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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4부 줄기 - 3장 원시 서유럽,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립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4부 줄기 - 3장 원시 서유럽,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립

건방진방랑자 2022. 1. 8.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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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원시 서유럽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립

 

 

투르에서 마르텔이 구해낸 것은 단지 프랑크 왕국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문명권 전체였다. 그리스도교 세계가 위기를 모면한 것을 가장 환영한 사람은 로마 교황이었다. 300년 전에 클로비스는 이단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해 교황에게 힘을 보태주더니 이제 그의 후손은 무시무시한 이슬람의 침략도 막아주었다. 교황으로서는 프랑크 왕국이 예쁘기만 했다. 따라서 마르텔이 일등공신의 위치를 넘어 프랑크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는 데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왕위는 마르텔의 당대에 얻어지지 않았다. 그는 보잘 것 없는 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기보다는 그냥 유력한 지방 호족으로 남는 편이 더 낫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아들 피핀(Pepin, 714~768)은 생각이 달랐다그의 할아버지, 즉 마르텔의 아버지도 이름이 같았기 때문에 이 피핀은 피핀 3세라고 불리는데, Pepin the Short라는 이름도 있다(물론 당시에는 아직 영어가 없었지만, 편의상 영어 표기를 따르기로 한다. 프랑스어로는 Pépin le Bref인데, 같은 뜻이다). 그래서 단신왕(短身王) 피핀’, ‘() 피핀’, ‘꼬마 피핀등으로 번역된다. 실제로 피핀의 키가 작았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할아버지와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렇게 후손이 조상의 이름을 가지는 것은 고대의 관습이다. 이후에 등장하는 중세 유럽의 왕과 귀족 들도 대부분 별명을 가지고 있다. 경건왕, 존엄왕, 사자심왕, 태양왕, 심술보왕 등처럼 왕의 품성을 나타내는 별명이 있는가 하면, 단신왕을 비롯해 미남왕, 대머리왕, 뚱보왕처럼 신체의 특징을 나타내는 별명도 있다. 나중에 역사학자들은 같은 이름을 가진 왕들을 표기할 때 그런 개별적 특성 대신 1, 2, 3세로 구분했다.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은 피핀은 10년간 프랑크 왕국을 지배하다가 차라리 직접 왕이 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751년에 그는 이미 유명무실해진 메로빙거 왕조의 문을 닫고 새로 카롤링거(Carolinger) 왕조의 문을 열었다(카롤링거는 카를이라는 이름에서 나왔다).

 

물론 당시 로마 교황 자카리아스(Zacharias, ?~752)는 이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사실 교황으로서는 프랑크에서 일어난 쿠데타를 지지하고 말고 할 처지가 못 되었다. 당시 교황이 의지할 데라고는 오로지 프랑크 왕국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황에게는 당면한 큰 위협이 있었다. 그것은 이탈리아 북부에 자리 잡은 롬바르드 왕국이었다. 비잔티움 제국이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킨 뒤 물러나자 어부지리로 이탈리아 북부를 얻은 롬바르드는 점차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욕심내기 시작했다. 좀 멀리 떨어진 프랑크냐, 가까운 롬바르드냐를 놓고 선택한다면 교황은 당연히 종교가 같고 늘 자신을 지지해준 프랑크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교황은 교회 안에서라면 최강이지만 교회 밖에서는 실력자로 공인되지 못하는 상태였다.

 

솔직히 말한다면 교회 안에서도 로마 교황은 지존의 존재가 아니었다. 바로 비잔티움 황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은 자신이 서방 로마의 종교적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설령 그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아직 로마 교황의 권위와 힘은 비잔티움 황제에 미치지 못했다. 그에 비해 비잔티움 황제는 동방교회의 종교적 권력에다 현실적인 제국까지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로마 교황은, 롬바르드 왕국에는 세속의 힘에서 밀리고, 비잔티움 황제에게는 신성과 세속의 힘 모두에서 밀리는 형편이었다. 교황이 힘을 얻으려면 하늘과 땅에서 모두 어려운 싸움을 치러야 했다.

 

 

먼저 싸움이 벌어진 곳은 하늘이었다. 이슬람의 침략을 막아낸 지 얼마 되지 않은 726년 비잔티움 황제 레오 3세는 왕궁 문에 있는 성상(聖像)을 철거하고 성상 숭배 금지령(iconoclasm)을 내렸다. 종교에서 성상 숭배를 금지하다니? 이 알쏭달쏭한 조치에는 종교적인 의도와 정치적인 의도가 복합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교도가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상이나 성모 마리아상이 익숙하지만, 다신교라면 모르되 원래 유일신 종교에서는 성상이 익숙한 게 아니었다. 신의 모습을 인간의 형상으로 담아내는 것이니 아무래도 불경스러운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교에서 성상이 발달한 이유는 헬레니즘의 전통 때문이었다헬레니즘의 영향을 그리스도교보다 먼저 받은 것은 불교였다. 불교의 경우에도 초기에는 불상이 없었다. 굳이 부처의 형상을 표현해야 할 때에는 발자국이나 빈 의자 등의 추상적인 표현 방법을 사용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으로 헬레니즘 세계가 성립하자 그 영향을 받아 비로소 인도의 불교도들도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당시 인도에서 제작된 불상들에는 그리스 신상과 같은 모습을 취한 것들이 많았다. 이런 양식을 간다라 미술이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모습을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조각이나 그림으로 담았다. 따라서 헬레니즘의 문화적 전통이 강했던 소아시아에서는 성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플만 겨우 방어했을 뿐 옛 헬레니즘의 고토를 대부분 이슬람 세계에 넘겨준 것이다. 이에 따라 제국 내에는 반헬레니즘적 정서가 널리 퍼져나갔다.

 

이것이 성상 숭배 금지령의 종교적 측면이라면, 정치적 측면은 수도원과 관련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전부터 대지주들이 늘어나는 현상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그 대지주들의 대부분이 바로 수도원이었던 것이다. 수도원의 주 업무는 바로 성상 숭배가 아니던가? 따라서 성상 숭배를 금지하면 수도원 세력이 약화될 것이고, 잘하면 그들이 소유한 토지가 국고로 환수될 수도 있다. 이게 레오 3세의 속셈이었다.

 

요컨대 황제의 조치는 종교적으로 성상을 우상으로 격하하고, 정치적으로 수도원을 약화시키고, 경제적으로 수도원 소유의 토지를 노리고 있었다. 당연히 수도원은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은 이후 1세기 이상이나 성상을 둘러싼 종교적·정치적 논쟁에 빠지면서 국력을 탕진하게 된다. 그런데 이 불똥은 엉뚱하게도 로마 가톨릭 교회로 튀었다.

 

 

동방교회의 성전 옛 서로마 제국에서는 게르만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들어섰으나, 비잔티움 교회에서는 그런 이민족과의 타협을 인정하지 않았다(동방교회를 정통이라 부르게 된 이유다). 사진은 동방교회의 성전이자 그 자체로 뛰어난 예술품인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대성당이다. 1453년부터 1931년까지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다 현재는 미술관으로 쓰인다. 주변의 기둥(미나레트)들은 사원으로 개조되면서 세워졌다.

 

 

프랑크 왕국만 개종했을 정도로 아직 서유럽에서 교세를 키우지 못한 로마 가톨릭으로서는 성상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가 불만이었다. 교리상으로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에 어긋날지 모르지만, 이교도들에게 포교하기 위해서는 성상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로마 교황으로서는 종교를 빌미로 비잔티움 제국 내부의 문제를 풀려하는 레오 3세의 의도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730년에 레오 3세의 공작으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들이 황제의 시책에 찬성하자 로마 교황은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당시 로마 교황의 종교적 위상은 비잔티움 제국의 주교들과 동급이었으므로 라이벌 의식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레오 3세도 신속하게 반격했다. 그는 즉시 로마 교황에게 위임한 서방 제국(오래전에 멸망하고 없는 제국이지만)의 종교적 관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당시 양측은 미처 몰랐겠지만 이 대립은 지극히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을 만들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비잔티움 교회가 결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비잔티움 측은 자기들의 교회를 정교회(Orthodox Church, 정통교회)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가톨릭교, 개신교와 함께 그리스도교 3대 분파의 하나를 이루고 있는 동방정교의 기원이다(동방정교회는 이후 주도권을 지닌 세력에 따라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의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로마 제국 후기에 지역적으로 분립했고 비잔티움 시대에 정치적으로도 분립한 동유럽과 서유럽은 이로써 종교적으로도 분립하게 되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동유럽과 서유럽의 차이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셈이다.

 

 

성상을 파괴하라 8세기 비잔티움 교회를 휩쓴 성상 파괴 운동은 사실 종교적인 측면보다 세속적인 의도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황제가 주동한 이 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이것을 계기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영구히 분리되어 오늘날에까지 이른다. 그림은 당시 이집트

의 수도원에 그려진 성상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립

서유럽 세계의 탄생

중세의 원형

원시 프랑스

환생한 샤를마뉴

기본형과 활용형

영국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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