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역사의 경계
당시 그리스와 이오니아가 맞부딪는 과정은 두 개의 그리스 신화 속에 전해지고 있다. 첫째는 오프닝 게임에 해당하는 아르고호의 원정이다. 그리스 중부 테살리아 출신의 해적인 이아손은 이오니아에 빼앗긴 그리스의 보물인 황금 양피【황금 양피는 헤르메스 신이 테살리아의 네펠라라는 왕비에게 선물로 준 양의 가죽이었다. 네펠라는 남편이 후궁을 얻자 자기 아이들을 구박할까 두려워 아이들을 양의 등에 태워 멀리 보낸다. 양은 동쪽으로 날아갔는데, 그만 헬레라는 이름의 여자아이가 바다로 떨어졌다. 그래서 그리스 시대에 이 바다는 헬레스폰토스(‘헬레의 바다’)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오늘날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고 있는 터키의 다르다넬스 해협이다. 양은 계속 날아가 흑해 연안의 콜키스 왕국에 사내아이를 내려놓았다고 한다】를 찾으러 50명의 지원자들과 함께 아르고호를 타고 원정을 떠난다. 여기에는 헤라클레스, 테세우스, 오르페우스, 네스토르 등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이 총출동했다. 이들은 지금의 흑해 연안에 있는 콜키스를 공략해 황금 양피를 빼앗고 개선한다.
오프닝 게임에 뒤이은 메인이벤트가 바로 트로이 전쟁이다. 수천 년 동안 트로이 전쟁은 호메로스가 지어낸 신화로만 알려졌다. 신화가 역사로 바뀐 것은 어릴 때 호메로스의 책을 읽고 전설이 아니라 사실로 믿은 독일의 기업가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이 1870년에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덕분이다. 이 전쟁이 벌어진 시기는 기원전 13세기 중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리아스』가 전하는 트로이 전쟁은 신들의 장난 때문에 일어난다. 신들의 결혼식 만찬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그 복수로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글이 쓰인 황금 사과를 만찬장에 던진다. 당연히 아름다움에서 자기가 최고라고 자부하는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의 세 여신이 그 사과를 차지하기 위해 다툰다. 제우스는 비록 최고신이지만 아내(헤라)와 딸(아테나)이 끼어 있으니 쉽게 판결을 내릴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양치기인 파리스에게 판결을 의뢰한다.
파리스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주겠다는 아프로디테의 ‘뇌물’에 넘어가 그녀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에리스가 신들의 세계에 내던진 ‘불화’는 엉뚱하게도 인간 세상에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파리스가 아내감으로 지목한 여자는 불행히도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인 헬레네【헬레네는 그리스인들이 스스로를 자칭하는 이름이다. 원래 그리스는 로마 시대에 로마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를 헬라스라고 부르고 자신들을 헬레네의 자손, 즉 헬렌족(Hellenes)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투키디데스는 그리스라는 이름을 전혀 쓰지 않고 헬라스라는 이름만 썼다(헬라스보다 그리스라는 로마식 이름이 후대에 더 널리 쓰인 데서도 문명의 서진 현상을 볼 수 있다. 오리엔트의 지명들도 그리스인이 붙인 것들이 후대에 많이 전한다. 오리엔트나 메소포타미아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어다)】였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헬레네를 꾀어 함께 트로이로 달아난다 (파리스는 원래 트로이의 왕자였으나 장차 나라의 화근이 되리라는 신탁이 있어 트로이에서 쫓겨나 그리스에서 자랐다).
그러자 그리스 전체가 발칵 뒤집힌다. 졸지에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다른 왕들을 부추겨 트로이 공격에 대대적으로 나선다. 이리하여 아가멤논(메넬라오스의 형)을 총 사령관으로 하고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아이아스, 디오메데스 등 당시 그리스의 영웅들을 총망라한 대규모 원정군이 편성된다. 아르고호의 원정군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2차 드림팀’이다
그리스와 트로이는 양측 모두 신들의 지원과 간섭을 받으면서 10년 동안 전쟁을 벌인다. 최후의 승자는 그리스였다. 오디세우스가 세운 계략에 따라 그리스는 커다란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 성문 앞에 놔두고 뱃머리를 돌려 철군하는 척했다. 트로이군은 기뻐하며 그 목마를 성안에 들여놓았다. 밤이 되자 그때까지 목마 안에 숨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은 몰래 성문을 열어놓았고, 그리스 본대가 물밀듯 성안으로 쳐들어왔다. 트로이는 이렇게 함락되었다. 이후 그리스의 영웅인 오디세우스가 귀환하는 과정은 「오디세이아」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 신들의 게임 백설공주의 계모는 거울에게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냐고 물었지만, 그리스의 세 여신은 양치기 파리스에게 그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이 두 그림은 그 상황을 담은 회화 작품 <파리스의 판결>인데, 위쪽은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의 작품으로 아들 에로스를 데리고 있는 여신이 파리스의 ‘낙점’을 받은 아프로디테다. 아래쪽 그림은 독일의 화가 안톤 라파엘 멩스의 작품이다.
그러나 트로이 전쟁에서 신화의 포장을 벗기면 전혀 다른 알맹이가 나타난다. 현실의 트로이 전쟁은 신들의 장난이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전개된다.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가 지중해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왜 지중해로 진출하려 했을까? 사실 그들은 그러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했다. 그리스의 지형은 넓은 들판이 없고 산지가 많다. 더구나 토질도 매우 척박해 농경이 크게 발달하기는 어렵다. 거친 토양과 건조한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포도와 올리브 정도만 재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일찌감치 포도와 올리브를 가지고 무역 활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무역 활동이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약탈과 해적질이나 다름없다. 이들의 해적질이 활발해지면서 기원전 12세기부터 오리엔트의 강국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앞에서 본 바 있다(51~52쪽 참조). 바야흐로 지중해 세계는 강력한 패자가 사라지고 군웅이 할거하는 시대를 맞았다【당시 동부 지중해 일대는 그리스인, 페니키아인, 이오니아인 등 해적들의 세상이었다. 섬은 물론 해안 지대까지도 해적들의 약탈과 노략질이 심했으므로 사람이 살기 어려웠다. 그래서 초기의 폴리스들은 해적들 때문에 해안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여러 해적 가운데 점차 그리스인 출신의 해적들이 세력을 키워갔으나 그리스 해안이라고 해서 그리스 해적들이 봐준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당시에는 단일민족 의식이 없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이 틈을 타서 그리스인들은 에게 해 일대를 장악하려 했는데, 최대의 걸림돌이 이오니아 지역의 국가들이었다. 그리고 트로이는 바로 그 길목에 있는 국가였다. 트로이 전쟁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신구 세력 간에 벌어진 전쟁이었던 것이다.
▲ 트로이 성벽 호메로스가 기다란 시를 써서 호들갑을 떨었고 트로이를 물리친 그리스 문명이 서양 문명의 뿌리를 이루었다는 것 때문에 역사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실은 사진에서 보듯이 트로이는 터키 북부의 조그만 성이었을 뿐이다(당시에도 트로이보다 더 큰 이오니아의 도시들은 많이 있었다). 또한 10년이나 끌었다는 트로이 전쟁 역시 실은 그 당시에 흔했던 그리스 해적과 소아시아 항구도시의 그렇고 그런 싸움이었을 뿐이다.
트로이 전쟁은 10년이나 끌었지만 실상 처음부터 승부는 정해져 있었다. 조그만 성곽 도시에 불과한 트로이가 여러 세력이 연합한 그리스군을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그리스군은 트로이에 도착하자마자 벌인 서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때 조금만 더 고삐를 죄었더라면 트로이 전쟁은 길어야 몇 개월로 끝났을 것이다(물론 그랬다면 오늘날까지 그 전쟁이 전하지 않았겠지만).
전쟁이 오래 지속된 이유는 그리스군이 ‘딴전’을 많이 피웠기 때문이다. 그리스군은 애초부터 군량을 충분히 가져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 병력을 투입해 전쟁을 빨리 끝내려 하지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바로 체질화된 해적질 때문이다. 그리스군은 전쟁 기간 내내 인근 지역을 개간하거나 약탈하느라고 항상 전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그런 탓에 전쟁이 10년이나 이어졌고, 또 오디세우스가 귀환하는 데도 10년이나 걸린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약탈과 개간의 경험은 곧이어 그리스의 암흑시대가 닥칠 때 이오니아 식민시를 개척하는 원동력이 된다.
신화 속에 나오는 아르고호의 원정과 트로이 침공은 이오니아의 왕국들이 그리스의 양가죽이나 여자를 빼앗는 등 먼저 시비를 걸었다가 그리스에 패배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그리스 측의 신화’였기에 그렇게 윤색된 것일 뿐 사실은 정반대다. 그리스는 생존의 필요성 때문에 적극적으로 해상 진출에 나섰던 것이다. 어쨌든 그 결과로 그리스는 지중해의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 바이러스 침투 오디세우스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트로이의 목마다. 잠수함처럼 목마를 타고 있는 그리스 병사들이 보인다. 이 전설에서 나오는 트로이의 목마(Trojan horse)라는 말은 현대 전쟁에서도 파괴나 신전을 담당하는 비밀 공작대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며, 1990년대 초 컴퓨터 바이러스의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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