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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7부 열매② - 1장 각개약진의 시대, 다시 온 혁명의 시대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7부 열매② - 1장 각개약진의 시대, 다시 온 혁명의 시대

건방진방랑자 2022. 1. 30.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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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온 혁명의 시대

 

 

라틴아메리카와 그리스의 독립은 빈 체제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아직은 변방의 사건들이었으므로 빈 체제를 끝장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변방의 바람은 곧이어 중심에도 밀어닥쳤다. 그 무대는 또다시 프랑스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프랑스에는 부르봉 왕조가 복귀했다. 처형된 루이 16세의 동생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18(1755~1824, 재위 1814~1824)는 새로 헌법을 제정해 프랑스의 주권은 국왕에게 있음을 천명했다. 그러나 혁명은 무너졌어도 혁명이 이룬 변화는 망각되지 않았다. 새 헌법은 개인의 권리와 평등권, 재산권 등 혁명의 이념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의회를 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이 자신은 개인적으로 현명한 왕이었고 정치적으로 중립을 취하려 했으나, 혁명의 시기에 가진 것을 몽땅 잃은 기억이 있는 귀족들은 더욱 보수적으로 돌아 국왕보다 더 심한 왕당파가 되어 있었다(실패한 혁명은 반동화를 부르는 법이다). 그래도 루이의 치세에는 그런대로 안정으로 향하는 듯하던 정세가 결정적으로 방향을 튼 것은 그의 동생으로 왕당파의 우두머리인 샤를 10(1757~1836, 재위 1824~1830)가 즉위하면서부터였다.

 

즉위 초기에 신문의 검열제를 폐지하는 등 잠시 자유주의 정책을 취한 샤를은 얼마 안 가 본색을 드러내고 반동 노선으로 선회했다. 1827년 의회 선거에서 자유주의 세력이 승리한 것은 그에게 시대와 대세의 감각을 일깨워주기는커녕 오히려 앙시앵 레짐의 좋았던 옛날을 회고하게 만들었다. 시대착오적인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한 그는 18305월 의회를 해산했는데, 이것이 커다란 실수였다. 7월의 새 의회 선거에서 자유주의자들은 더 세력이 커져 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선거를 치를수록 자유주의 세력은 확대되기만 했다. 그런 추세를 읽지 못한 샤를은 칙령을 내려 또 의회를 해산하고 출판물 검열제를 재도입하는 한편 의회 선거를 다시 치르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마지막 실수였다. 7월 칙령은 자유주의 세력의 총동원령이나 다름없었다. 자유주의 언론인과 지식인, 학생, 소시민 들은 국왕의 비상계엄령에 맞서 727일 일제히 봉기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프랑스 7월 혁명을 묘사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1830728>이다. 시민들의 봉기를 자유의 여신이 이끌고 있다. 앞서 그리스 독립전쟁에서는 서양의 자민족 중심주의를 드러내 보였던 그가 프랑스의 시민혁명에 대해서는 대단히 진보적인 관점을 보이는 게 흥미롭다.

 

 

2의 프랑스 혁명일까? 그러나 그건 아니다. 우선 샤를의 새로운 구체제는 불과 사흘을 버티지 못했다. 730일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부르봉 왕조의 문을 닫았다프랑스에서 사라진 부르봉 왕조는 이후 에스파냐에만 남게 되었다. 에스파냐의 부르봉 왕조는 약간의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대체로 1931년 프랑코의 공화정 독재가 성립할 때까지 존속했고, 1975년 공화정이 폐지되고 입헌군주제로 바뀌면서 다시 에스파냐 왕실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중세 이후 유럽 최대의 왕실이었던 합스부르크와 부르봉은 각각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서 일어나 성장했다가 결국은 에스파냐로 와서 몰락하는 같은 길을 걸었다. 결과도 프랑스 혁명과는 거리가 있었다. 정권을 타도한 세력은 하층 부르주아지가 주장하는 공화정 대신 자유주의 왕족이었던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 1773~1850, 재위 1830~1848)를 내세워 왕정을 계속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루이 필리프는 시민왕을 자처할 정도로 자유주의 이념을 신봉하고 있었으나, 대부르주아지의 지원을 받은 탓에 그들의 입김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또 그렇게 하려 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새로 들어선 왕정 체제는 온건한 자유주의와 급진적인 공화주의의 이념을 적절히 반영한 어정쩡한 상태였다. 그런 점에서 7월 혁명은 프랑스 혁명과 근본적으로 달랐으나 한 가지 닮은 점은 있었다. 프랑스 내에서보다 바깥에 더 큰 영향을 준 혁명이라는 점이다.

 

혁명의 덕을 본 것은 오히려 이웃의 벨기에였다.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다가 빈 회의에서 강제로 네덜란드 영토가 된 벨기에는 종교도 가톨릭이고 언어도 프랑스어로 네덜란드와 다를뿐더러 네덜란드 왕인 빌렘 1세의 차별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프랑스 7월 혁명의 영향으로 벨기에인들은 브뤼셀에서 봉기를 일으켜 네덜란드를 타도하고 독립을 쟁취했다그러나 벨기에만 성공했을 뿐 7월 혁명의 영향으로 이탈리아, 독일, 폴란드에서 일어난 혁명은 모두 실패했다. 자국의 자유주의 세력이 크게 성장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 점에서는 벨기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벨기에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특히 영국은 이 무렵부터 유럽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운명을 결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벨기에에 혁명을 수출했으면서도 막상 프랑스는 혁명의 성과를 맛보지 못했다. 특히 혁명을 지지한 프랑스의 기층 민중은 피 흘린 대가를 아무 데서도 얻지 못했다. 그들로서는 힘이 부족한 탓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그들이 힘을 갖추게 되면 또 다른 혁명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 힘은 정치적 힘을 뜻하는 게 아니다. 정치적 힘이라면 이미 프랑스 혁명에서 공화제를 이루어낸 것으로 입증되었으니까. 이제 필요한 것은 경제적 힘이다.

 

그 힘은 2월 혁명 이후부터 급속도로 증대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의 바람이 바다를 건너 유럽 대륙으로 불어온 것이다. 전통적인 농업국이었던 프랑스의 산업 구조는 빠르게 변했다. 1836년에는 프랑스에도 철도가 생겼고, 파리의 인구는 어느새 100만 명 이상으로 늘었다. 공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전되면서 자본주의의 생래적인 사회문제도 금세 널리 퍼졌다. 같은 과정을 수십 년 전에 겪은 영국은 오래전에 사실상 공화제나 다를 바 없는 입헌군주제를 취했으므로 문제가 정치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억제할 수 있었으나, 아직 공화제의 옷으로 갈아입지 못한 프랑스에서는 사회문제가 즉각 정치 문제로 변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46~1847년에는 대규모의 흉작과 기근까지 겹쳤다. 공업국으로 발돋움하는 중이었지만 아직도 프랑스는 농업국이었으므로 농민의 궁핍화는 곧장 구매력 감소로 이어졌고, 이로 인한 공업의 위축은 곧바로 노동자의 실업으로 이어졌다. 1848222, 파리의 노동자들은 불법 집회를 열었다. 상황은 18년 전보다 더욱 혁명적이었고, 혁명 자체의 규모도 7월 혁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불법 집회가 2월 혁명으로 확대되는 데는 며칠이면 충분했다. 이틀 뒤인 224일 노동자들은 파리시청을 점거했고, 곧이어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했다. 스무 살 때인 55년 전 국왕 루이 16세가 처형되는 것을 목격한 바 있는 필리프 당시 그의 아버지도 단두대에 올랐다는 재빨리 를 손자에게 물려주고 영국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의 권력을 승계한 것은 그의 손자가 아니라 임시였다. 새로 구성된 임시정부는 곧바로 의회를 새로 구성했다. 에도 의회야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번 의회는 아주 특별했다. 랑스 사상 처음으로, 유럽 사상 처음으로, 아니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성인 남자가 투표에 참여하는 의회 선거가 실시된 것이다그전까지 프랑스의 의회 선거에서는 정한 재산을 소유해야만 유권자의 자격이 주어졌다(루이 필리프 시대에는 200프랑의 세금을 내야만 가능했다). 프랑스 혁명기에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뱅은 처음으로 보통선거 제도를 입안한 적이 있었으나 사정상 실시가 보류된 바 있었으므로 보통선거는 이것이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성은 제외되었다. 여성의 참정권은 세계 최초인 뉴질랜드(1893)를 제외하면 대부분 20세기에 인정되었다. 20세기 초반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에 이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서유럽에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고, 프랑스의 경우에는 1944년에야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참정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 덕분에 25만 명이던 유권자 수는 순식간에 9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4월에 실시된 의회 선거에서는 여전히 자유주의 세력이 압승을 거두었고, 파리의 노동자들은 18년 전 7월 혁명의 전례가 있는지라 또다시 지긋지긋한 왕정이 복귀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5월에 의회를 기습하고, 6월에는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당시 노동자들은 놀랍게도 폴란드 해방을 구호로 내걸었는데, 구호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마르크스 이전에 이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움직임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봉기는 진압되었지만 이제 자유주의 의회는 노동자들의 우려를 확실히 불식시켜야 할 의무를 느꼈다. 그해 11월 공화정 헌법이 새로 제정되었고, 프랑스는 50년 만에 다시 공화국으로 되돌아왔다.

 

프랑스 혁명기의 공화정은 난생처음 접하는 탓에 최고 지도자를 선거로 뽑을 겨를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새 헌법에 따라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그런데 그 결과는 놀라웠다.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Louis Napolicon, 1808~1873)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것이다. 비록 왕당파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었다고는 하지만, 프랑스 국민들(물론성인 남성들)나폴레옹 향수는 대단했다.

 

하지만 마음속에만 남겼어야 할 항수를 투표로 실현시킨 대가는 참혹했다. 20대 젊은 시절부터 큰아버지를 모방해 위대한 프랑스 제국을 추구한 루이 나폴레옹은 1851년에 헌법상 임기 4년에 단임으로 되어 있어 집권 연장이 불가능해지자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해버렸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국민투표에 부쳤고, 프랑스 국민들은 다시 그에게 몰표를 주었다.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어진 그는 이듬해 나폴레옹 3(1808~1873, 재위 1852~1870)로서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

 

두 나폴레옹의 행보가 어쩌면 그리도 똑같을까? 혁명으로 기존 정권이 붕괴한다. 그 틈을 타서 인기를 바탕으로 집권한다. 그 권력을 이용해 종신 집권자가 된다. 같은 이름의 큰아버지와 조카는 50년 간격으로 또다시 프랑스를 과거로 퇴행시키고 자신은 제위에 올랐다. 혁명으로 시작했다가 온전한 공화제를 이루는 데 실패하고 제국으로 타락해버린 프랑스 혁명의 완벽한 축소판이다. 그렇다면 결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혁명의 시대 18년 전의 7월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1848년의 2월 혁명은 더욱 급진적인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사이 프랑스의 산업 노동자층은 한결 두터워졌고, 사회구조의 변화를 정치적으로 수용하라는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그림은 광장에서 군대와 민중이 충돌하는 장면이다. 이 혁명으로 프랑스 민중은 공화정을 이루었으나 나폴레옹의 환상은 지우지 못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

200년 만의 외교

다시 온 혁명의 시대

공산주의 이념의 탄생

변방의 성장: 러시아

변방의 성장: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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