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밖의 승리
기원전 264년 로마는 아직 지중해 진출을 꾀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반도의 통일을 이룬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은 데다, 상대는 이제까지 로마가 싸워온 반도 내의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특히 카르타고 용병들의 명성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카르타고는 전통적으로 용병을 이용했는데, 에스파냐 출신의 보병과 누미디아 출신의 기병은 막강한 전투력과 용맹함을 갖추고 있었다(누미디아 기병은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우수한 용병으로 성가가 높았다). 무엇보다 카르타고가 자랑하는 것은 탁월한 능력을 가진 군 지휘관들과 오랫동안 해상무역으로 힘을 키워온 함대였다.
반도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 로마는 카르타고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508년 로마는 카르타고와 우호조약을 맺었는데, 이것은 로마가 반도 바깥의 국가와 최초로 맺은 조약이었다. 이후로도 200여 년 동안 두 나라는 조약을 계속 갱신하면서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로마가 반도 통일을 이루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 조약은 원래 로마가 지중해 서부 무역에 진출하지 않는 대신 카르타고는 이탈리아 반도 내의 정치적 사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야 문제가 없었지만, 통일을 이루고 더 큰 바다로 나가야 하는 로마로서는 더 이상 그 조약을 준수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원전 264년 시칠리아로부터 타전된 SOS는 로마 정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시칠리아의 메시나가 시라쿠사와 싸움이 벌어지자 로마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사실 로마가 반도를 통일하면서 시칠리아의 상황도 복잡해졌다. 시칠리아는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로마와 카르타고 두 세력 간의 완충지이자 요충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차피 시칠리아가 독자적으로 살아남아 발전하기는 어려운 형세였다. 따라서 시칠리아의 도시국가들은 전통의 카르타고에 붙을 것이냐, 신흥 세력인 로마에 붙을 것이냐를 두고 갈림길에 있었다. 시칠리아의 우두머리격인 시라쿠사는 카르타고를 택했는데, 이에 대해 로마의 ‘장화’ 바로 코앞에 있는 메시나는 불만이었다. 카르타고가 메시나를 공격하자 당연히 메시나의 용병들은 로마 측으로 붙었다.
메시나의 구조 요청에 자신이 없었던 로마 원로원은 망설였으나 민회는 과감히 전쟁을 결정해버렸다(역시 ‘정복 국가 로마’의 이미지는 평민들이 만든 것이다), 지중해의 패자를 결정하기 위한 로마와 카르타고의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기원전 146년 세 차례에 걸쳐 벌어졌는데, 사실상 별개의 전쟁들이다. 그러나 세 차례 모두 로마와 카르타고가 싸웠다는 점에서, 그리고 지중해의 패자를 놓고 벌어졌다는 점에서 성격은 같다. 포에니(Poeni, 라틴어로는 Puni)란 로마인들이 카르타고인을 부르는 이름인데, 페니키아에서 나온 말이다】.
▲ 카르타고의 요새 포에니 전쟁의 시발점은 로마와 카르타고의 중간에 있는 시칠리아에서 생겨났다. 사진은 시칠리아 서부에 있는 카르타고 요새의 유적이다. 1차전에서 카르타고군은 이곳을 거점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20여 년간 시칠리아를 무대로 전개된 1차전(기원전 264~기원전 241)에서 로마는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기원전 260년 시칠리아 북부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로마가 승리한 것은 전혀 뜻밖의 성과였다. 강력한 해군 국가 카르타고를 해전에서 물리친 경험은 로마의 정복 전쟁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비록 4년 뒤에 로마는 카르타고 본토를 공략하다가 대패했지만, 이후 시칠리아에서 재개된 연장전에서는 골든골을 넣으면서 1차전을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물론 당시에는 누구나 그것을 결승전으로 여겼고 1차전이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로마의 전과는 막대한 배상금 이외에도 두 가지가 더 있었다. 하나는 시칠리아와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정복했다는 것이다(시라쿠사는 개전 초기에 로마 측으로 돌아섰다). 이로써 로마는 최초로 해외 속주(provincia)【반도를 통일하기까지 로마는 반도 내의 도시들을 사실상 지배했으나 형식상으로는 동맹시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1차 포에니 전쟁으로 해외 식민지가 생기게 되자 로마는 정책을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속주 체제다. 사실 속주의 모델을 제공한 것은 카르타고였다. 시칠리아 서부를 지배하던 카르타고는 지배 지역으로부터 정기적으로 공납을 받는 제도를 시행했다. 로마는 원래 이탈리아 동맹시들에서 군대를 지원받았을 뿐 공납을 받지는 않았다(경제적 관계보다 정치적 관계가 더 강했던 탓이다), 카르타고의 예를 좇아 로마는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속주로 삼고 공납을 받기로 했다. 여기서 재미를 본 로마는 이후 해외 식민지들을 획득할 때마다 속주로 만들어 제국으로 향하는 경제적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속주를 뜻하는 프로빈키아라는 말에서 오늘날 영어의 province(지방)가 나왔고, 프랑스 남부의 고유한 명칭(프로방스)도 나왔다】를 거느리게 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시작된 속주 체제는 이후 로마의 기본적 식민지 경영 체제가 된다. 다른 하나는 해군과 함대를 육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해군력은 뒤이어 벌어지는 2차전(사실상의 결승전)에서 로마가 대역전승을 거두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사실 1차전에서 로마가 승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카르타고의 내부에도 있었다. 로마의 본토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시칠리아에서 본국으로 급히 송환된 카르타고의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전투력은 뛰어나지만 충성심은 아무래도 부족한 게 용병의 한계다.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전쟁에서는 졌다. 카르타고의 총사령관인 하밀카르 바르카(Hamilcar Barca, 기원전 270년경~기원전 228)는 그런 사태만 없었더라면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고 여겼다. 그렇다면 로마와 억지로 맺은 굴욕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은 폐기되어야 한다. 조약을 폐기하려면 다시 전쟁을 벌이는 것밖에 없다. 하밀카르는 전쟁 준비의 일환으로 에스파냐를 쥐어짰다. 에스파냐는 카르타고의 거대한 시장이자, 광산들이 곳곳에 있는 부유한 속주이자, 질 좋은 용병들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군사 지역이었다(그래서 에스파냐는 ‘카르타고노바’, 즉 새로운 ‘카르타고’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때마침 로마는 전쟁의 승리를 발판으로 삼아 강력한 팽창정책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일부를 얻은 데 만족하지 않고 알프스를 넘어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위기가 없지는 않았다. 기원전 225년에는 다시 150여 년 전처럼 갈리아인들이 대규모로 침입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의 로마가 아니었다. 막강한 로마 군단은 오히려 그 기회를 이용해 갈리아의 켈트 전사들을 북쪽 멀리 쫓아버리고, 그 일대에 여러 식민시를 건설했다. 이러한 로마의 팽창은 카르타고에 더욱 큰 위협이 되었다. 만약 로마군이 카르타고 최대의 식민지인 에스파냐 쪽으로 기수를 돌린다면? 당시 에스파냐의 총독이자 사실상의 왕이던 하밀카르는 카르타고의 생존을 위해 다시 칼을 뽑아들기로 결심했다. 2차 전의 전운이 무르익었다.
▲ 2차전의 시작 현재 에스파냐 북동부에 있는 사군툼의 유적이다. 사군툼은 로마의 주요한 식민지였는데,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 이곳을 점령해 에스파냐 전 지역을 손에 넣었다. 이 사건에 대해 로마가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된다. 이 유적은 카르타고군에 의해 파괴된 도시를 후대에 로마인들이 재건한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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