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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3부 뿌리② - 2장 지중해로 뻗어나가는 로마, 영웅의 출현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3부 뿌리② - 2장 지중해로 뻗어나가는 로마, 영웅의 출현

건방진방랑자 2022. 1. 4.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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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의 출현

 

 

하밀카르는 칼을 뽑아들었지만 무엇을 베지도, 도로 집어넣지도 못했다. 기원전 228년에 그만 암살당하고 만 것이다. 그의 사위인 하스드루발(Hasdrubal, ?~기원전 221)이 총독직을 이어받았으나 그도 몇 년 동안 에스파냐 경영에만 힘쓰다가 장인처럼 암살로 최후를 맞았다. 결국 하밀카르의 유지를 받든 것은 아들 한니발(Hannibal ,기원전 247~기원전 183년경)이었다.

 

한니발은 아버지와 매부의 뒤를 이어 에스파냐 정복 사업을 계속 전개하면서도 마음은 내내 콩밭에 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로마에 진 빚을 갚는 일이었다.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 나온 손자병법』 「모공(謀攻)에서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고 가르쳤다. 로마의 전쟁 방식을 철저히 연구한 뒤 그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품고 서둘러 원정 계획을 수립했다. 에스파냐에서 이탈리아로 가려면 뱃길을 이용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대규모 함대를 편성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한니발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대담한 원정 계획을 구상했다. 육로로 로마를 침공하기로 한 것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탈리아까지 가는 길은 험준한 산악 지대인 데다 두 개의 큰 산맥(피레네와 알프스)을 넘어야 한다. 직선길인 해로를 놔두고 왜 그렇게 무모해 보이는 이동 경로를 택했을까?

 

거기에는 최소한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 로마의 해군력이 문제였다. 함대로 대군을 싣고 가려면 사르데냐 섬 부근에서 로마 해군과 해전으로 한판 붙지 않을 수 없는데, 1차전 이후 로마 해군이 크게 성장했으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둘째, 한니발이 고안한 비장의 카드를 쓰려면 육로를 택해야만 했다. 그 비장의 카드란 무엇일까? 그는 로마가 반도 통일을 이루기 직전 로마군을 괴롭힌 피로스의 코끼리 전술을 연구했다(188쪽 참조). 코끼리들이 제 역할을 했더라면 로마는 과연 피로스를 물리칠 수 있었을까? 한니발은 코끼리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그런데 코끼리들을 배에 태우고 항해를 하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덩치가 큰 코끼리를 배에 태우는 것도 문제지만 자칫 뱃멀미에 미쳐 날뛰기라도 한다면 난감한 상황이 될 것이었다.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 알프스는 켈트어로 산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다. 그림은 19세기 영국 화가 터너의 작품인데, 한니발의 군대가 알프스를 넘는 광경을 비장하게 묘사하고 있다(한가운데 지평선 부근에 조그맣게 코끼리가 그려져 있다). 한니발은 한여름에 알프스를 넘었지만 꼭대기는 만년설로 덮여 있으므로 이런 폭설을 겪었을 법하다. 터너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812년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를 침공한 시기다. 그는 한니발과 나폴레옹, 두 영웅의 운명을 하나로 본 것이다.

 

 

기원전 218년 봄, 한니발은 4만 명의 대군에 수십 마리의 코끼리까지 이끌고 역사적인 로마 원정에 나섰다. 피레네 산맥을 넘고 알프스를 앞에 두었을 때, 한니발은 미리 염두에 두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육로를 택한 데 따르는 또 하나의 이득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갈리아인들이었다. 몇 년 전 로마군에게 혼쭐이 나고 삶의 터전인 북이탈리아까지 빼앗긴 켈트 전사들은 한니발이 요구하지 않아도 기꺼이 용병으로 참여하고자 했다. 카르타고에는 또 하나의 뛰어난 용병 부대가 생긴 셈이었다.

 

비록 한여름의 등정이기는 했지만, 알프스를 넘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갈리아의 용병들이 충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이 북부 이탈리아에 들어왔을 때는 보병 2만 명에 기병 6000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 병력을 가지고 11개 군단 10만 명에 달하는 로마군을 이기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불가능이라는 말이 없는 사전은 후대의 나폴레옹만 가진 게 아니었다. 한니발은 각지의 로마군을 무찌르며 로마인들이 건설한 도로를 타고 2년에 걸쳐 남진한 끝에 기원전 216년 이탈리아 남부의 칸나이에 있는 로마의 병참기지를 격파했다. 이제 로마군도 더 이상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해 8월 양측은 칸나이에서 정면으로 맞붙었다.

 

카르타고군의 병력은 5만 명으로 늘어나 있었지만, 이에 맞서는 로마군은 8만 명이었으니 중과부적의 상황은 여전했다. 그러나 한니발에게는 풍부한 전투 경험을 자랑하는 베테랑 용병들과 초승달 포진이라는 탁월한 전술이 있었다. 한니발은 전 군대를 초승달 모양으로 포진하고 양쪽 가장자리에 베테랑 부대와 기병들을 배치했다. 여전히 밀집대형을 장기로 하는 로마의 보병들이 가운데로 쳐들어오자 중앙의 카르타고군은 뒤로 물러나며 적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자연히 로마군은 포위당한 꼴이 되었다. 이때 베테랑과 기병 부대가 로마군의 뒤를 공격했다. 이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무려 25000명이 전사하고 1만여 명이 포로로 잡히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서부를 향해

예상 밖의 승리

영웅의 출현

또 하나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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