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한 샤를마뉴
서프랑크를 차지하게 된 샤를은 행운아였다. 그는 막내에다 이복 형제였는데도 둘째 형(피핀)이 죽는 바람에 알짜배기 땅을 물려받게 된 것이었으니까. 그에 비해 루이 1세의 셋째 아들인 루이(루트비히 2세)는 억세게도 운이 없었다. 삼형제였을 때는 막내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가장 오지인 동프랑크를 물려받았는데, 첫째 형과 둘째 형이 모두 죽었어도 여전히 그는 동프랑크에 만족해야 했다.
옛 로마의 속주였던 데다 프랑크 왕국의 중심지였던 서프랑크에 비하면 동프랑크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샤를마뉴가 설치한 주들도 동프랑크 지역에는 많지 않았으며, 따라서 당시 첨단의 제도인 봉건제도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주민들도 문명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하고 여전히 옛 게르만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위치상 노르만의 이동에 따른 피해를 직접적으로 받는 지역이었다.
이렇게 문화권이 달랐기에 10세기 초반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이 끊어지자 동프랑크는 자연스럽게 서프랑크와 결별하게 되었다. 동프랑크의 귀족들은 구태여 프랑크족의 혈통을 강조하려 하지 않았고, 자기들끼리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했다. 그 결과로 프랑켄 공작(봉건 귀족의 하나지만 당시 공작은 정식 작위라기보다는 Herzog, 즉 부족장이었다) 콘라트 1세(Konrad Ⅰ, ?~918)가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동프랑크 왕국의 ‘지극히 조용한 멸망’이다.
이제 동프랑크 지역은 프랑크의 전통과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되었다. 귀족들은 게르만의 옛 전통에 따라 부족연합 체제(공국 체제)를 유지했다. 콘라트의 뒤를 이은 작센공 하인리히 1세부터 왕위는 세습되기 시작했지만(작센 왕조), 당시 세습 왕조는 시대의 추세라서 취한 것일 뿐 국가 체제는 종전과 달라질 게 없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분권화의 역사가 이후 1000여 년에 걸친 독일의 역사를 이룬다(하인리히 1세는 독일 역사에서 초대 국왕으로 간주된다)【동양식 왕조는 새 나라를 세우면 거창하게 국호를 짓고 대외적으로 널리 선전하지만 유럽의 역사에서는 그런 경우가 드물다. 따라서 프랑스나 독일이 생겼다는 말을 동양식 왕조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심지어 프랑스 역사가들도 프랑스가 정확히 언제 생겼는지에 관해서는 한 가지로 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중국이나 한반도의 경우에는 예로부터 왕조(나라)의 맺고 끊음이 분명했지만, 유럽에서는 그보다 훨씬 느슨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불분명하기도 했다. 굳이 비교하면 유럽 각국의 경우에는 한 왕가의 지배기가 동양식 ‘왕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황금의 샤를마뉴 로마-게르만 문명의 문을 연 샤를마뉴는 당대만이 아니라 후대에도 숭배의 대상이었다. 사진은 13세기에 제작된 샤를마뉴의 상인데,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물론 샤를마뉴의 실물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13세기 방식으로 이상화된 조각상이다.
서프랑크(이제부터는 프랑스라 불러도 되겠다)와 전혀 다른 나라가 되었으니 이제 과거의 조약이고 뭐고 다 소용없다. 그래서 하인리히는 프랑스를 침략해 로트링겐을 빼앗았다. 대내적으로도 그는 여러 귀족을 어르고 누르면서 왕권 강화에 성공해 신흥 세력인 작센 왕조의 토대를 튼튼히 굳혔다. 이 토대를 밑천으로 삼아 독일의 국력을 크게 키운 사람은 그의 아들 오토 1세(otto Ⅰ, 912~973, 재위 936–973)였다.
당시는 노르만의 민족대이동이 절정에 달할 무렵이었으므로 신생국 독일로서는 무엇보다 외침에 방어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에 대해 오토 1세는 샤를마뉴처럼 북쪽에 변경주를 두어 데인족(덴마크)과 마자르족(헝가리)을 방어했다. 프랑스는 인정할 수 없어도 ‘카를 1세’는 독일 민족의 시조로 인정했다고 할까? 게다가 그는 이민족을 그리스도교(로마 가톨릭)로 개종시키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그 점에서도 샤를마뉴를 닮았다(그래서 독일인들은 그를 ‘오토 대제’라고 부른다. 또 한 명의 대제가 탄생했다). 특히 955년 남부의 레히펠트(아우크스부르크 부근)에서 마자르족을 크게 무찌른 일은 다시 한 번 서유럽 세계를 수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아가 그는 로트링겐을 탈환하려는 프랑스의 침략을 물리쳐 프랑스에 대해 힘의 우위를 다졌다.
이리하여 신생국 독일을 반석 위에 올린 뒤 오토 1세는 로트링겐, 슈바벤(알레마니아), 바이에른(지금의 뮌헨 일대) 등지를 동생과 아들에게 주어 다스리게 하고, 작센과 프랑켄을 직속지로 삼아 제국의 면모를 갖추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는 샤를마뉴와 닮은꼴이지만, 그를 결정적으로 샤를마뉴와 닮게 만든 사건은 따로 있다(그는 샤를마뉴를 계승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 오토의 꿈 오토 1세는 샤를마뉴의 후손이 아니지만 그를 조상으로 받들고자 무척 노력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의 치적은 샤를마뉴의 복사판이다. 그 이유는 샤를마뉴와 그가 같은 목표, 즉 로마 제국을 부활시키고 로마황제가 된다는 꿈을 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오토는 샤를마뉴처럼 그 꿈을 이루었다. 사진은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신성 로마 제국의 제관이다. 10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이니까 이것을 오토가 머리에 썼을 것이다.
961년에 이탈리아에서 베렝가리오라는 자가 로마 황제를 자칭하자 교황 요한 12세는 오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물론 오토가 당대의 실력자였기에 그런 것이지만, 어쩌면 이렇게 150여 년 전의 샤를마뉴와 똑같을까? 베렝가리오는 루이 1세의 외손 족보이므로 오토보다는 샤를마뉴의 혈통에 가까웠으나 로마 황제의 영광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샤를마뉴의 전통으로 인해 로마 황제 자리는 이제 로마 교황이 수여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토는 교황의 뜻대로 이탈리아를 원정해 간단히 베렝가리오를 제압했다. 이듬해인 962년 교황은 그에게 황제의 직위를 수여했다. 자신의 우상인 샤를마뉴를 닮겠다는 오토의 꿈은 마침내 현실로 이루어졌다. 이후 그는 10년 동안의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비잔티움 제국의 승인을 얻고 비잔티움 황실의 황녀를 아내로 맞아들여 우상의 못다 이룬 꿈마저 이루어냈다. 또한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우상의 과업을 끝까지 충실하게 모방했다. 학문과 예술을 적극 장려하고 육성해 후대에 ‘오토의 르네상스’라고 불리게 되는 시대를 연 것이다.
이 정도로 닮은꼴이었으니, 오토의 당대에는 샤를마뉴가 환생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후대의 역사로 인해 두 사람은 중요한 차이점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바로 황제의 명칭이다. 샤를마뉴 시대에도, 오토의 시대에도 제국은 그냥 제국이었고, 황제는 그냥 황제였다. 다시 말해 제국이나 황제 앞에 아무런 수식어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오토 2세는 여기에 ‘로마’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200년 뒤에 프리드리히 1세는 또 ‘신성’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이게 된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 명칭을 소급해 오토 1세를 신성 로마 제국(Holy Roman Empire)의 황제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고, 황제가 다스리지도 않았던 기묘한 나라인 신성 로마 제국은 이렇게 탄생했다【여기서 비롯되어 이후 독일의 왕은 황제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지만, 실은 다른 서유럽 나라의 국왕에 해당한다. 그래도 명칭상으로는 황제이므로 여느 왕들과 달리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대관식은 중세가 끝나고 독일이라는 국가가 모습을 드러나게 될 때까지 대대로 로마 교황청에서 치르는 것을 관례로 삼았다】.
▲ 서유럽 세계를 낳은 민족이동 5세기의 게르만(왼쪽), 9세기의 노르만(오른쪽), 이 두 차례의 민족이동으로 로마 문명은 로마 게르만 문명으로 자라났고, 서양 역사는 중세로 접어들었다. 지도는 문명의 뿌리를 줄기로 키운 두 민족이동의 경로를 보여준다. 이미 오늘날 유럽 세계의 원형이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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