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신앙의 이분법은 이단이요 오류다
이러한 유스틴의 주장 속에서 우리는 이미 유스틴이 요한의 제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얼마나 요한복음의 사상이 2세기의 교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지를 쉽게 감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유스틴의 제자인 타티안이 디아테사론, 즉 4복음서체제를 구상하게 된 것도 요한복음의 구도와 사상체계 속에서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쟁론 속에서 2세기 초기기독교의 자유로운 사유의 건강성을 감지할 수가 있다. 즉 신앙과 이성을 근원적으로 이원화시키지 않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신앙과 이성을 이원화시키고 암암리 이성을 신앙에 종속시키고, 은총의 빛(lumen grātiae)을 이성의 빛의 상위에 두는 것은 모두 중세 스콜라철학의 장난이다. 기독교의 복음의 진리로써 인간의 이성을 발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 신앙의 질곡 속에 인간의 이성을 질식시키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편리한 이론적 장치로서 그러한 대립적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영ㆍ육의 대립이란 도덕적으로 의미있을 수 있을지라도,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심령 속에 이성과 신앙의 이분이 허락될 수 있단 말인가?
21세기의 기독교는 이성과 신앙의 이분법을 완벽하게 타파해버려야 한다. 이성의 훈련이 심화되면 될수록 심오한 신앙이 발현될 수 있는 종교로서 다시(re-) 형성되어야(formed) 한다. 그것은 복음의 본래적 지평 위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는 그 본래적(本來的) 지평을 애써 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신앙의 모든 요소는 이성적으로 설명가능하다. 결단의 벼랑까지 인간을 몰고가는 것은 이성이지 맹목적 신앙이 아니다. 결단의 벼랑까지 우리는 장님처럼 끌려가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끄는 놈이나 끌리는 자나 다같이 자멸할 뿐이다. 우리나라의 신학대학교의 커리큐럼들이 전면 개편되어야 한다. 뜻있는 신학자, 신학대학교수들, 학생들 모두 그러한 개혁을 요구해야 한다. 모든 교단도 끊임없이 자기쇄신의 용단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은 이단의 용인이 아니라, 정통신학을 어떻게 보다 개방적 정보의 공간 속에서 확보하느냐 하는 문제일 뿐이다.
유스틴(저스틴으로도 읽음)은 당대 견유학파(Cynicism)의 크레센스(the Cynic Crescens)와 쟁론을 벌이곤 했는데 크레센스가 그를 배반하여 죽음으로 휘몰았다. 율법이 요구하는 제사를 드리는 것을 강요당하자 그는 이렇게 외쳤다. “어떻게 올바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경건에서 불경으로 변절할 수 있겠는가?” 그의 목에는 칼날이 떨어졌다.
▲ <토마스 아퀴나스의 승리>라는 그림. 중앙에 앉은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이고, 밑에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이슬람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아베로에스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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