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세계의 탄생
종교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로마 교황은 세속에서도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종교와 달리 세속의 독립선언을 하려면 실제로 독립을 유지할 만한 물리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교황은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을 정식 파트너로 삼기로 했다. 마침 그럴 만한 계기도 있었다. 751년 롬바르드 왕국이 라벤나를 점령하고 로마를 노리자 교황 스테파누스 3세는 다급해졌다. 불감청 고소원이라 했던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때 피핀이 프랑크 왕 힐데리히의 왕위를 찬탈하고 교황에게 쿠데타의 승인을 요청했다.
사실 교황은 비잔티움 측에 원조를 요청할 수도 있었고, 또 과거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마땅히 그래야 했다. 더구나 비잔티움 제국은 아직도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관할하고 있었다. 그런 데도 교황은 비잔티움 제국 대신 프랑크를 선택했으니, 말하자면 승부수를 띄운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비잔티움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레오 3세의 아들)는 우상 숭배 금지령에 반대하는 수도원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으므로 로마 교황으로서는 더더욱 비잔티움 측에 의지할 수 없는 처지였을 것이다.
교황이 체면 불구하고 몸소 프랑크 왕국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자 피핀 역시 반갑기 그지없는 심정이었다. 과연 그는 교황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두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로 원정을 와서 롬바르드족을 물리쳐주었다. 게다가 그는 전리품으로 얻은 라벤나를 교황에게 희사함으로써 돈독한 관계를 주변에 과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로마 교황령(Papal State)의 시작이다【역사에서는 756년의 이 사건을 특별히 피핀의 기증(Donation of Pepin)이라고 부른다. 사실 라벤나는 6세기 중반부터 로마 교황의 소유였으니 기증이라기보다는 수복이라 해야 할 것이다(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라벤나 총독이 롬바르드족을 막아내지 못함으로써 라벤나는 형식상으로 교황의 소유지가 되었다). 어쨌든 이리하여 공식적으로 탄생한 교황령은 19세기까지 존속하다가 1870년 이탈리아 국가에 환수된다. 그 후 한동안 교황령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1929년 로마 시내에 바티칸이 생겨나면서 다시 복구되었다】.
이제 프랑크 왕국과 가톨릭 교회는 찰떡궁합이 되었다. 교황은 피핀이 일으킨 ‘세속의 쿠데타’를 정당화해주었고, 피핀은 비잔티움에 반기를 든 교황의 ‘신성의 쿠데타’를 뒷받침해주었다. 서로의 약점을 완벽하게 보완하는 절묘한 커플을 이룬 것이다. 이제는 피핀이 교황령을 기증한 데 대한 대가만 받으면 되었다. 그 수혜자는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 재위 768~814)였다【샤를마뉴의 이름은 그의 할아버지(샤를 마르텔)를 따라 ‘샤를’이고 뒤에 붙은 ‘마뉴’는 존칭이다. 이 시대에는 아직 프랑스, 영국, 독일, 에스파냐 등의 서유럽 나라들이 생겨나기 전이므로 샤를마뉴의 이름도 지역에 따라 달리 불린다. 예를 들어 샤를을 독일식으로 읽으면 ‘카를(Karl)’이 되는데, 그래서 ‘카를 대제(Karl the Great)’라고 하기도 한다(프랑크 왕국은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의 기원이 되므로 독일식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또 샤를을 라틴어로 읽으면 카롤루스가 된다. 서로마 제국 황제로서 이르는 말이다. 카롤링거라는 왕조의 명칭은 여기서 나왔다(물론 그 이름도 원래는 샤를 마르텔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클로비스의 경우처럼 개창자의 아버지 이름을 왕조명으로 지은 것이다). 이후 중세에는 샤를마뉴의 이름을 딴 왕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영국의 찰스, 독일의 카를,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같은 왕명들은 모두 그에게 기원을 두고 있다】.
▲ 교회를 지킨 군대 로마의 교회와 게르만의 군대, 이 양자는 서로의 필요성으로 인해 찰떡궁합을 이루었다. 이 구도는 이후 로마-게르만 문명의 유럽 중세를 지배하는 기본 질서가 된다. 그림은 프랑크 왕국의 기병들이다. 로마교황에게 라벤나를 기부한 피핀의 군대가 바로 이들이었을 것이다.
마르텔-피핀으로 이어지는 유력 가문의 계보는 샤를마뉴에 이르러 활짝 만개한다. 할아버지 마르텔이 외적의 침략을 방어했고, 아버지 피핀이 새 왕조를 열었다면, 샤를마뉴는 그 터전 위에서 마음껏 정복 활동을 전개한 군주였다. 첫 목표는 할아버지 때부터 프랑크와 교황에게 눈엣가시였던 롬바르드족이다. 그들을 아예 없애기로 마음먹은 샤를마뉴는 프랑크의 전통적인 보병대를 중무장 기병대로 탈바꿈시켜 원정을 위한 체제로 편성했다. 774년에 알프스 산맥을 넘은 프랑크군은 롬바르드 왕국의 수도인 파비아를 접수하여 북부 이탈리아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다음에는 즉시 말머리를 서쪽으로 돌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슬람으로부터 카탈루냐를 빼앗았다(당시 바스크를 공략한 부대는 원주민 부대에게 참패하고 전멸했는데, 이 전투는 중세의 유명한 무훈시 『롤랑의 노래』의 소재가 되었다).
여기까지의 정복만 해도 이미 샤를마뉴는 오늘날의 프랑스, 이탈리아, 에스파냐를 아우르는 방대한 영토를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시 동쪽으로 진출한 프랑크군은 색슨족을 정복하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까지 손에 넣었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의 경계선은 엘베 강 유역에까지 확대되었으니, 로마 제국도 이루지 못한 소원을 대신 이루어준 셈이다(옛 로마는 항상 북쪽 국경을 엘베 강까지 넓히고자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라인 강으로 그쳤다). 피정복지에는 로마의 속주처럼 변경주를 설치했다. 이제 제국의 면모는 명확해졌다. 옛 로마 제국에 비해 영토의 면에서 뒤처지는 부분은 브리타니아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 정도였으며, 게르마니아는 오히려 로마시대보다 훨씬 넓어졌다.
샤를마뉴에게 제국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신앙이었다. 그는 정복이 이루어질 때마다 피정복지에 교구를 설치하고 현지 민족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요구했다. 영토와 정치에서 통합된 로마 제국을 넘어 이제 종교적 통합까지 이룬 제국을 건설했으니 샤를마뉴로서는 옛 로마 황제가 부럽지 않았다.
로마 황제가 부럽지 않은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이교도의 영토가 하나씩 가톨릭권으로 바뀌어갈 때마다 로마 교황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실제로 포교는 교황의 업무였으니, 손 한 번 대지 않고 시원하게 코를 푼 교황의 기분은 무척 좋았을 것이다. 더구나 샤를마뉴는 교황령을 더욱 확대해 이탈리아 중부 전역을 교황에게 기증했다. 교황 레오 3세(비잔티움 황제 레오 3세와는 물론 다른 인물이다)는 이제 피핀에게 준 선물 정도로는 샤를마뉴에게 보답할 수 없다고 여겼다.
800년 12월 25일에 레오 3세는 로마의 성탄절 미사에 참석한 샤를마뉴에게 결코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었다. 그의 머리 위에 교황이 직접 서방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씌워준 것이다. 신성의 황제가 세속의 황제에게 대관식을 치러준 격이다【로마 교황이 샤를마뉴를 서방 로마 제국의 황제로 임명한 것에 대해 비잔티움 황제는 신성모독이라며 반발했다가 813년에야 승인하게 된다. 그 당시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흥미로운 사건이 있었다. 당시 비잔티움 황제는 이레네(Irene, 752~803)라는 여제였는데, 그녀는 원래 레오 4세의 황비로 남편이 죽자 아들의 섭정을 맡았다. 790년 스무 살이 된 아들에게 할 수 없이 권력을 내주게 된 이레네는 마침내 797년 아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되찾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서방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샤를마뉴가 이레네에게 청혼을 했다는 점이다(그 무렵 이레네의 나이는 마흔이 넘었으니 분명히 정략결혼이다). 이 결혼이 성사되었더라면 막 갈라지기 시작한 동유럽과 서유럽은 다시 통합되었을지도 모른다(사실 샤를마뉴가 교황이 씌워주는 황제의 관을 덥석 받아들인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게다가 게르만법에 따르면 여자는 황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를 반대한 귀족들의 궁정 혁명으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레네는 유배되어 곧 죽었다】.
이 사건은 정치적 상징이기는 했으나 엄청난 의미를 내포한 상징이었다. 476년 서방 제국이 멸망한 이래 300여 년 만에 다시 서방 제국의 황제가 탄생한 것이다. 이로써 로마-게르만이라는 새로운 전통은 새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추세로 승인되었다. 그 새 시대란 바로 중세였고, 따라서 그것은 중세 유럽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아직도 로마 제국의 정당한 상속자는 동유럽의 비잔티움 제국이었지만, 이제 서유럽 세계의 본격적인 도전이 시작되었다. 제정일치와 중앙집권제의 비잔티움 제국과 달리 서유럽 세계는 신성(교황)과 세속(황제)이 적절한 분업과 협력을 통해 공동보조를 취하는 분권적인 체제였다. 처음에는 동방 제국에 비해 짜임새가 부족해 보였으나 이 느슨한 체제는 시간이 갈수록 힘을 발휘해 장차 서유럽을 세계 문명의 주역으로 만들게 된다.
▲ 전도사 군주 샤를마뉴는 비잔티움 황제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상당히 강했던 듯하다. 정치와 종교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비잔티움 제국은 그에게 최상의 목표이자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복지마다 동방정교의 라이벌 신앙인 로마 가톨릭을 열렬히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림은 샤를마뉴의 시대에 간행된 복음서의 한 쪽으로, 복음서 저자인 마태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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