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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 4부, 5장 십자가 없는 십자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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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 4부, 5장 십자가 없는 십자군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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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장 십자가 없는 십자군

 

 

땅에 내려온 교회

 

 

영주의 장원에는 교회가 하나씩 있었다. 교회는 종교 조직이면서도 현실에 존재하는 기구다. 그럼 이 교회는 누구의 관할을 받아야 할까? 종교 계통상으로는 로마 교황의 지휘를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실상은 영주의 지배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는 순수한종교 조직인 것만이 아니라 막대한 토지를 지닌 대지주이기도 했던 것이다(더구나 오늘날도 그렇듯이 당시 교회 재산은 면세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토지를 교회에 기증하고 각종 혜택마저 부여하는 영주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다.

 

사실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교회는 봉건 군주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샤를마뉴의 시대에는 정복 사업이 진행 중이었으므로 피정복지의 주민들을 통합하는 데는 종교만 한 수단이 없었다. 또한 노르만의 민족이동 시기에도 서유럽 국가들은 이민족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포교를 적절히 이용했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민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서유럽 세계 전체가 적어도 종교적으로는 한 몸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중세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교회의 필요성은 점차 약해졌다. 교회는 중세 사회의 핵심이었으므로 봉건 영주들은 교회를 지원하는 것을 여전히 의무로 여기고는 있었으나, 영주 자신이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경우를 제외하고는 과거의 선배 영주들만큼 교회에 대한 애착을 가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교회를 지배 수단의 하나로 여기고 자신의 친척들을 주교나 사제로 임명하는 경우도 많았다(이로 인해 주교는 종교인이라기보다 정치인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더 큰 문제는 교회 내부에 있었다. 세속의 재산과 특권을 가지게 된 성직자들은 배가 불러갈수록 종교적으로 타락해갔다. 게다가 성직자의 수가 늘면서 자질이 모자란 자들도 많이 생겨났다. 교리상 금지되어 있는 결혼까지 마음대로 하는가 하면, 여러 여자와 동거하는 성직자도 있었다. 주교가 약탈하고 사제가 전쟁을 벌이는 경우는 흔한 일이 되었다. 이런 타락상에 실망한 뜻있는 교인과 성직자 들은 교회를 개혁하지 않으면 교회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여겼다사실 교회의 타락 현상은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4세기부터 있었다. 따라서 교회 개혁 운동도 그 당시부터 벌어졌는데, 그 결과로 생긴 게 수도원이었다. 수도원 운동은 동방교회에서 먼저 시작되어 5세기부터는 서유럽에서도 본격화되었다. 529년 이탈리아의 베네딕투스는 로마 남쪽의 몬테카시노에 서방교회 최초의 수도원을 세우는 데, 이것이 베네딕트 수도회의 시작이다.

 

 

교회의 권위 땅은 분열되어 있지만 하늘은 하나다. 세속 군주들은 각자 자기 영토에서는 왕으로 군림해도 교회에서는 누구나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림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 부부가 성모 마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다. 교회는 군주를 능가하는 지고의 권위를 오래도록 누린 탓에 부패와 타락의 길로 들어섰다.

 

 

10세기 초에 설립된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은 처음부터 단호한 개혁 의지를 가지고 출범했다. 개혁의 취지는 교회 타락의 근원인 세속과의 연관을 끊고 교회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조문보다 중요한 것은 시행령이듯이, 그 취지보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세칙이었다. 교회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하지만 세속과의 연관을 끊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교회가 토지와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클뤼니 수도원을 승인한 사람이 아키텐 공 기욤이었으니 사실 그 의도는 충분히 짐작할 만했다. 정치 세력은 이제 별로 쓸모가 없어진 교회에서 그동안 내주었던 세속적 권한과 특혜를 박탈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기욤은 그것이 양날의 칼임을 알지 못했다. 세속과의 연관을 끊는다는 취지의 또 다른 의미는 바로 교권의 정치적 독립이었던 것이다.

 

세속 군주들이 성직자들을 마음대로 임명하는 풍토에서는 사실상 교회가 존재하는 게 무의미했다. 더구나 교회로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런 현상이 로마 교황청에까지 퍼져 있다는 점이었다. 오토 1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임명한 것은 교황의 마지막 승부수였으나 오히려 그것은 이후 황제가 교황을 임명하고 해임하는 권리를 보유하게 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황제가 교황에 간섭하지 않을 때는 로마 귀족들이 교황을 찧고 까불었다. 그게 다 교황이 세속 군주의 힘을 빌리려 한 데서 비롯되었으니 교황으로서는 자업자득이었다.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은 바로 그런 현상을 바로잡으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클뤼니 수도원의 설립 자체도 세속 군주의 승인을 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으니 더욱 각오가 새로웠을 것이다). 개혁의 세칙에는 수도원장을 수도사들이 선출하며, 교회는 교황에게만 직속하고 다른 지역 주교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포함되었다. 기욤을 비롯한 세속 군주들은 어차피 유명무실해진 교회가 자립권을 가진다는 것에 별로 긴장하지 않았겠지만, 종교계의 반응은 뜨겁고도 놀라웠다. 순식간에 클뤼니 수도원을 따르는 교단이 수백 개로 늘어났으며, 프랑스 전역은 물론 영국에까지 개혁의 파도가 흘러갔던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 힘을 얻어 로마 교황도 새삼 개혁의 칼을 벼리게 되었다.

 

1059년 교황청에서는 종교회의를 열고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로마 교황을 로마 귀족이나 독일 황제가 아닌 바로 로마 추기경들이 선출한다는 것이었다(이 전통은 오늘날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해서 선출된 첫 교황 알렉산데르 2세는 서유럽 전역의 교회들에 같은 지침을 내려 세속 군주들이 성직자의 임명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세속 군주들은 이미 현실적으로 성직자의 임명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하늘과 땅의 대결이 임박해 있었다.

 

 

개혁의 칼 흔히 교회의 타락은 중세의 해체기, 종교개혁의 시대에만 있었던 것으로 알지만, 사실은 중세의 전성기부터 문제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중세 교회는 나름대로 자정 메커니즘도 갖고 있었다. 바로 수도원이었다. 그림은 교회 개혁에 앞장섰던 클뤼니 수도원이다. 클뤼니라는 이름은 오늘날 중세 미술품을 전문으로 하는 파리의 세계적 미술관 이름으로 쓰일 만큼 중세를 대표하는 말이다.

 

 

 대결과 타협

 

 

11세기 후반 알렉산데르 2세에 뒤이어 교황으로 선출된 그레고리우스 7세는 클뤼니 수도원 출신이었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운동으로 시작된 교권 독립 문제를 매듭짓기로 마음먹었다. 교권 독립은 원래 당연한 것이니 예전과 같은 수세적인 자세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직자 임명권은 세속 군주를 포함한 어떠한 속인도 가질 수 없고 오로지 교회에만 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전까지도 그 문제를 놓고 싸웠으니 새로울 건 없었지만, 이제 교황은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 셈이었다.

 

당장의 현안은 밀라노의 주교를 선출하는 문제였다. 그레고리우스의 방침이 성공하려면 그는 여기서부터 자신의 원칙을 적용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이제부터는 독일이라고 불러도 좋겠다)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에게 밀라노 주교 선출에 간섭하지 말라는 서한을 보냈다. 당연히 임명권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하인리히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연달아 주먹을 날렸다. 밀라노뿐 아니라 다른 주교나 수도원장에게도 일일이 서한을 보내 세속 군주에게서 임명이나 서임을 받지 말라고 하는가 하면, 심지어 로마 교황이 황제를 임명하고 파면할 수 있다고까지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사실 100년 전 오토 1세를 황제로 임명한 사람도 로마 교황이었으니, 그레고리우스의 방침은 말하자면 원칙을 재확인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명분은 그랬어도, 그레고리우스 자신을 포함해 서유럽의 모든 군주와 성직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교황의 선언은 명백한 도전이요 반역이었다.

 

강력한 도전자를 맞은 하인리히가 취한 대응은 일단 무시, 그리고 반격이었다. 그는 교황의 서한을 무시하고 밀라노 주교의 선출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다음 그는 독일 내 여러 공국의 주교들을 불러 모아 종교회의를 열었다. 회의 결과는 예상한 대로 그레고리우스에 대한 격렬한 비난과 성토였다.

 

이제는 그레고리우스가 응수할 차례다. 그는 최강의 대응을 선택했다. 그것은 이미 예고된 황제의 파면이었다. 물론 현실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는 성직자의 입장이었으므로 황제를 지위에서 끌어내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황제의 종교적 파면, 즉 파문(excommunication)이었다.

 

 

교황의 강경한 태도에 황제보다 더 놀란 사람들은 독일의 군주와 주교 들이었다. 애초부터 문제가 이렇게 커질지 예상하지 못한 그들은 차츰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하인리히는 초조해졌다. 황제의 파문이라는 전례 없는 조치를 부른 데다, 더 큰 문제는 자기 세력이 점차 이탈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레고리우스가 독일 주교들과 종교회의를 열어 황제의 파문을 위한 절차를 밟기 위해 독일 땅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차피 서로 경험이 없는 일이었으니, 사실은 그레고리우스의 가슴이 더 떨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일이 잘못될 경우 로마 교황보다는 독일 황제가 입게 될 피해가 훨씬 더 크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은 잃을 게 없었으니까. 하인리히는 교황과 개인적으로 만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1076년 겨울, 이탈리아로 가는 하인리히가 독일로 오는 그레고리우스를 만난 곳은 알프스 북쪽의 카노사 성이었다. 그는 교황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사흘 동안의 석고대죄 끝에 그레고리우스는 하인리히를 용서하고 돌아갔다. 이것을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한다. 물론 교황 측으로서는 카노사의 영광이라 해야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인리히의 진심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중세 초기와 달리 이제 종교적 조치로 현실의 권력을 제어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굴욕을 감수하고 일단 파문의 위기를 면한 하인리히는 독일로 돌아가 배신자들에게 처절하게 복수했다. 3년간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진 다음 그는 로마로 가서 교황에게 보복을 가했다. 교황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으나 다른 방법이 있었다. 그레고리우스와 별도로 교황을 옹립한 것이다. 더 이상 내놓을 카드가 없는 그레고리우스는 결국 프랑스로 도망가 죽었다.

 

이제 하늘과 땅의 대결은 일대일 무승부를 이루었다. 그러자 자연히 타협안이 나왔다. 먼저 타협을 이룬 곳은 전장이 아닌 영국과 프랑스였다. 일단 주교는 교회에서 선출한다. 교회 측이 반겼다. 그러나 주교는 군주의 다른 가신들처럼 군주에게 충성을 서약한 다음에 정식으로 취임한다. 군주 측도 반겼다. 군주는 주교의 서약을 거부할 권리를 가졌으므로 약간은 군주 측에 점수를 더 준 결과였지만 대체로 양측이 만족할 만한 조치였다. 더 나중의 일이지만, 결국 독일에서도 1122년 보름스 협약으로 그 타협안이 채택되었다.

 

겉으로는 무승부였으나 사실상의 승리자는 교황이었다. 격렬하고 오랜 투쟁 끝에 마침내 교황은 서유럽 세계의 유일한 종교적 지도자임을 재확인시켰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회의 현실적 필요성이 약해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룬 성과였기에 더욱 의미가 큰 것이었다. 이제는 교회의 이름을 걸고 세속적인 사업을 벌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해졌다. 첫 사업이 하필 대규모 국제 전쟁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무릎 꿇은 황제 교황에게서 파문을 당한 하인리히 4(가운데)가 클뤼니 수도원장(왼쪽)과 토스카나 여백작(오른쪽)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상의하는 그림이다. 그들의 조언에 따라 황제는 얼마 뒤 교황 앞에서 또 한 번 무릎을 꿇어야 했다. 카노사의 굴욕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교황권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의 지하드

 

 

그레고리우스는 강경책으로 불행을 자초했지만, 그의 뒤를 이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전임 교황이 닦아놓은 기반을 한껏 이용해 교회의 힘을 더욱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서유럽 군주들은 교회와의 관계가 좋지 않을뿐더러 자기들끼리도 반목했다.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뭐니 뭐니 해도 바깥에 대적이 있는 게 가장 좋다. 일찍이 그리스 폴리스들의 분열을 막은 것도 페르시아의 침략이었고, 프랑크가 통일 왕국으로 발전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슬람이라는 바깥의 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르바누스는 그리스도교권의 단결도 도모하고 새로 정비한 교회의 힘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109511월에 클레르몽 공의회를 열었다.

 

회의의 주제는 바깥에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서유럽의 바깥이라면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 제국이다. 그러나 비잔티움은 교회가 다를 뿐 같은 그리스도교권이므로 목표는 이슬람이 된다. 더구나 당시 이슬람은 한때 막강했던 제국의 영광을 뒤로하고 중앙아시아의 셀주크튀르크족이 주도권을 차지하면서 전보다 크게 약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문제는 구실이었다. 그리스도교권에서 보면 이슬람은 당연히 제거해야 할 이교도들이지만, 8세기 초반 동쪽과 서쪽으로 서유럽을 위협한 이래 서유럽 정복의 꿈을 버린 지 오래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구실이 없다면 만들면 된다. 이를 위해 우르바누스는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을 개발해냈다. 7세기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가 이슬람에 정복된 이래 그리스도교의 발생지이자 최대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아직도 이교도의 수중에 있지 않은가?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교도의 수치다. 비록 500년이나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교도들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 우르바누스는 이렇게 명분의 골격을 만들고 나서 살을 덧붙인다. 이슬람 세력이 그리스도교도들의 성지 순례를 탄압하고 있다는 것이다(물론 앞에서 보았듯이 이슬람은 정복 초기에만 이교도를 탄압했고 이후에는 관용 정책을 취했으므로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우르바누스의 다음과 같은 연설은 타고난 선동 솜씨를 보여준다. “그리스도교의 신성한 땅이 이교도들의 손아귀에서 능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도 왕은 서로 싸우지 말고 힘을 합쳐 하느님의 적에게 칼날을 돌립시다. 그리스도교 왕국의 치욕을 떨치고 일어나 이슬람교도의 세력을 영원히 멸망시킵시다. 이 전쟁은 성전이며, 여기서 생명을 잃는 자는 죄의 사함을 받고 천국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시나리오가 만들어졌으니 이제 무대에 올리는 일만 남았다. 우르바누스는 직접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선동했고(그는 프랑스 출신이었다), 휘하의 주교들에게는 서유럽 구석구석까지 들어가 일반 민중에게도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라고 지시했다. 결과는 그 자신도 깜짝 놀랄 만한 대성공이었다. 서유럽 전역에서 이름깨나 날리고 힘깨나 쓴다는 기사들이 몰려들었고, 일반 농민들도 적극 호응해 동참을 부르짖었다. 이렇게 해서 순식간에 최초의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순수한 신앙심의 발로였겠지만 기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앞에서 본 것처럼, 그들은 주로 봉건 귀족의 차남 이하, 그러니까 상속받을 토지와 재산이 없는 자들이었고, 임무와 봉급이 없는 건달과도 같은 처지였다. 십자군에 참여하면 이교도들을 상대로 마음껏 싸울 수도 있고 막대한 전리품을 얻을 수도 있다(우르바누스는 순회 연설에서 동방 세계는 부유하다고 부르짖기도 했다). 그뿐인가? 일이 잘 풀려 성지를 탈환한다면 토지와 영지도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우르바누스도 뛰어난 선동꾼이었지만, 당시는 그런 선동이 충분히 먹혀들 만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지 탈환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당연히 비잔티움에서 먼저 십자군 전쟁을 계획했어야 하지 않을까? 제국은 서유럽에 비해 지리적으로도 성지에 더 가까운 데다 로마교회보다 역사와 정통성이 더 오래지 않은가? 그러나 당시 비잔티움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고질병인 중앙 권력의 불안정은 그 시기에 더욱 극대화된 상태였다. 황제들은 무능한 데다 암살되는 경우도 잦았고, 지방 호족들은 그 틈을 타서 세력을 확장했다. 그런 처지였으니 비잔티움 제국은 성지 수복을 도모하기는커녕 셀주크튀르크의 침략에 호되게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당시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오히려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10세기 무렵 전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는 중국 당 제국의 장안과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이 두 도시는 당시 아시아와 유럽에서 각각 유일하게 존재하는 제국의 수도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당과 비잔티움은 엇비슷한 시기에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이유도 만연한 부패와 권력 불안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그 무렵은 제국 체제가 세계적으로 몰락의 조짐을 보이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강력한 힘의 중심을 가진 제국 체제가 적절한 것이었고 국력을 키우는 데 유리했으나,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중앙집권 체제보다는 분권 체제가 더 효율적인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그렇다면 중국이라는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한 가지의 질서밖에 없는 동양보다는, 비잔티움 제국 이외에도 서유럽이라는 분권 체제가 공존하는 유럽이 역사의 패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 시기는 그 가능성이 실현되기 시작하는 때였다. 이리하여 십자군은 전 그리스도교권이 공동으로 발주한 사업으로 확대되었다.

 

 

연설 혹은 선동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가 이교도의 손아귀에서 성지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연설하는 장면이다. 이 연설이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어 십자군이 조직되지만, 신앙 이외에 다른 의도가 있었으니 교황의 연설은 사실상 선동이었다.

 

 

 성전에서 추악한 전쟁으로

 

 

우르바누스는 정세 분석의 능력과 선동 솜씨도 탁월했지만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했다. 그가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십자군을 계기로 서유럽은 실제 역사보다 일찍 전 세계의 패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그는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지 3년 만인 1099년에 죽었다). 그는 당시 서유럽에 넘쳐나는 유능한 기사들로 십자군을 편성해 속전속결로 성지 탈환을 완료할 생각이었다.

 

그 무렵 서유럽은 수백 년 동안 큰 전쟁이나 전염병 한 번 없는 안정기를 누리고 있었다. 따라서 속도는 느리지만 농업 생산력이 상당히 발달했고, 인구도 큰 폭의 증가세를 보였다. 유럽 세계는 거의 전역이 속속들이 개척되고 개간되었으나 토지의 증가에는 한계가 있었다(우르바누스는 십자군을 구상할 때 분명히 이런 토지 부족 현상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미 유럽은 힘센 청년으로 자라났으며, 과거 이슬람의 팽창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그때 그 시절의 꼬마가 아니었다. 승산은 충분했고, 그런 만큼 속전속결은 아주 적절한 구상이었다. 실제로 우르바누스의 노력으로 조직된 1차 십자군은 총 8(소규모까지 합하면 그 이상이지만 보통은 여덟 차례로 친다)의 원정 가운데 가장 순수했고 가장 큰 성과를 내게 된다엄밀히 말하면 이 1차 십자군은 십자군이 아니다. 십자군이라는 이름은 200년 뒤인 13세기 후반 십자군 전쟁 말기에 붙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조직된 십자군은 예루살렘 여행단또는 성지 참배단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1차 십자군은 적어도 명칭에서는 일종의 성지 관광단이었던 셈이다.

 

1096년 가을, 유럽 각국 왕의 형제와 귀족 들은 각기 군대를 끌고 역사적인 원정길에 올랐다. 프랑스 왕의 동생 위그 드베르망두아, 툴루즈 백작 레몽, 로렌 대공 고드프루아,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노르만 공 보에몽 등 당대 유럽의 쟁쟁한 영웅들이 모인 모습은 2000여 년 전 트로이를 향해 떠나는 그리스 원정대를 연상케 하는 위용이었다(공교롭게도 목표도 그때처럼 동방이다). 트로이 원정군의 총사령관이 아가멤논이었다면 이제 그 역할은 보에몽이 맡았다. 총 병력은 기사 3000명과 보병 약 1만 명이었고, 그 밖에 많은 순례자가 지원군의 자격으로 뒤를 따랐다.

 

수개월을 행군한 끝에 베이스캠프인 콘스탄티노플에 닿은 이들은 여기서 한숨을 돌리고 나서 다시 동진을 시작했다. 과연 서유럽 최고의 칼잡이들이 모인 군대에 맞설 만한 적수는 없었다. 십자군은 터키 서부의 니케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2년 만에 성지 예루살렘의 관문이라 할 안티오크와 에데사를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다시 1년 뒤인 1099년 여름에는 드디어 고대하던 예루살렘에 입성했다(일반 순례자라면 몰라도 기사들은 성지에 처음 와본 자들이 많았으리라).

 

 

성전 대 성전 1차 십자군은 그런대로 충분한 성과를 올렸다. 그림은 이슬람 제국의 성을 함락시키는 십자군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성전은 이슬람교의 성전을 눌렀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원정을 계속한 탓에 십자군은 이내 변질되고 만다.

 

 

우르바누스의 연설과 달리 성지를 능욕한 것은 오히려 그들이었다. 5주간의 포위 공격 끝에 예루살렘에 들어간 그들은 성지 정화라는 명목으로 현지 주민들을 대량 살육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1차 십자군은 성지를 탈환하고, 터키에서 팔레스타인까지 해안지대에 아르메니아, 안티오크, 트리폴리, 예루살렘이라는 4개의 십자군 왕국을 세워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문제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성공이라는 점이었다(우르바누스는 자신이 조직한 십자군이 대성공을 거둔 것을 보고 죽었으니 선임 교황인 그레고리우스에 비해서는 훨씬 행복한 죽음이었다).

 

어쨌든 십자군 전쟁이 성공하자 서유럽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꿈에도 바라던 그리스도교의 성지를 되찾았을 뿐 아니라, 수백 년 동안 그리스도교 문명권을 사실상 포위하고 있던 무시무시한 이슬람 세력을 처음으로 보기 좋게 쳐부수었던 것이다. 특히 성지 부근에 그리스도교의 왕국들이 생겨났다는 사실은 서유럽의 농민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곳으로 가서 땅을 얻어 살자! 물론 군주와 귀족 등 봉건 지배 세력은 대환영이었다. 어차피 서유럽은 인구도 넘치고 토지도 부족하다. 게다가 성지에 새로 생긴 왕국들은 성 하나만 달랑 쌓아놓고 군인들이 지키고 있을 뿐 나라의 꼴을 갖추는 데 꼭 필요한 백성들이 없지 않은가? 원주민은 있지만 이교도가 백성의 전부라면 문제다. 그래서 그들은 대대적으로 농민들의 이주를 장려했다. 1101년 성지 탈환 2년 만에 무려 20만 명의 이주자들이 모집된 것은 그런 열망의 소산이었다.

 

 

십자군 왕국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해안 지대를 점령한 십자군은 이곳에 십자군 왕국들을 세웠다. 사진은 당시에 세워진 십자군의 성이다. 사진에서 보듯이, 십자군 왕국은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라 간신히 확보한 성지 순례 길을 방어하는 요새였다. 백성들은 없고 군대만 사는 희한한 나라였으니 오래갈 리 없었다.

 

 

그러나 기사대의 호위를 받으며 기세 좋게 출발했던 이주 행렬은 목적지에 닿기 전 소아시아에서 셀주크튀르크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전멸하는 비극을 당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유럽의 군주들은 아연실색했다. 아직 이슬람 세력은 무너진 게 아니었다. 1차 원정에서 이슬람 세력이 쉽게 무너진 이유는 사실 십자군이 강해서라기보다는 자체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데다 유능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1차전에서 무기력하게 영토를 그리스도교권에 내주었던 이슬람은 그 두 가지 결함을 해소하고 2차 전에서 진검 승부를 보자고 나섰다.

 

1127년에 시리아의 태수 장기는 흩어진 세력을 규합해 시리아 북부를 탈환하고, 1144년에는 에데사를 손에 넣었다. 에데사가 무너지면 안티오크의 함락은 불을 보듯 뻔한 것, ‘성지발 급보를 전해들은 서유럽은 즉각 2차 십자군을 조직했다. 한 번 승리의 경험도 있었던 탓에 2차 십자군은 유럽의 왕들이 직접 참가했는데,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가 주축이었다.

 

그러나 유럽의 왕들이 직접 나섰다 해도 이번의 상대는 전과 같은 분열된 오합지졸이 아니라 누레딘이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버티고 있는 통일된 이슬람군이었으므로 승부는 예측 불허였다. 2차 십자군은 성지에서 십자군 왕국들을 지키던 1차 십자군 전사들과 의견 충돌을 빚은 끝에 무모하게 다마스쿠스를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금세 해체되었다.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누레딘은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내친 김에 이집트까지 장악했다. 이제 예루살렘은 거꾸로 시리아-이집트에 포위된 형국이 되었다. 그리고 누레딘의 후계자로 위대한 이슬람 장군 살라딘(재위 1174~1193)이 등장했다.

 

살라딘은 종전과 달리 공세적인 태도로 맞섰다. 마지막 남은 목안에 가시 예루살렘을 탈환하려 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600년 전 그의 조상들이 부르짖었고 이제는 십자군이 모토로 내건 성전, 즉 지하드를 선언했다. 1187년 유럽 그리스도교의 성전과 아시아 이슬람교의 성전은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의 딱 중간 지점인 하틴에서 맞섰다.

 

십자군의 주력은 유럽의 전통적인 중장기병과 석궁으로 무장한 보병이었고, 살라딘의 군대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궁기병이 주력이었다. 당연히 힘에서는 십자군이 앞섰지만 기동력에서는 이슬람 군대가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 성을 방어하는 데만 주력했다면 승패가 쉽게 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예루살렘의 왕 기 드 뤼지냥은 자신감에 넘쳐 갈릴리 언덕의 평원에서 살라딘의 2만 대군과 정면 승부를 하자고 나섰다. 뒤떨어지는 기동력에 수적으로 적은 병력, 승부는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은 대승을 거두고 예루살렘을 손에 넣었다. 이로써 십자군 전쟁은 11패로 호각을 이루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사자심왕 대 살라딘 사자심왕이라 불린 영국 왕 리처드와 이집트 및 시리아의 술탄인 살라딘이 대결을 벌이고 있다. 이 대결은 십자군 전쟁을 소재로 그린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승부를 보려면 3차 원정이 필요했다. 1189년의 3차 십자군은 상대방이 강한 만큼 이번에는 서유럽 최정예군으로 편성했다.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1(재위 1189~1199),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 독일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등 당대 유럽의 간판스타들이 직접 참가한 것이다(나중에 보겠지만 이 세 명의 왕은 중세 영국, 프랑스, 독일을 성립시키는 데 각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먼저 출발한 독일군은 소아시아에서 이슬람군에 패배하고 황제마저 전사하는 비극을 겪었다(정확히 말하면 의사였다). 조짐이 좋지 않았지만 리처드와 필리프는 진군을 계속해 1191년에 예루살렘 인근의 아크레와 야파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출발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그들은 이내 불화를 빚었고, 필리프는 그만 돌아가버렸다(왜 사이가 좋지 않았는지에 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자). 단독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할 자신이 없었던 리처드는 살라딘과 협상해 그리스도교도의 자유로운 성지 순례를 허용한다는 것을 보장받고 말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애초에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부터 살라딘은 1차 십자군과 달리 이교도(그리스도교도)들에게 관용을 베풀었으니, 그것은 협상이라기보다 리처드의 체면을 지켜준 것일 뿐이었다.

 

오히려 리처드는 귀국 길에 독일의 새 황제가 된 하인리히 6세에게 포로로 잡혀 감금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또한 그 틈을 타서 프랑스 왕 필리프는 노르망디를 기습했으며, 영국 내에서는 리처드의 동생 존이 왕위를 찬탈했다가 귀족들의 반발을 사서 대헌장을 성립시킨다. 결국 3차 십자군은 서유럽 세계의 복잡한 내부 문제만 드러낸 셈이다.

 

간판스타들이 참전한 원정 치고는 보잘것 없는 결과였지만 3차 십자군은 사실상 마지막 십자군이었다. 1202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요구로 소집된 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병력 수송과 식량 공급을 의뢰했다가 그 대가로 그들의 용병 노릇까지 하는 최악의 십자군으로 기록된다이탈리아의 신흥 강국으로 성장한 베네치아는 동부 지중해 교역권을 독점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려면 무엇보다 큰 걸림돌이 바로 비잔티움 제국이었다. 따라서 베네치아는 십자군이 약속한 경비를 지불하지 못하자 십자군에게 당시 내분에 휩싸여 있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라고 주문했다. 채무자 십자군은 채권자의 독촉에 못 이겨 엉뚱하게도 같은 그리스도 교권인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내친 김에 라틴 제국을 수립하게 되었다. 십자군의 총사령관이던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은 졸지에 군 지휘자에서 라틴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비록 엉겁결에 생겨나기는 했지만 라틴 제국은 잠시나마 동방교회를 로마교회에 통합했으며, 동유럽에 라틴 문화를 보급했다. 그러나 1261년 비잔티움 황제의 반격을 받아 라틴 제국은 60년도 채우지 못하는 단명 제국으로 끝나고 만다. 결국 이득을 본 것은 베네치아뿐이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라틴 제국의 지배 기간을 이용해 동부 지중해의 교역을 독점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경제적 토대가 된다. 분노한 인노켄티우스는 소년들의 순결한 영혼을 이용한다는 종교적 망상에 사로잡혀 소년 십자군까지 조직해 보냈으나 이들은 오히려 악덕 상인들의 손에 노예로 팔렸다. 13세기의 벽두를 이렇게 열었으니

이후의 원정들도 뻔했다. 13세기에 파견되는 5, 6, 7, 8차 십자군은 모두 유럽 국왕들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본래의 의도와는 전혀 동떨어진 결과를 빚었다. 결국 이집트 출신의 술탄 바이바르스가 1291년 아크레를 점령해 십자군의 근거지를 완전히 소탕함으로써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나버렸다(이후 십자군이라는 이름을 내건 동방 원정은 15세기까지 지속되지만 별 의미는 없다).

 

 

오랜만의 협력 점점 멀어져가면서 대립과 반목을 일삼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모처럼 힘을 합칠 기회가 왔다. 외부의 대적 이슬람을 맞아 동방 측에서 도움을 요청했고, 서방은 이를 선뜻 받아들여 십자군 전쟁을 기획했다.

 

 

 해체의 시작

 

 

앞서 본 것처럼, 십자군 전쟁에는 성지 탈환이라는 대의명분과 더불어 서유럽의 군주와 귀족, 기사, 농민 등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신분과 처지에 따라 이해관계는 다양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영토 확장을 통해 부족한 토지를 확보하고 농민 이주로 인구 증가를 소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에서 서유럽 세계는 그런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십자군 전쟁은 일단 실패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모든 게 그렇듯이 성공이나 실패라는 일의적인 규정은 무의미하다. 역사적 사건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을 계기로 무엇이 달라졌는가다. 십자군은 서유럽 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만약 서유럽이 적어도 비잔티움 제국 정도의 느슨한 중앙집권 체제만 갖추었더라도 십자군은 성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거의 모든 서유럽인의 꿈인 로마 제국이 다시 부활하는 것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중앙집권을 이루었던 샤를마뉴의 시대에는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힘이 부족했으나, 십자군 시대에는 거꾸로 힘은 있었어도 중앙집권 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에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비록 오랜 분권 체제로 힘이 분산된 탓에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어도 서유럽 세계는 분명히 힘에서 이슬람권에 비해 우위에 있음을 입증했다. 따라서 십자군 전쟁은 문명사적으로 서양 문명이 동양 문명, 적어도 서남아시아 문명을 앞서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 직접적인 결과는 동부 지중해가 서유럽 세계의 손 안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베네치아 상인들의 후안무치한 협잡으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빛이 바랬지만, 어쨌든 그들은 원하던 지중해 무역권을 확보했다. 로마가 멸망한 이후 동부 지중해권은 비잔티움이 관할하고 있었으나, 제국은 해상무역에 별로 의존하지 않았으므로 실상 지중해 무역은 이슬람권의 아라비아 상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다고대 이집트, 페르시아, 중세 이슬람 제국 등에서 보듯이, 원래 제국이란 주로 영토 제국이므로 해상무역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제국인 중국의 경우를 보면 더 확연히 알 수 있다. 제국은 자체적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하므로 굳이 무역을 필요로 하지 않을뿐더러 지리적ㆍ영토적 중심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중심에서 먼 변방이나 바다를 중시할 이유가 없다. 비잔티움 제국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으므 로 관할 구역이라 할 동부 지중해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 로마 제국은 예외였다. 지리적 여건상 해상 제국의 위상을 가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지중해 자체가 로마 영토의 일부였다).

 

 

활과 방패의 싸움 십자군과 이슬람군의 싸움은 전형적인 유럽과 아시아의 전투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페르시아 전쟁이나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에서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유럽의 병사들은 두꺼운 갑옷으로 몸을 보호했고, 아시아의 병사들은 가벼운 차림으로 기동력을 살리며 활을 쏘았다. 방어가 장기인 십자군이 공격으로 전환했으니 승패는 뻔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을 통해 서유럽 세계도 지중해 무역로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점에서 4차 십자군 전쟁은 가장 타락한 원정이면서도 오히려 가장 중요한 원정이기도 했다. 베네치아 상인들이 지중해 무역권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십자군 기사들은 동방의 화려한 문물에 압도되어 서유럽만을 세계로 안 자신들이 우물 안 개구리임을 자각했다(물론 그들은 그 자각을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야만적인 약탈로 표출했다). 서유럽은 지중해를 장악함으로써 사실상 로마 제국의 80퍼센트는 복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깥의 가장 큰 변화가 지중해를 장악한 데 있었다면 안의 가장 큰 변화는 교황권이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십자군 전쟁 초기는 교황권이 가장 강한 시기였다(교황의 순회 연설만으로도 서유럽의 정예군이 모였으니까). 그러나 십자군이 실패하면서 교황권은 큰 손상을 입었다. 물론 십자군 전쟁의 실패가 곧바로 교황권의 약화를 불렀다기보다는 이미 시대의 변화 자체가 교황이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만약 십자군이 성공했더라면 교황권은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교황권의 약화는 곧 서유럽 세계의 그리스도교적 중세적 통합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잖아도 분권 체제였던 서유럽은 이제 분권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로마가 무너진 이후 그나마 동질성을 부여해온 종교적 통합의 중심마저 약해지자 각 왕국은 각개약진의 길로 나섰다. 바야흐로 중세는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십자군 전쟁은 그 신호탄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중세 세계에서 하나씩 갈라져 나오기 시작하는 서유럽 국가들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다(앞에서 본 원시적형태보다는 진일보한 국가들이다)십자군 운동은 서유럽 각국의 내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중 하나가 기사단이다. 기사들은 십자군의 주력을 이루었으므로 자연히 십자군 운동을 통해 지위가 크게 상승했다. 십자군에 참여한 기사들은 일종의 십자군 참전 동지회같은 조직을 만들었는데, 종교적 이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으니 자연히 종교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교황의 인가를 얻어 기사수도회로 발전했다. 여러 기사단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프랑스의 템플 기사단과 독일의 독일기사단이다. 템플 기사단은 예루살렘의 방어를 위해 조직되었다가 나중에 루이 9세 치하에서 프랑스의 관료로 입각했으며, 독일기사단은 독일 황제에게서 토지까지 받아 지역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궤도를 이탈한 십자군 1204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 측의 농간으로 이교도가 아닌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그림은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는 십자군의 모습인데, 16세기 베네치아 화가 틴토레토의 작품이다. 오랫동안 이슬람의 공격을 잘 막아냈던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이 같은 그리스도교권의 공격 앞에서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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