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적인 국제 질서의 수립
20여 년 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유럽 세계는 사상 처음 겪은 엄청난 전쟁의 규모에 경악했다. 또 그런 만큼 이것으로 전쟁은 끝인 줄 알았다. 이보다 더 큰 전쟁은 없으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한 번만으로 족할 줄 알았던 세계대전은 겨우 20년 뒤에, 그것도 더욱 큰 규모로 터져 나왔다(사망자의 수만 해도 제1차 세계대전의 두 배가 넘었다). 그제야 세계는 얼마든지 더 큰 전쟁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또 그럴 경우 세계는 공멸하리라는 것도 실감했다.
유럽인들은 중세에 대규모 전쟁이 없었던 이유를 새삼 생각해 보았다(십자군 전쟁이야 오래 질질 끌었을 뿐이지 대전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중세가 끝나고 근대에 들어온 뒤부터 대형 국제전들이 연이어 벌어지게 된 이유를 곰곰이 곱씹어보았다.
최소한의 통합성이 없으면 전쟁은 필연적이다. 300년 전에 홉스라는 철학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법과 제도에 묶이지 않은 ‘자연 상태’에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 있을 뿐이라고. 그는 한 나라 내의 개인과 사회를 말한 것이지만 그 말을 국제적으로 연장하면 국가가 곧 개인이 된다. ‘국가의 국가에 대한 투쟁.’
중세에는 교회와 교황이 그런 투쟁을 조정하는 ‘법과 제도’의 역할을 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연합국 측은 중세의 교황과 같은 역할을 해줄 기구를 만들었다. 그것이 1945년 10월에 결성된 국제연합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생긴 국제연맹의 결정적인 단점은 강제력이 없다는 것이었으므로 국제연합은 그 점을 보강하기로 했다. 참가국들의 군사력을 동원해 국제연합군을 편성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국제연합 사무국은 교황청이었고, 국제연합군은 교황군이었다. ‘교황령’은 뉴욕의 39층짜리 빌딩으로 축소되었지만.
대규모 국제전은 많은 신생국을 만든다. 17세기부터 세기마다 한두 차례씩 터진 유럽의 국제전이 모두 그랬고, 20세기 초의 제1차 세계대전도 그랬다. 제2차 세계대전은 사상 최대의 신생국들을 낳았다. 우선 독일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은 모두 이전 상태로 되돌아갔다. 엉겁결에 독일에 합병된 오스트리아는 다시 분리되어 중립국이 되었으며, 이탈리아가 점령했던 동유럽의 국가들도 전부 다시 독립했다. 아시아에서도 일본이 점령했던 한반도가 독립했고, 인도차이나와 인도네시아가 다시 옛 주인인 프랑스와 네덜란드에 귀속되었다가 결국에는 독립을 이루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때처럼 승전국이 전쟁 중에 차지한 지역은 독립시키지 못하는 관례가 여전히 통용되었다. 그 때문에 소련이 집어삼킨 발트 3국은 독립하지 못했다(이 나라들은 소련이 해체된 뒤 1991년에야 독립하게 된다). 다만 절반만 먹은 폴란드는 소련도 다시 토해내야 했다. 여기서 다른 연합국들은 새로운 긴장을 느꼈다.
▲ 소련의 포스터 종전이 가까울 무렵 소련에서 나온 전쟁 포스터다. 미국과 영국, 소련이 합심하여 히틀러의 목을 죄고 있다. 물론 소련은 어엿한 승전국의 신분이지만, 개전 초기 폴란드 분할과 핀란드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을 감안하면, 국제 파시즘에 일관되게 반대했다고 보기도 어렵고 또 전쟁을 내내 주도한 영국이나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다준 미국과 같은 위상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그러므로 이 포스터는 장차 소련이 전후 질서 재편의 주역이 되겠다는 각오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영국이 무너짐으로써 소련의 의도는 맞아떨어졌다.
그 긴장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잠시 국제 파시즘이 지배한 동유럽 국가들은 불행하게도 전통적인 지배층이 대부분 파시즘과 결탁하고 있었다. 독립을 이루면서 국내의 반파시즘 세력이 지배층을 쫓아내고 집권했는데, 그 중심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전후에도 여전히 약소국의 신세인 탓에 서유럽 국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그 나라들은 전후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 소련으로 붙었다(물론 소련도 적극적으로 손짓을 보냈다)【제2차 세계대전에서 동유럽 국가들의 지배 세력이 파시즘에 붙은 이유는 이 지역이 전통적으로 오스트리아의 관할 구역이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오스트리아는 항상 동유럽을 노렸고, 동유럽의 지배층도 오스트리아와 자주 야합했다. 15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이 붕괴한 이후 동유럽은 늘 여러 약소국으로 나뉘어 분열과 갈등을 거듭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오스트리아가 늘 동유럽을 넘본 것이며,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 세계가 일제히 공산화된 이유도 그런 역사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연합국들은 긴장을 넘어 새로운 위기를 느꼈다.
그러나 서유럽 세계도 변화의 물결에서 예외가 되지는 않았다. 전쟁의 조짐이 역력했던 1930년대 후반에도 영국은 내내 전쟁을 망설였다.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국내 경제가 여의치 않았던 탓이 크지만, 역사적으로 영국이 대륙의 사태에 개입하기를 꺼려왔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하지만 전후에 영국은 그런 부담을 덜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의 리더 자리와 함께 세계의 리더 자리를 미국에 내주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영국 경제는 엄청난 규모의 전쟁으로 인해,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륙 경제와 함께 몰락해버렸다.
영국이 남긴 빈자리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국은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른 데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세계 정치의 중심이라는 지위까지 획득했다(현대의 교황청‘이 미국에 설치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씨앗에서 뿌리, 줄기, 개화, 결실로 이어지면서 내내 서쪽으로 향했던 유럽 문명은 이제 다시 한 걸음, 그리고 최종적으로 서진했다.
소련의 동유럽 진출로 연합국들이 느낀 위기는 미국으로 넘어갔다. 이제 새로운 세계 질서의 두 축이 된 미국과 소련은 처음부터 대립을 빚으면서 관계를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아니 최소한 10년 전의 상황이었어도 전쟁의 조짐은 뚜렷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일체의 여백이 없이 모든 지역이 꽉 짜인 유럽 세계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고, 따라서 분쟁의 초점이 아니었다. 이후 20세기 말까지 이르는 50여 년 동안 3차 대전을 막은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긴 호흡에서 볼 때 제2차 세계대전은 17세기 30년 전쟁으로 분립하기 시작한 서유럽 세계의 질서를 완성한 전쟁이었다. 30년 전쟁으로 서유럽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던 그전까지의 종교적 질서를 깨고 각개약진에 나섰고, 에스파냐-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국민국가적 질서를 수립했다. 이후 서유럽 세계는 제국주의 질서로 세계 분할을 완료했고, 식민지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여기서 패배한 후발 제국주의가 국제 파시즘 세력을 이루면서 다시금 대회전을 벌인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러나 그 치열한 전쟁들을 거치면서 만들어낸 최종적인 전리품은 서유럽이 아닌 다른 대륙, 다른 세계로 넘어갔다. 연합국의 3대 승전국인 영국·미국·소련 가운데 영국의 운명만 서유럽과 함께 몰락했다는 점은 나머지 두 나라, 미국과 소련이 전후 질서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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