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이황과 이이 - 유학자로 살아가는 이황의 방법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이황과 이이 - 유학자로 살아가는 이황의 방법

건방진방랑자 2022. 3. 7. 22:04
728x90
반응형

유학자로 살아가는 이황의 방법

 

 

1392, 조선왕조가 고려왕조를 붕괴시키고 이 땅에 새롭게 등장합니다. 조선 개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이들이 바로 고려 말에 들여온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 특히 주자학을 배웠던 사대부들입니다. 여기에서 기억해두어야 할 유학자는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라는 인물이지요.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는 이념적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현실적인 것이었지요. 그는 우선 고려왕조의 이념적 토대였던 불교를 비판할 수 있는 신유학의 사상을 가다듬어야 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1394년 완성된 심기리편(心氣理篇)1398년 완성된 불씨잡변(佛氏雜辨)입니다. 심기리편에서 정도전은 불교를 마음[], 도교를 기[] 그리고 신유학을 이()에 배분하여, 신유학의 타당성을 논증했습니다. 반면 불씨잡변(佛氏雜辨)은 철저하게 불교를 부정하고 신유학을 긍정하려는 의도에서 쓴 글입니다. 이런 이론적 작업과 함께 정도전은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의 이념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제도 개혁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1394년에 편찬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그리고 1395년 완성된 경제문감(經濟文鑑)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이 두 권의 책으로 유교 이념에 부합한 사회 제도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지요.

 

거의 모든 면에서 조선의 반석을 놓았던 유학자 정도전은 훗날 조선의 세 번째 왕인 태종으로 등극하는 이방원(李芳遠)에게 무참하게 살해됩니다. 유학자 정도전의 죽음은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유학과 권력 사이의 알력 관계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왕을 포함한 모든 권력을 이()의 지배 아래 두려 했던 신유학의 정신, 그리고 이()마저도 자기 밑에 두려는 현실 권력, 양자 사이의 충돌은 어찌 보면 불가피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정도전이 죽은 지 100여 년 뒤에 태어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도 이런 갈등 속에서 자신의 삶을 위태롭게 영위한 유학자였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정도전 이래 수많은 유학자들이 권력에 의해 도륙당했던 사화(士禍)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이황이 태어나기 3년 전에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가 일어났고, 그의 나이 4세에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가 일어났으며, 19세에는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45세에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가 일어났지요. 결국 퇴계 이황 당시, 신유학자들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마치 목숨을 건 모험과도 같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황은 가급적 정치를 멀리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속내가 퇴계(退溪)’라는 호에 담겨 있습니다. 퇴계는 글자 그대로 계곡으로 물러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이것은 목숨마저 앗아갈 수 있는 현실 정치에서 어느 정도 발을 빼려는 그의 의중을 반영한 것입니다. 결국 조선왕조 초기에 정도전이 가슴에 품었던 이념과 현실 가운데 퇴계는 이념의 측면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에게 남은 선택은 신유학의 이념, 즉 신유학의 체계를 숙고하고 정리하여 후학들을 키워내는 것뿐이었습니다. 언젠가 제자들이 정치에 다시 나아가 권력의 경솔함과 무자비함을 길들이기를 기다리면서 말이지요. 달리 생각해보면, 이 점에서 이황도 매우 정치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생전에 주로 주희의 철학을 공부하고 정리하는 순수한 이론가로서 자신의 생애를 영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갑니다. 그러던 1559년 어느 날, 그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이황보다 스물여섯 살이 적은 당시 33세의 젊은 유학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 ~1572)이 보낸 편지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대승이나 이황은 이 편지가 앞으로 8년 동안 지속될 논쟁의 서막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젊은 유학자와 노년의 유학자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을 지금은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이라고 부릅니다. 기대승과 이황 사이의 논쟁은 주로 서신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 서신들은 각각 고봉집(高峯集)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에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용

목차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