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제의 본산: 프랑스
영국에 새 왕조를 건설한 앙주 가문은 분명히 프랑스의 유력 가문이다. 그런데 왜 이 분쟁에 프랑스 왕가는 개입하지 않은 걸까? 오늘날과 같은 국가 개념으로 본다면 당연히 프랑스 정부가 관여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중세 프랑스는 오늘날과 같은 국가가 아닐뿐더러 당시 서유럽을 제외한 전 세계에 존재하던 ‘일반적인 왕국’, 즉 초기 영토 국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라였다. 서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고 전통적인 프랑스가 어찌 된 일일까?
물론 프랑스에도 왕이 있었고, 왕조도 있었다. 서유럽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클로비스가 프랑스의 초대 국왕이며, 서유럽 왕실들의 모태를 이룬 카롤링거 왕조는 바로 프랑스의 왕조가 아니던가? 역사로만 본다면 어디에도 뒤질 게 없는 프랑스다.
그러나 프랑스는 봉건제의 본산이었던 만큼 그 폐해도 가장 크게 겪어야 했다. 봉건제의 정치적 측면은 바로 분권 체제가 아닌가? 에스파냐와 영국이 신흥 강국으로 발돋움하던 무렵에도 프랑스는 여전히 통일된 왕국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에서 카롤링거 왕조가 끊긴 것과 비슷한 무렵(10세기 중반) 프랑스에서도 카롤링거 왕조 대신 유력한 귀족들이 저마다 가문을 이루어 프랑스의 왕계를 잇게 되었다. 사실 그 이전에도 이미 카롤링거 왕가에서만 왕을 배출한 것은 아니고 귀족 가문들끼리 적절히 돌아가며 왕위를 계승하던 터였다. 어찌 보면 왕권 자체가 큰 의미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987년 파리 백작인 위그 카페가 이제부터 자기 아들에게 프랑스 왕위를 세습하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귀족들은 별로 반대하지 않았다. 카페(Capet) 왕조는 이렇게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출범했다.
▲ 오늘날의 파리를 만든 인물 카페 왕조의 개창자인 위그 카페(오른쪽)가 성자의 방문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그가 카페 왕조를 열었다고 해서 긴장하는 귀족들은 거의 없었다. 당시 카페 왕조는 파리와 오를레앙 일대만을 다스리는 봉건 영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페 왕조가 프랑스에 전국적인 정치력을 확보하는 시기는 12세기 후반부터다. 그러나 카페 왕조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프랑스의 수도는 파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시작부터 이랬으니 카페 왕조의 운명은 뻔했다. 11세기까지 카페 왕조의 왕들은 파리와 오를레앙 일대의 지역만 영지로 소유하고 지배했을 뿐, 다른 봉건 귀족들의 영지에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못했다(왕보다 더 큰 세력을 자랑하는 귀족들도 있었으니 간섭하려 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근근이 왕권을 이어오던 카페 왕조에 도약의 계기가 찾아왔다. 1108년에 왕위에 오른 루이 6세는 자신의 관할 구역 내에 있는 하급 영주들을 확실히 단속하지 않으면 자기 밥마저 찾아 먹지 못하겠다고 판단했다.
물론 예전의 허약한 카페 왕조를 염두에 둔다면 그가 마음만 먹는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느 정도 비빌 언덕이 있었다. 얼마 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이 한창일 때 카페 왕조는 일찌감치 교황의 편을 들어 적절한 타협을 이루고 교회의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418쪽 참조), 예상대로 ‘자기 밥’을 확보하고 난 다음 루이 6세의 야망은 이참에 카페 왕조를 명실상부한 프랑스의 왕가로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 이윽고 그는 강력한 봉건 귀족들인 아키텐 공작과 플랑드르 백작을 제압하고 아들 루이 7세에게 처음으로 왕다운 왕의 자리를 물려줄 수 있었다.
▲ 앙주의 상속자 프랑스 왕 루이 7세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버린 엘레오노르가 영국 왕 헨리 2세와 결혼했을 때 가슴이 뜨끔했을 것이다. 그녀는 바로 아키텐의 상속녀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헨리는 재빨리 앙주의 영유를 주장하고 나서서 골치 아프게 만드는데, 이것이 나중에 백년전쟁의 씨앗이 된다. 그림은 헨리와 엘레오노르가 부부애를 과시하듯이 다정하게 교회를 헌납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아직 프랑스의 왕은 프랑스를 지배할 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다. 루이 7세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아키텐 공의 상속녀인 엘레오노르와 결혼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고 결국 이혼했다. 문제는 1152년 그녀가 앙주 가문의 상속자와 재혼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새 남편은 바로 2년 뒤에 영국에서 플랜태저넷 왕조를 열게 되는 헨리 2세였다. 이미 프랑스에 노르망디, 브르타뉴, 앙주를 소유하고 있던 헨리 2세는 수지맞는 결혼으로 아키텐마저 얻음으로써 프랑스 서부 지역 전체를 소유하게 되었다(그의 아버지 조프루아도 마틸드와의 결혼으로 재산을 불렸으니 앙주 가문은 일찍부터 혼맥을 이용하는 데 뛰어났던 모양이다). 이 문제는 200년 뒤 영국과 프랑스 간에 벌어지는 백년전쟁의 불씨가 된다.
첫 결혼에서 재미를 보지 못한 프랑스의 루이 7세는 세 번째 결혼에서 비로소 대박을 터뜨렸다. 아들 필리프를 낳은 데다 유력한 귀족들인 샹파뉴 백작, 블루아 백작을 처남으로 두게 된 것이다. 이로써 프랑스는 영국의 플랜태저넷 왕조가 서부 지역을 소유하고 나머지는 카페 왕조가 지배하는 형세가 되었다.
▲ 필리프에게 온 편지 영국 왕 리처드와의 불화로 십자군 전쟁에서 혼자 되돌아온 필리프에게 예루살렘의 주교로부터 편지가 날아들었다. 성지가 다시 위기에 처했으며, 이슬람군의 침략으로 입은 피해가 상당하다는 내용이다(편지 아래에 주렁주렁 매달린 것들은 모두 편지가 배달되는 동안 여러 군데에서 찍은 확인 도장이다). 이런 편지가 왔다는 사실은 당시 프랑스의 왕이 십자군의 리더였음을 말해준다. 두목이 내뺐으니 3차 십자군이 실패할 것은 당연했다.
루이 7세의 아들이 바로 ‘존엄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필리프 2세(Philippe II, 1165~1223, 재위 1180~1223)다. 그는 2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던 아버지의 뒤를 따라 3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때의 동료가 헨리 2세의 아들로 영국 왕이 된 리처드 1세였다. 프랑스 내의 영토를 놓고 반목이 심하던 그들이었으니 원정 도상에서부터 서로 심하게 다툰 것은 당연했다. 필리프가 원정을 중지하고 되돌아온 이유도 사실은 리처드가 없는 틈을 타 노르망디를 차지하려 했기 때문이다(귀족들의 반대로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리처드는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처럼 당대에 으뜸가는 무예를 자랑하는 전사였으니 필리프로서는 맞상대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 패배와 발전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패하고 도망치는 영국 왕 존의 모습이다. 왼쪽에 말에서 떨어진 인물은 필리프인데, 영국에서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되었을 것이다. 전쟁에서 대한 것은 존에게 큰 불행이었으나 영국 전체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귀족들이 패배한 존을 압박해 마그나카르타를 성립시켰기 때문이다.
뛰어난 전사라고 해서 반드시 유능한 왕이 되는 건 아니다. 리처드는 인품도 훌륭했고 정치적 자질도 탁월한 인물이었으나 불과 10년밖에 재위하지 못한 데다 대부분 국외에 있었던 탓에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동생 존의 폭정으로 로빈 후드가 의적이 된 것은 의도치 않은 결과다), 그의 동생으로 왕위를 계승한 존은 형의 영웅적 자질을 전혀 닮지 못한 인물이었으나 책략에는 형보다 한 수 위였다. 1200년 그는 앙주 부근 푸아투의 한 지방인 앙굴렘을 소유하기 위해 그 상속녀인 이사벨라와 결혼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그녀의 약혼자였던 드 뤼지냥에게 아무런 보상도 지불하지 않은 게 빌미가 되었다. 드 뤼지냥은 즉각 프랑스의 왕 필리프 2세에게 탄원했다.
필리프로서는 없는 구실도 만들어야 할 판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든 격이다. 그는 상급 군주의 자격으로 존을 프랑스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호랑이굴에 제 발로 들어갈 바보는 없다. 존이 이를 거부하자 필리프는 2단계 조치로 넘어간다. 존이 왕명을 받들지 않았으니 봉건적 의무를 저버렸다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의 왕은 영국 왕보다 지위상 상급 군주였으므로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필리프의 이런 태도는 어디까지나 구실이었을 뿐이다. 이 구실을 이용해 필리프는 앙주를 몰수한다고 선언한다. 격분한 존은 조카인 독일 황제 오토 4세와 연합해 프랑스를 공격하나 패하고 만다.
앙주가 프랑스 영토가 됨으로써 노르망디도 자연히 프랑스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제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는 아키텐 일대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 엄청난 손실에 영국의 봉건 귀족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1215년에 존은 결국 그들의 힘 앞에 무릎을 꿇고 ‘귀족의 요구 사항’을 수락했는데, 이것이 바로 마그나카르타 Magna Carta(대헌장)【마그나카르타는 전문(前文)과 63개조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기본적인 그 내용은 국왕이 귀족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세금을 징수할 수 없도록 하고, 모든 자유인은 국왕이 아닌 법의 지배를 받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국왕보다 법이 우위에 있다고 밝힌 점 때문에 마그나카르타는 서구 의회민주주의의 출범을 알리는 중요한 문헌으로 간주되지만, 여기에는 조금 과장이 있다. 영국의 귀족들이 마그나카르타를 성립시킨 것은 민주주의를 의도했다기보다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그나카르타는 오히려 봉건제를 더욱 강화하려는 노력의 표출이다. 당시 영국의 상황은 봉건제가 지나쳐서 생기는 폐단보다는 봉건제도가 모자란 데 따르는 폐해가 더 컸던 것이다】다. 이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바탕으로 13세기 말에는 드디어 유럽 최초의 의회가 영국에서 탄생하게 된다. 마그나카르타로 영국의 왕은 강력했던 왕권을 잃었지만 거꾸로 영국인들은 서유럽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도약할 계기를 얻은 것이다.
▲ 의회의 먼 기원 로빈 후드에게 농락당한 영국 왕 존이 귀족들에게도 농락당한 결과로 맺은 마그나 카르타다. 이것을 기원으로 수십 년 뒤 영국에는 세계 최초의 의회가 성립하지만(그래서 오늘날 영국인들은 ‘700년 의회의 역사’를 자랑한다), 실은 대륙의 봉건제가 인위적으로 이식된 영국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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