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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4부 줄기 - 3장 원시 서유럽, 영국의 탄생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3장 원시 서유럽, 영국의 탄생

건방진방랑자 2022. 1. 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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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탄생

 

 

독일의 철벽 수비는 노르만족의 이동을 동쪽으로만 우회하게 만들지 않았다. 당시 독일의 심장부는 슈바벤과 바이에른 등 남부였고, 작센과 프랑켄도 기껏해야 중부에 해당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 북부는 독일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덴마크라는 데인족(노르만족의 일파)의 근거지가 되어 있었다(당시까지는 스칸디나비아가 한 덩어리였으며, 스웨덴과 노르웨이, 덴마크로 분립하는 시기는 11세기 이후다).

 

게다가 바이킹이라는 별명을 얻은 데서 알 수 있듯이, 노르만족의 장기는 육로보다는 바닷길에 있었다(노르만족은 일찍부터 해상 진출에 활발히 나서서 멀리 북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까지 탐험했다. 그린란드에 최초로 상륙한 유럽인도 바이킹이었다). 따뜻한 바닷길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넓은 북해는 노르만족의 연못이 되었다. 더구나 육로 진출이 어려워지자 해상 진출은 더욱 활발해졌다.

 

9세기부터 노르만은 북해로 흘러드는 프랑스의 강들을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 해적질과 약탈을 일삼았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 때문에 프랑크의 루이 1세는 제국을 분할하기로 결심한 바 있다. 이후에도 끊임없는 노르만족의 침략에 시달린 프랑스의 샤를 3세는 마침내 911년 획기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아예 그들에게 땅을 떼어주고 충성 서약을 받기로 한 것이다. 노르만족은 물론 약탈하던 지역을 자기 땅으로 만들었으니 불만이 없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 북부에 노르망디 공국이 생겨났는데, 훗날 영국에 노르만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간의 복잡한 소유권 분쟁의 대상이 된다.

 

프랑스에 나라를 세울 정도라면 그보다 문명의 힘이 약한 브리타니아에서는 노르만족이 진출하기가 훨씬 더 용이할 것이다. 스칸디나비아와 덴마크에서 북해를 횡단하면 그대로 닿는 곳이 바로 브리타니아가 아닌가? 하지만 브리타니아 남부는 비록 갈리아 만큼은 못해도 예로부터 로마 속주의 전통이 강력히 전해지던 곳이었으므로 아무리 사나운 바이킹이라 해도 쉽사리 정복할 수는 없었다.

 

바이킹이 다가올 무렵 브리타니아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로마의 속주에서 벗어난 5세기 초반부터 9세기까지 브리타니아의 역사를 이은 것은, 게르만족 대이동의 와중에 독일 북부에서 브리타니아로 건너간 앵글족과 색슨족, 그리고 유트족이었다. 이들은 여러 개의 왕국을 건설하고, 대륙과 단절된 상태에서 늦지만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었다(그들 세 민족은 원래 고향이 같았으므로 타향에 와서도 서로 간에 민족적인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이때부터는 브리타니아 대신 영국이라는 이름을 써도 된다.

 

 

그러나 로마 문명의 세례를 받고 대륙에서 터전을 잡은 프랑크족과 고트족에 비해 앵글족과 색슨족은 촌놈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그들이 브리타니아에 세운 나라들은 명칭만 왕국일 뿐 부족국가에 가까웠다. 따라서 각 나라를 다스리는 왕도 왕이라기보다는 족장에 불과했다. 오늘날 영국의 지명과 인명에서 자주 볼 수 있는 ‘-ing’, ‘-ingham’, ‘-ington’ 같은 어휘들은 모두 당시의 친족집단에서 비롯된 이름들이다이를테면 헤이스팅스(Hastings)는 해스타(Haesta) 사람이라는 뜻이며, 워킹엄(Wockingham)은 워카(Wocca) 사람의 농장이라는 뜻인데, 이렇게 친족 집단에 -ing형 어미를 쓰는 것은 게르만적 전통이다. 메로빙거나 카롤링거 같은 왕조의 이름들을 생각하면 쉽다. 앵글족과 색슨족이 오랫동안 영국을 지배한 흔적은 오늘날 영국의 지명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잉글랜드라는 이름과 영국 동남부의 이스트앵글리어(East Anglia)는 앵글족의 이름에서 나왔으며, 에식스(Essex), 웨식스(Wessex), 서식스(Sussex) 등은 색슨족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에식스는 동색슨, 웨식스는 서색슨, 서식스는 남색슨의 뜻이다). 그보다 더 오래된 지명들은 로마의 속주 시대부터 생겨났고(런던, 노섬브리아 등), 후대의 지명들 중에는 노르만족의 정복으로 전래된 북유럽의 신들에게서 비롯된 것들도 많다(Tuesday, Wednesday, Thursday 같은 요일들의 명칭은 바이킹이 섬기던 신들의 이름에서 나왔다). 당시 영국에 존재했던 왕국들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5세기를 무대로 한 아서 왕의 전설이다. 여기에 나오는 원탁의 기사로부터 오늘날 격의 없이 민주적으로 진행하는 회의라는 뜻의 원탁회의(round-table conference)라는 용어가 나오기는 했지만, 꿈보다 해몽이 좋아서 그럴 뿐이지 실제로는 위계와 서열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고 왕권이 강력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 무렵 영국에서도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597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Gregorius , 540년경~604, 재위 590~604, 그는 레오 1세와 더불어 중세 교황권 확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에 대교황으로 불린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대표로 한 전도단을 영국에 파견해 앵글로 색슨 왕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비록 소수 왕족과 귀족만의 개종에 그쳤지만, 그래도 이것으로 영국은 일단 종교적으로는 서유럽 세계에 편입되었다(영국 본토의 선교에서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한 로마 가톨릭은 아일랜드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는 이후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종교 갈등을 빚었다. 이 갈등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진다).

 

 

영국의 개종 브리타니아는 로마 시대부터 로마 문명을 수용하면서도 로마화를 거부한 지역이었다 갈리아와 달리 브리타니아가 그럴 수 있었던 데는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이 큰 작용을 했다). 그러나 대륙에 로마-게르만 문명권이 성립하면서 이곳에도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이 이루어지게 된다. 사진은 8세기에 세워진 민스터 성당이다. 1066년 이래 역대 왕들의 대관식 및 결혼식 장소로 유명하다.

 

 

이렇듯 서서히 진행되던 영국의 형성에 박차를 가한 인물은 앨프레드(Alfired, 849~899, 재위 871~899) 왕이었다. 9세기 중반부터 본격화된 데인족의 침략에 견디지 못한 앵글족과 색슨족의 부족국가들은 당연히 뭉쳐야 산다고 생각했다. 웨식스의 왕이었던 앨프레드는 데인족과 맞싸움을 벌이는 대신 경제적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웨식스를 침범하지 않기로 약속하는 대가로 그들에게 돈을 준 것이다. 과연 약속대로 데인족은 웨식스를 그대로 놔둔 채 다른 곳들을 침략했다. 그러자 다른 왕국들은 몰락했고, 웨식스는 상대적으로 번영했으며, 앨프레드는 일약 유능한 군주로 떠올랐다.

 

자신의 정책에 자신감을 얻은 앨프레드는 런던까지 손에 넣고 난 다음 그 동쪽에 자리 잡은 데인족과 장기적인 평화를 추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데인족의 자치 구역인 데인로(Danelaw)(그런 탓에 데인로에서는 독특한 관습과 법, 인명과 지명이 오래도록 살아남았다). 왕국의 안전을 확보한 앨프레드는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왕국을 잉글랜드라 이름 짓게 된다. 그런 공을 세운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영국사에서는 앨프레드를 통일 왕국 잉글랜드의 건설자로 간주하며 대왕(Alfred the Great)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민족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크게 이질적인 두 나라가 서로 접경하고 있으니, 사실 장기적인 평화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잉글랜드 왕국도 아직 왕위 세습조차 확립되지 못할 만큼 부족국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니당시 잉글랜드의 왕위는 세습제가 아니라 선출제였다. 왕을 선출하는 회의체를 위탄게모트(Witangemot, 현인賢人 회의)라고 불렀는데, 비슷한 시기 한반도 신라의 화백제도와 비슷한 성격을 지니는 귀족 회의 기구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위탄게모트에서 영국 민주주의의 기원을 찾지만, 그건 마치 원시 공산주의에서 현대 공산주의의 뿌리를 찾으려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위탄게모트는 민주적이라기보다는 부족적인 성격의 제도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영국에서 의회민주주의가 맨먼저 발달하게 된 이유도 영국에 원래 민주적인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영국이 대륙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진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데인족이 마음만 먹는다면 굴복시킬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 잠재적 위기는 마침내 현실로 다가왔다.

 

100여 년간 그런대로 유지되던 평화를 먼저 깬 측은 잉글랜드였다. 1002년 잉글랜드의 왕 에셀레드는 잉글랜드 내의 데인족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장은 기분이 좋았겠지만, 이 사건은 바로 이듬해 덴마크의 대대적인 역공을 초래했다. 아직 잉글랜드는 덴마크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덴마크는 앵글족과 색슨족, 유트족의 고향이었으므로, 잉글랜

 

드인들은 모국을 상대로 싸운 셈이다. 현재 덴마크가 위치한 유틀란트 반도는 바로 유트족의 땅이라는 뜻이다), 10여 년간 전쟁을 벌인 끝에 1016년 스칸디나비아 국왕의 동생인 크누드(Knud, 995~1035)는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이후 그는 20년 가까이 잉글랜드를 지배했지만, 잉글랜드의 관습을 존중해 큰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또한 후기에는 스칸디나비아 왕위를 물려받아 주로 그쪽에 신경을 쓴 탓으로 영국 역사에 크게 기여한 바는 없다.

 

 

정작 영국이 영국으로 발돋움한 것은 크누드가 죽은 뒤였다. 크누드는 아들 하레크누드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해 계속 덴마크 계의 왕통이 이어지기를 바랐으나, 그의 아들은 영국보다 덴마크에서 스칸디나비아의 왕위 하나만 받으려 했다. 그러자 위탄게모트에서는 그 틈을 이용해 재빨리 앨프레드의 혈통인 에드워드(Edward, 1003년경~1066)를 왕으로 선출했다. ‘참회왕이라는 별명답게 에드워드는 독실한 그리스도교도로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건립하는 등의 종교적 업적을 쌓았지만, 어린 시절 노르망디에서 자란 탓으로 노르망디에 연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데다 번번이 왕을 무시하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웨식스 백작 고드윈의 전횡도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는 외사촌 동생이자 노르망디의 왕인 윌리엄(william , 1027년경~1087, 재위 1066~1087, 프랑스식 이름은 기욤Guillaume)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밀약을 맺었다.

 

1066년 에드워드가 후계자 없이 죽자 드디어 문제가 터졌다. 고드윈의 아들로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한 해럴드는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마저 이루기로 했다. 위탄게모트를 통해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여긴 노르망디의 윌리엄이 이를 두고 넘어갈 리 없다. 그해 1014일 기병 5000명을 거느리고 도버 해협을 건너온 윌리엄은 헤이스팅스에서 해럴드의 군대와 맞붙었다. 이 단 하루의 전투가 이후 영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여기서 승리한 윌리엄은 해럴드를 앵글로 색슨 계열의 마지막 왕으로 만들고(그는 불과 9개월 동안 재위했다), 새로 노르만 왕조를 열었다. 그 덕분에 그는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었다.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영국 왕조는 모두 윌리엄의 혈통이니까 대륙에서 건너온 덴마크계의 후손들이다(18세기부터는 하노버 왕가가 영국 왕실이 되지만 하노버도 북독일이므로 덴마크계와 그리 멀지 않다).

 

 

노르만족의 영국 정복 911년 프랑스의 샤를 3세가 북부의 땅을 노르만족에 떼어주면서(그래서 노르망디라는 지명이 생겼다) 노르만족은 서유럽에 근거지를 확보하게 된다. 노르망디에서 해협 하나만 건너면 바로 영국인데, 당시 영국은 덴마크 출신의 노르만족이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에는 어떤 형태로든 노르만 왕조가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림은 윌리엄의 영국 정복을 묘사한 바이외 태피스트리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립

서유럽 세계의 탄생

중세의 원형

원시 프랑스

환생한 샤를마뉴

기본형과 활용형

영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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