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
여기에 또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이다. 죽음도 결국 우리 삶의 문제이다. 우리의 삶이 궁극적으로 죽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영원히 우리 삶 속에 있다. 죽음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리의 삶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싯달타가 해결하려고 했던 것은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였다. 살아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위하여 그는 몸부림쳤던 것이다.
이러한 몸부림 속에서 싯달타라는 한 인도청년이 깨달았던 것은 중도(madhyamá pratipad)였다. 안락의 방법으로도, 선정의 방법으로도, 고행의 방법으로도 접근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길! 그 길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싯달타가 고행의 극한에서 고행을 부정했다는 사실은 그가 속했던 거대한 문명의 체계에 대한 일대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도전이란, 영육이원론에 기초한 어떠한 수행으로도, 일자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타자를 희생시키는 그러한 분열적ㆍ대립적 방법으로는 그가 소기했던 바 목샤(mokṣa, 解脫)의 길을 발견할 수 없다는 실존적 결단이요 포효였다. 그가 깨달았던 것은 어떠한 기존의 방법, 기존의 사유나 행위의 외재적 기준에 의한 완성으로는 살아있는 인간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지금 완성코자 하는 것은 새로운 인간이요, 새로운 삶이다. 그는 지금 거룩한 사두(sadhu, 힌두교에서 말하는 성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새로운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모든 미스티시즘(mysticism), 모든 신비한 우주에의 통찰은 일자(the One)를 전제로 한다. 그 일자를 브라흐만이라 해도 좋고, 야훼라 해도 좋고, 알라라 해도 좋고, 아둠(Atum)이라 해도 좋고, 미트라(Mithra)라 해도 좋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ā)라 해도 좋고, 제우스라 해도 좋고, 그냥 하나님이라 해도 좋고, 하느님이라 해도 좋고, 또 라오쯔(老子)가 말하는 따오(道)라 해도 좋다. 모든 미스티시즘의 본질은 이 일자와 인간의 만남(Encounter)의 관계의 설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의 설정은 최소한 종교적 맥락에 있어서는, 반드시 바크티(bhakti)라는 심령적 실천의 분위기가 깔려있는 것이다. 바크티는 우리가 보통 ‘devotion’이라고 영역하기도 하고, ‘신애’(信愛)라고 한역하기도 하는데, 모든 종교는 사실 일자에 대한 사랑이나 헌신, 또는 믿음, 신앙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결국 모든 인류의 종교의 형태는 이 바크티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그 관계를 일자의 타자에로의 복종이나 복속의 일방적 관계로 설정하면 유대교나, 기독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종교형태가 태어날 것이다. 그런데 이 바크티의 관계를 신과 인간, 이 양자가 서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설정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신론(monotheism)의 범주를 뛰어넘는 갖가지 신비주의의 형태가 태어난다. 베다문학에서 잉태되어 우파니샤드의 철학으로 발전한 범아일여론(梵我一如論)도 유니크한 하나의 신비주의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최소한 이러한 범아일여론은 싯달타라는 인도청년이 태어날 수 있는 문화적 기층을 형성했을 뿐 아니라, 직접 간접으로 싯달타의 사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 11세기에 지어진 카쥬라호(Khajurāho)의 칸다리야 마하데바(Kandārya Mahādeva) 힌두사원의 전경. 이 사원은 1m가량의 조각품 872개로 휘덮여 있는데 에로티시즘의 역동적인 미투나상을 과시하고 있다. 아트만의 예찬은 나의 몸의 성적 에너지의 예찬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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