양인을 보면 개인적 특수성을 무시하고 획일화된 기준을 강요하는 것으로 느낀다. 아무리 세상의 통례가 그렇더라도 내가 불편하면 불편한 것이다. 불편해하는 사람에게는 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정해진 규칙의 준수와 개인적 특성의 고려라는 두 가지는 늘 부딪힐 수밖에 없는 난제이다. 서로 자기가 못 가진 기운을 배우려 하고, 타인이 중시하는 부분을 같이 배려해주는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을 예의 없다고 비난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물론 교양에 따라, 훈련 정도에 따라 전체적인 예의의 수준이 있다. 따라서 기본적인 예의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비난하는 사람의 오해인 경우도 그에 못지않게 많다. 비난의 대상이 된 사람이 비난을 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예의를 지키는 다른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비난을 하는 사람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거나 모르는 영역인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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