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원형
옛 로마 제국도 명실상부한 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될 때까지는 정복 활동이 끝나고 나서도 상당히 오랜 기간이 걸렸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것은 후발 주자의 고유한 이점이다. 그러나 제국의 하드웨어는 초고속으로 갖추었어도 신생 프랑크 왕국이 제국의 소프트웨어마저 완비하기란 애초부터 무리였다. 물론 프랑크는 교황에게서 로마의 상속자라는 자격을 부여받기는 했으나 명칭만 그랬을 뿐이고 로마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까지 이어받지는 못했다. 과연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었던 것이다.
우선 샤를마뉴는 제국의 영토를 많은 주께로 나누었으나 그것들은 로마의 속주처럼 되지 못했다. 수치로만 보면 300개에 달했으니까 로마의 속주에 못지않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에 미치지 못했다(로마 제국의 계승을 꿈꾼 샤를마뉴는 최소한 개수로라도 로마의 속주에 맞추어야 한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원래 식민지란 모국이 든든해야 유지되는 법이다. 그런데 프랑크는 로마처럼 강력한 중심지가 못 되었다. 게다가 당시의 주변 정세는 로마 시대처럼 튼튼한 중심이 들어서도록 허락하지도 않았다. 게르만족의 이동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소규모로 민족이동이 지속되고 있었으며, 유럽 대륙의 판도에는 늘 변화의 조짐이 역력했다(상대적으로 동유럽의 비잔티움 제국은 안정적이었지만 고질적으로 내정이 불안한 데다 이집트와 시리아를 잃고 겨우 제국의 면모만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사정을 감안해 사를마뉴는 처음부터 각 주에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최소한 방어만이라도 제 힘으로 하라는 취지였으나, 그 과정에서 군사권·사법권·치안권을 맡긴 것은 곧 중앙 권력의 영향력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앙 귀족과 성직자로 팀을 만들어 정기적인 순찰은 돌렸지만, 자치권을 소유한 주의 지배자들이 순찰사의 통제에 고분고분 따를 리는 만무했다. 그저 우호적인 관계만 다지고 대접이나 잘 받으면 만족이었다. 훗날 이 주의 지배자들이 중세의 영주 신분으로 성장하게 된다.
정치적인 통합이야 어렵다지만 경제적인 통합마저도 이루지 못한다면 무늬만의 제국도 유지하기 어렵다. 그래서 샤를마뉴는 도량형과 화폐 단위를 통일하는 데 주력했다. 이를 계기로 로마 말기에 유명무실화된 은화(278쪽 참조)가 다시 주조되어 유통에 숨통이 트였다【당시에 생겨난 화폐 단위 가운데 하나가 리브라(Libra)다. 리브라는 로마 시대에 곡물의 양을 재는 중량 단위였는데, 프랑크 시대에 화폐로 격상되었다. 나중에 이것이 영국의 화폐 단위이자 무게 단위인 파운드가 된다. 오늘날 파운드의 약자를 £ 또는 Ib로 표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경제적인 통합 조치는 각 주에도 이득이었으므로 저항을 받지 않았다.
▲ 신앙을 위해 종교를 중시한 샤를마뉴의 통치 방식은 후대에도 이어졌다. 그림은 9세기 중반 프랑크에서 제작된 복음서인데, 놀랍게도 예수의 일생을 상아로 조각한 책이다. 신앙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친다는 중세의 ‘경건한’ 자세는 이때부터 이미 드러나 있다.
사실 샤를마뉴는 지방 정치는커녕 중앙 정치를 꾸리기에도 힘이 벅찼다. 실로 오랜만의 서유럽 황제인지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그래서 그는 초대 황제(동양식 제국으로 치면 건국자)라면 누구나 취하는 방식을 택했다. 일이 많으면 사람이 필요한데 믿을 만한 사람은 가족뿐이다. 그는 프랑크족 출신의 30개 귀족 가문을 황실과 혼맥으로 결합시켜 제국의 수도인 엑스라샤펠(현재 독일의 아헨)의 중앙 귀족층을 구성했다【서양보다 오랜 제국의 역사를 가진 중국은 그 점에서도 더 선배다. 중국식 제국의 원형인 한을 세운 유방(한 고조)도 일가붙이들을 동원해 미약한 중앙 권력을 키웠다. 그는 닥치는 대로 지방 호족들과 혼맥을 구축했으며, 그게 불가능하면(자식의 수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그냥 친척으로 선언하고 자신의 유(劉)씨 성을 하사했다. 그 덕분에 심지어 한의 적이었던 흉노 부족장들에게도 유씨가 생겨났다. 역사학에서는 이런 제도를 군국(郡國)제도라는 그럴듯한 용어로 부르지만, 실은 중앙을 황제가 직접 챙기고 지방은 수령들에게 맡긴다는 뜻이다. 어차피 넓은 영토의 제국을 지배하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중앙의 고위 관직들을 해결한 다음에는 군대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황제와 중앙정부를 지키려면 군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로마 황제들이 거느렸던 친위대 방식이지만, 선배들만큼의 권위가 부족한 신생 프랑크 제국의 초대 황제로서는 언감생심이 아닐 수 없었다. 권위에서 나오는 ‘명령’이 불가능하다면 서로 간의 약속에 의한 ‘계약’을 취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샤를마뉴는 신하단과 계약을 통해 중앙 군대를 구성했다. 신하단은 황제에게 군사적 봉사와 복종을 맹세하고, 그 대가로 황제는 토지를 주는 것이다. 그 신하단이 바로 중세의 기사 신분을 이루게 된다【사실 이 계약은 용병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용병은 고대 이집트와 페니키아, 그리스와 페르시아, 카르타고와 로마 등의 역사에 빠짐없이 등장한다(결국 로마는 용병의 손에 멸망했다). 모든 게 황제의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중국식 제국에서는 용병이 존재할 수 없다. 샤를마뉴는 충성과 복종의 대가를 내주어야 했지만, 중국의 황제는 ‘천자’의 권위로 신하와 군대를 지배했으므로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 보겠지만 엇비슷한 시기에 전개된 서양식 정복(십자군 전쟁)과 동양식 정복(몽골의 유럽 원정)에서는 용병과 계약이라는 전통 때문에 서로 상당히 다른 양상이 드러나게 된다. 이런 전통은 ‘계약’ 개념에 기원을 둔 서양의 자본주의와 근대국가의 발생과도 무관하지 않다】.
주에는 교구를 설치하고, 영주에게는 자치권을 부여하며, 중앙에서는 기사들과의 계약을 통해 직속 부대를 편성한다. 그렇다면 무척 낯익은 구성이다. 바로 서양 중세의 전형적인 체제다. 기도하는 사람, 지배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이렇게 중세 사회의 지배층을 이루는 세 가지 신분(성직자, 영주, 기사)이 이미 생겨났다. 나머지 신분은 일하는 사람, 곧 농민이다.
이렇게 중세 정치의 골격을 만든 것과 더불어 샤를마뉴는 중세 문화의 골격도 만들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를 완전히 계승하지 못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전혀 걸림돌이 없었다. 게다가 샤를마뉴는 그 자신이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긴 탓에 학문과 예술을 무척 존중하고 사랑한 군주였다(그는 침대 밑에 펜과 양피지를 넣어 두고 틈틈이 글씨 연습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직접 칙령을 내려 각 주교구와 수도원에 학교들을 설립하도록 했으며, 수도에는 궁정 학교를 열어 라틴어와 라틴 문학, 논리학, 수학, 고전 등의 학문과 음악, 시 등의 예술을 적극 장려했다.
혹시 자신의 제국이 로마 게르만의 혼혈이라는 점을 약점으로 여겼을까? 샤를마뉴는 오히려 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그래서 그의 시대를 가리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특히 당시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직접 베끼고 장식한 고전의 필사본과 채식 필사본 들은 오늘날까지도 중세 문화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전해지고 있다.
▲ 부활한 황제 샤를마뉴의 업적을 보여주는 지도다. 초록색 부분은 그가 왕위에 오를 무렵인 768년경 프랑크 왕국의 영토다. 여기에 샤를마뉴는 속국을 더했고, 직접 정복에 나서 영토를 늘렸다. 그 업적을 발판으로 그는 꿈에 그리던 로마 황제가 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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