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 프랑스
중세의 골격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샤를마뉴는 알렉산드로스-콘스탄티누스로 이어지는 ‘대제(大帝)’의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경우처럼 그가 역사에 대제로 기록되는 이유는 로마 가톨릭의 전파에 지대한 역할을 한 덕분에 그리스도교 역사가들에게서 점수를 땄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평가는 대개 사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샤를마뉴가 종교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진정한 대제가 되려면 그가 세운 프랑크 제국이 계속 존속하고 발전했어야 한다. 그러나 프랑크는 샤를마뉴에게 더 이상의 영광은 주지 않았다. 그가 죽자마자 제국의 면모는 금세 사라져버렸다.
원래 프랑크 제국은 지역마다 민족과 언어, 관습이 달랐으므로 제국으로서의 통합성은 크게 부족했다. 물론 샤를마뉴가 이룩한 종교와 경제에서의 통합도 중요하지만,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차피 제국은 유지될 수 없었다. 그의 당대에 제국이 유지되었던 것은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체제상의 취약점을 보완했기에 가능했다. 그는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면 그것으로 제국의 계승도 가능하다고 믿었겠지만, 사태는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마르셀 피핀-샤를마뉴로 계승된 조상의 ‘음덕’은 그의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샤를마뉴의 셋째 아들로 제위를 이은 루이 1세(Louis Ⅰ, 778~840, 재위 814~840)는 일찌감치 사태를 깨달았다. 정치적 통합성이 취약한 것은 이미 각오한 일,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다시 외적의 침입이 잦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샤를마뉴가 없는 프랑크를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여긴 이슬람 제국은 은근히 에스파냐에서 치고 올라오려 했다. 또 북쪽에서는 바야흐로 바이킹으로 알려진 노르만의 민족대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버지의 위업을 계승하고자 교회와 수도원을 적극 보호하는 정책으로 ‘경건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이지만 아버지의 정복 사업마저 계승할 자신과 능력은 없었다. 그래서 루이 1세는 817년에 제국 계획령을 내려 영토를 세 아들에게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맏아들인 로테르(Lothaire, 795~855, 독일식으로는 로타르)에게는 제위와 함께 프랑크 본토를, 둘째 아들 피핀에게는 아키텐을, 셋째 아들 루이에게는 바이에른을 물려주기로 했다(첫째 아들 외에는 이름이 모두 ‘재탕’이다).
▲ 복사본, 아니 필사본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책을 보존하려면 오로지 필사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은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열심히 책을 필사하고 있는 모습이다. 오늘날 복사기의 역할을 이들이 대신한 셈이다. 수도사들은 글을 그대로 베끼는 데 머물지 않고 화려한 삽화로 장식해 채식 필사본이라는 중세의 한 미술 장르를 개척하기도 했다.
그런데 823년 재혼한 아내에게서 넷째 아들 샤를을 얻게 되자 문제가 생겼다(루이가 자기 아버지인 샤를마뉴의 이름을 붙여준 아들이다). 아직 어린아이지만 샤를에게도 제 몫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래서 루이 1세는 상속 계획을 변경시키려 했는데, 당연히 세 아들은 일제히 반대했다. 심지어 이 사건으로 루이 1세는 아들들의 손에 의해 강제로 폐위될 위기를 넘기기도 한다. 838년 피핀이 사망한 것은 제국을 위해 다행스런 일이었다. 사형제가 다시 삼형제가 되었으니까. 그에 따라 아키텐은 자연스럽게 막내 샤를의 몫이 되었다. 피핀에게도 아들이 있었으나 그는 당연히 아버지의 유산을 포기하고 목숨을 부지했다【여기서 잠깐 왕명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프랑크가 분할됨으로써 이후 이 지역의 역사도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로 나뉘어 전개된다(독일이라는 나라가 실제로 탄생한 것은 19세기이므로 여기서 독일은 지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같은 왕명이 여러 가지로 불리게 된다. 프랑스의 샤를은 독일의 카를이고, 프랑스의 루이는 독일의 루트비히다. 따라서 서프랑크를 차지한 샤를(‘대머리왕’)은 독일에서는 카를 2세가 되며, 동프랑크를 차지한 루이(‘독일왕 루이’)는 루트비히 2세가 된다(카를 1세는 그들 형제의 할아버지인 샤를마뉴이며, 루트비히 1세는 아버지인 루이 1세다). 이들은 형제였으므로 후손들의 이름도 서로 뒤섞이게 된다. 예를 들어 루트비히 2세의 아들은 카를 3세(‘뚱보왕’)인데, 작은아버지(샤를)의 제위를 물려받아 그의 이름을 따르게 된 것이다(물론 서프랑크 영토 자체를 물려받은 것은 아니고 프랑크 황제 자리만 물려받았다)】.
루이 1세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아들들의 분쟁이 불을 뿜었으니 그가 죽은 뒤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840년에 그가 죽자 분쟁은 즉각 전쟁으로 바뀌었다. 삼형제 간에 싸움이 벌어지면 대개 두 동생이 연합해 맏형과 맞서게 마련이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힘을 합쳐 맏형 로테르를 일단 굴복시킨 다음 루이와 샤를은 로테르에게 이렇게 싸울 게 아니라 조약을 맺어 정식으로 제국을 분할하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843년에 유럽 최초의 조약인 베르됭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결과 프랑크는 서프랑크(지금의 프랑스 서부), 중부 프랑크(지금의 프랑스 동부와 이탈리아 북부), 동프랑크(지금의 독일 서부)의 세 왕국으로 나뉘었다. 결국 프랑크 제국의 수명은 50여 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직 프랑크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로테르의 두 동생은 싸움에서 진 맏형의 몫을 고스란히 인정해주려 하지 않았다. 형의 체면을 감안해서 당분간 조약의 결정에 따른 그들은 로테르가 죽자 즉각 동쪽과 서쪽, 양측에서 형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갔다. 이 작업에 더 열성적인 사람은 서프랑크의 샤를이었다. 그는 형제 중에서 막내였지만 야심은 가장 컸다. 당연히 양자 간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베르됭 조약의 경험이 있었던 두 형제는 다시 한 번 조약을 맺고 국경을 확정하기로 했다. 이것이 870년의 메르센 조약이다. 이 조약에서 형제는 이탈리아 북부를 제외한 중부 프랑크를 완전히 분할하기로 합의했는데, 그 경계선은 라인 강이었다【로테르의 영토는 다시 삼분되어 중심지인 로트링겐은 동프랑크와 서프랑크가 나누어가졌고, 중부(지금의 스위스 일대)는 부르고뉴 왕국, 남부는 이탈리아에 속하게 되었다. 여기서 쟁점은 로트링겐이다. 두 나라가 분할해 차지한 만큼 이 지역은 처음부터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로트링겐은 지금의 로렌 지방인데, 근대 국민국가의 시대가 되면서 이 지역을 두고 프랑스와 독일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게 된다. 근대 유럽이 탄생한 17세기부터 20세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두 나라의 영토 분쟁의 핵심을 이루게 되는 알자스-로렌 문제의 기원은 이미 9세기에 생겨났던 것이다】.
라인 강은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의 경계선이기도 하다. 즉 메르센 조약으로 오늘날 서유럽의 주요한 3국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원시적 형태가 드러난 것이다. 그 가운데 프랑크의 전통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것은 프랑스였다(프랑스라는 이름부터 프랑크에서 나왔다). 프랑스는 서유럽 세계에서 맨 먼저 나라의 꼴을 갖추었고, 이렇게 스타트를 일찍 끊은 덕분으로 이후 중세 유럽의 역사를 주도하게 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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